김기석의 새로봄(103)

 

화여, 복이 네게 기대어 있구나

 

롯이 아브람을 떠나간 뒤에,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아라. 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아주 주겠다. 내가 너의 자손을 땅의 먼지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 누구든지 땅의 먼지를 셀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너의 자손을 셀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땅을 너에게 주니, 너는 가서, 길이로도 걸어 보고, 너비로도 걸어 보아라.” 아브람은 장막을 거두어서, 헤브론의 마므레, 곧 상수리나무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서도 그는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창세기 13:14-18)

 

기근을 피해 애굽에 내려갔던 아브람은 큰 부자가 되어 벧엘 인근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곳은 아브람이 처음으로 단을 쌓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곳이다. 그런데 한 가지 곤란한 문제가 생겼다. 조카인 롯도 역시 재산이 늘어서, 삼촌과 조카가 함께 거주하기에는 그 땅이 비좁았던 것이다. 그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추수를 끝낸 여름 들판에서 방목을 하는 유목민들이었는데, 풀밭을 확보하고 가축에게 먹일 물을 확보하는 것은 각 집단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였기에 목자들 간에 다툼이 일어나곤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자 아브람은 해결책을 모색한다. 문제가 있는 것을 없는 양 덮어두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갈등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악화될 수 있는 갈등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당사자들이 힘들더라도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 그래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아브람은 목자들 사이의 다툼이 자칫하면 숙질(叔姪)간의 갈등으로 비화될 수 있음을 알았기에 조카 롯을 부른다. 그리고 ‘혈육 간에는 다투면 안 된다’는 대전제 아래, 둘 사이의 갈등을 피하는 길은 서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브람은 롯에게 선택권을 준다. “네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 사람들은 여기서 아브람의 인간성을 보지만 사실은 가속을 책임진 사람이 취해야 할 책임성을 드러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롯은 삼촌의 말이 합당하다고 여겨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하여 마침 주님의 동산 같아 보였고, 이집트 땅과도 같아 보였다. 그는 주저없이 그곳을 택한다.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식의 미담을 기대하는 우리에게 롯의 선택은 매우 유감스럽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요단 들을 바라보는 롯의 시선을 선악과를 바라보는 하와의 시선에 빗대어 말하기도 한다. 성서 기자는 롯의 선택이 그다지 현명한 것이 아니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 “아직 주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이었다”는 말이 그것이다.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노자는 “화여, 복이 너에게 기대어 있구나. 복이여, 화가 네 속에 엎드려 있구나. 누가 그 끝을 알리요?”〔禍兮(화혜)여 福所倚(복소여)요 福兮(복혜)여 禍所伏(화소복)이니 孰知其極(숙지기극)이리요, 『도덕경』 58章〕 하고 탄식했다. 복과 화가 뿌리부터 뒤엉켜 있는 것이라면 복을 구하는 것도 화를 피하는 것도 어찌 보면 부질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다.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람을 불러 “너 있는 곳에서 눈을 크게 뜨고, 북쪽과 남쪽, 동쪽과 서쪽을 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눈길이 닿는 모든 땅을 그와 그의 자손들에게 아주 주겠다고 약속하신다. 아브람이 머물러 살게 된 그 땅은 ‘헤브론’이었다. 헤브론은 ‘하나님의 친구의 도시’라는 뜻이다.

 

*기도*

 

하나님,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이익이 걸린 문제 앞에서 등을 돌리는 일이 많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계산하는 마음이 인간관계를 규정지을 때 우정은 가뭇없이 스러지고 맙니다. 롯은 철부지였을지 모르지만 악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일쑤 그런 선택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기득권을 내려놓으면서도 원망에 빠지지 않는 사람만이 평화를 만들 수 있음을 압니다. 주님, 우리 속에서 생명과 평화의 꿈이 소멸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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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5)

 

 정말로 걱정해야 할 것

 

원로 장로님 한 분과 이야기를 하며 그분이 장로로 세워질 때의 이야기를 들었다. 30대 후반, 나이며 신앙이며 당신은 자격이 없다고 피했지만 담임목사님이 몇 번인가를 찾아와 설득하며 권했다고 한다. 새벽에도 밤중에도 찾아왔다니 교회나 목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겠다 싶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요즘의 세태로 이어졌다. 자격 없다 싶은 이들이 자리를 탐하는 모습을 볼 때가 있다. 믿음도 믿음이지만 많은 이들을 이끌려면 성품이 중요한데 그렇지 못한 이들이 자리에 욕심을 내고, 그 직분을 얻기 위해 애를 쓸 때가 있다. 그 결과로 빚어지는 일은 본인은 물론 교회나 다른 이들에게도 불행한 모습으로 나타나고는 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장로님과 이야기를 나누며 내내 <논어>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불환무위, 환소이립’(不患無位, 患所以立)이라는 말로, ‘자리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그 자리에 설 수 있는지를 걱정하라’는 뜻이다.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없는 자는 자리를 탐하고, 마땅히 그 자리에 서야 할 자는 자리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참으로 기이한 세상이다. 세상은 자리를 탐하고 그 자리를 얻기 위해 애를 쓰지만, 정말로 걱정할 일은 따로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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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4)

 

오디가 익는 계절

 

피기도 전에 잘리는 담배 꽃 이야기를 듣고는 담배 꽃엔 예수님의 십자가와 어머니의 희생이 담겨 있는 것 같다며 아직 본 적이 없다는 꽃을 보기 위해 시골을 찾았을 때, 담배 밭 초입에 선 뽕나무에는 오디가 잔뜩 달려 있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까만 오디가 종알종알 가지마다 가득했다.

 

바닥에도 떨어진 것이 까맣게 널려 있었으니 오디는 익을 대로 익은 것이었다. 보기로 한 담배 꽃은 뒷전, 우리는 오디를 따먹기 시작했다. 손과 입이 금방 까맣게 변했는데, 그런 서로의 모습을 보며 아이들 같이 웃어댔다.

 

 

 

 

오디를 따먹다 보니 어릴 적 소리 생각이 났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소리가 어느 날 학교를 다녀오더니 물었다.


“아빠, 뽕나무를 보지 않고도 오디가 익은 줄 어떻게 아는지 알아요?”


오디가 익었는지를 확인하려면 뽕나무를 보는 일이 당연한 일, 나무를 보지 않고도 오디 익은 걸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니 궁금했다.


“새똥을 보면 알아요, 새똥이 까매지면 오디가 익은 거예요.”


오디를 따먹은 새가 똥을 누면 새똥의 색깔이 오디 빛깔, 새똥만 살펴도 오디 익은 걸 알 수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 속에서 자연을 관찰하며 자라는 아이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다시 한 번 오디의 계절이 왔다. 오디가 달린 뽕나무 앞에서는 내남없이 모두가 아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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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의 새로봄(102)

 

날이 갈수록 근사해지는 삶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24)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빌립보서 1:20).

 

이 견결한 희망이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기둥이었다. 죽음의 공포조차도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을 끊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소망한다. ‘떠난다’(analyo)는 헬라어 단어는 배가 묶여 있던 줄을 풀고 항해에 나서다, 죄수가 석방되어 감옥을 떠나다, 소가 멍에에서 풀려난다 할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죽음은 해방인 셈이다. 하지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 세상에서의 그의 소명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소명이란 성도들을 더욱 발전된 믿음으로 이끄는 것과 믿음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는 것이다.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빌립보서 1:24)

 

‘나의 있음’이 그의 유익이 되도록 사는 것! 성도의 삶이란 이런 것이어야 한다.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자기 좋을 대로 처신하지 않는다. 남 좋을 대로 살려고 애쓴다. 이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평화가 있고, 웃음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신다. 도종환 시인의 <가죽나무>는 언어로 그린 시인의 자화상이다.

 

 

 

 

 

“나는 내가 부족한 나무라는 걸 안다/내딴에는 곧게 자란다 생각했지만/어떤 가지는 구부러졌고/어떤 줄기는 비비 꼬여 있는 걸 안다/그래서 대들보로 쓰일 수도 없고/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다는 걸 안다/다만 보잘것없는 꽃이 피어도/그 꽃 보며 기뻐하는 사람 있으면 나도 기쁘고/내 그늘에 날개를 쉬러 오는 새 한 마리 있으면/편안한 자리를 내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내게 너무 많은 걸 요구하는 사람에게/그들의 요구를 다 채워줄 수 없어/기대에 못 미치는 나무라고/돌아서서 비웃는 소리 들려도 조용히 웃는다.”

 

대들보로 쓰이지도 못하고, 좋은 재목도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있는 자리에서 아름답게 살려고 애써온 시인의 살뜰한 정성이 귀하게 생각된다. 위대한 첼리스트인 카잘스의 전기를 읽다가 아름다운 고백과 만났다.

 

“지난 생일(1969년 12월 29일)에 나는 아흔 세 살이 되었어요. 물론 젊은 나이는 아니지요. 사실 아흔 살보다는 많으니까요. 그렇지만 나이란 상대적인 문제잖아요. 만약 여러분이 계속 일을 하면서 주변 세계의 아름다움을 계속 느낄 수 있다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반드시 늙는다는 뜻만은 아니라는 걸 여러분도 알게 될 겁니다. 적어도 일상적인 의미에서는 그래요. 나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감동하고, 삶은 갈수록 더 근사해지니까요.”(앨버트 칸 엮음, 『첼리스트 카잘스, 나의 기쁨과 슬픔』중에서) 날이 갈수록 삶이 근사해진다는 것, 멋지지 않은가.

 

*기도*

 

하나님, 유대의 옛 전설은 사람은 누구나 다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전합니다. 이 땅에 잠시 머물다가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는 순간 하늘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늘을 잊고 말았습니다. 영혼은 남루해졌고, 시야는 좁아졌습니다. 자신의 몸을 통해 그리스도의 존귀함이 드러나기를 바랐던 바울 사도의 진솔한 고백이 우리의 부끄러운 삶을 뒤흔듭니다. 주님, 우리도 그런 인생의 목표를 설정하고 살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 길 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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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3)

 

한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창 피었던 난 꽃이 졌다. 붉고 진한 향기를 전하더니 이제는 시들어 버리고 말았다. 언제 향기를 전했냐고 시치미를 떼듯이 누렇게 말라버리고 말았다. 아직도 더 마를 것이 있다는 듯이 꽃의 형체로만 남았다. 시든 꽃에서는 더 이상 향기가 나지 않는다.

 

묵중하면서도 코끝을 찌르던 향기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향기의 근원을 찾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들었던 향기이기도 했다. 누군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열정의 탱고 춤을 추듯이,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하 어둠 속에서 세월을 잊고 포도주 빛깔을 익히듯이 향기는 그렇게 은은히 전해졌다.

 

 

 

 

분명 지는 꽃과 함께 향기는 사라졌다. 시든 꽃에서는 어떤 향기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향기는 마음 끝에 남아 있다. 향기는 모두 사라진 것이 아니다. 꽃이 피어있는 동안 전해주었던 향기는 남아 있다. 그 때 그 향기를 떠올리면 향기는 기억을 일깨우며 살아온다. 사라져서도 남는, 복된 향기!  

 

향기의 근원을 찾아서 만나게 되는 존재가 있다는 것, 한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 잠깐 피었다 사라진 난향이 전해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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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 두고두고 꾸짖지 않으시며, 노를 끝없이 품지 않으신다. 우리 죄를, 지은 그대로 갚지 않으시고 우리 잘못을, 저지른 그대로 갚지 않으신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사랑도 크시다. 동이 서에서부터 먼 것처럼, 우리의 반역을 우리에게서 멀리 치우시며,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시편 103:8-14)

 

자식은 부모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걱정거리일 때도 많다. 어쩌면 자식은 세상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스승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속상하다고 하여 내칠 수도 없는 것이 자식이다. 하나님은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우리를 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잘 아신다. 온갖 지혜를 자랑하고 못할 일이 없는 것처럼 설레발치며 살지만 우리는 잠시 이 땅에 머물다 가는 존재일 뿐이다. 변화에 종속된 것이 인간의 실체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할만한 푼수가 되지 못한다. 무지할 뿐만 아니라 욕망의 구슬아치 노릇을 하느라고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값도 못하고 사는 우리들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 덕분이다.

 

“부모가 자식을 가엾게 여기듯이, 주님께서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가엾게 여기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창조되었음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한갓 티끌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시편 103:13-14)

 

우리의 있음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하지만 자기를 실현해야 할 과제 앞에 서 있는 인간은 늘 흔들림 속에 있다. ‘되고 싶은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불화는 무겁게 우리 삶을 짓누른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함부로 내치지 않으신다. 우리 존재의 연약함을 사랑으로 껴안으신다. 못난 자식의 슬픔과 아픔까지도 껴안는 부모의 마음처럼.

 

 

 

 

마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남자가 있었다. 어느 수도자가 아무리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수도원에 머물면서 자기 마음을 다스려보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하고 수도원을 떠났다.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된 후 그는 마지막이라면서 다시 수도원에 돌아왔다. 2주쯤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결국 숨어서 마약을 하고 말았다. 수도자가 그를 꾸짖었다. “자네는 사나이가 아니군. 하려면 정정당당히 하지 그게 뭔가?” 그러자 그는 당당하게 마약을 했다. 그때 그 남자와 오랫동안 사귀었던 여자가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울고만 있었다. 그러자 그 길로 그는 마약을 끊었다. 공허했던 마음이 채워졌던 것이다. 

 

신비하구나, 주님의 사랑. “주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사랑이 그지없으시다”(시편 103:8).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면 꾸짖기도 하시지만 무엇보다도 슬퍼하신다. 그 마음을 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옛 삶을 지속할 수 없다.

 

*기도*

 

하나님, 진흙에 불안을 더하면 인간이 되고, 인간에서 불안을 빼면 진흙이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습니다. 삶의 비애가 무겁게 우리를 짓누를 때가 있습니다. 나의 있음이 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 선과 악, 기쁨과 슬픔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우리 인생을 빚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감싸고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 사랑의 신비 안에 머물면서 주님의 영광을 오롯이 드러내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빛이 되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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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2)

 

 골 빠지는 일

 

오랜만에 어머니와 통화를 하였다. 무엇 그리 바쁘다고 자주 연락도 못 드리며 산다. 이런 저런 안부를 묻고 대답을 하는데, 어머니가 물으신다.


“한 목사님, 요즘도 교차로에 원고 써요?”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자식들에게도 말을 높이신다. 세월의 고개 아흔이 넘자 모두가 고맙고, 모두를 존중하고 싶으신 것 같다. 요즘에도 쓰고 있다고 대답을 하자 무슨 요일에 실리는지, 몇 년째 쓰고 있는지를 다시 물으신다.


“수요일에 실리고요, 원고 쓴 지는 23년쯤 된 것 같은데요.”

 

 


 

길을 가다 만나게 되는 생활정보지 중에 <교차로>가 있다. <교차로> ‘아름다운 사회’ 란에 일주일에 한 번씩 칼럼을 쓴다. 전국적으로 발행이 되고, 한국인이 많이 사는 외국의 대도시에도 발행이 되는 정보지로, 일주일에 한 번씩 원고를 쓴지 20년이 넘었다.


처음 부탁을 받았을 때만 해도 이렇게 오래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저 신앙과 세상 사이에 다리 하나를 놓는 마음으로 시작을 했고 이어온 일이었다. 23년이라는 말을 듣고는 어머니는 푸우, 한숨부터 내쉬신다. 그리고는 한 마디를 보태신다.


“글 쓰는 게 골 빠지는 일인데...”


아흔이 넘은 어머니에게는 자식들이 하는 모든 일이 다 안쓰러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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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복된 약함이여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여러분과 같이 되었으니, 여러분도 나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내게 해를 입힌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으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은, 내 육체가 병든 것이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해 주었습니다.(갈라디아서 4:12-14)

 

바울 사도가 처음 갈라디아 지방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첫 번째 선교 여행길에 올랐던 그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섬 구브로(키프로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소아시아 지방 즉 지금의 터키 지역으로 향했다. 바울 일행은 해안을 이용하지 않고 케스트루스 강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지역의 번화한 도시인 버가에 상륙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다. 조력자로 따라 나섰던 요한이라고 불리우는 마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던 것이다. 풍토병인 말라리아에 걸렸던 것 같다. 바울은 이 일로 상심했다. 그도 또한 건강이 여의치 못했다. 그는 버가 선교를 포기하고 곧장 소아시아의 내륙 지역인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향했다. 해안 풍토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텐데, 그곳은 버가에서 약 16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몸이 성치 못한 이들이 걷기에는 험난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갈라디아 지방의 수도라 할 수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도착한 바울은 안팎의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낯선 곳이 주는 심리적 중압감과 더불어 건강도 매우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지역민들은 바울 일행을 따뜻한 사랑으로 맞아주었다. 바울은 “내 몸에는 여러분에게 시험이 될 만한 것이 있는데도, 여러분은 나를 멸시하지도 않고, 외면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회고한다.

 

복음 전도자인 바울이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하는 이 역설적인 상황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바울의 약함은 오히려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선의 본능을 깨웠던 것이다. 사람은 강자나 빈틈없고 똑똑한 사람에게는 저항감을 느끼지만 약자를 볼 때는 동정과 연민에 사로잡힌다. 

 

사람은 누구나 강하고 똑똑해서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런 충동과 경계심 때문에 세상은 경쟁의 마당이 되어 버렸다. 경쟁의 논리는 ‘너 죽고 나 살자’이다. 물론 모든 경쟁이 나쁜 것은 아니다. 경쟁의식이 사람들 속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한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경쟁은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다.

 

경쟁의 창날이 부딪치는 곳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성은 가뭇없이 사라진다. 거칠고 냉소적인 사람들은 강한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이 많은 사람들이다. 물론 연약한 사람이라고 해서 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화도 잘 내고, 욕심 사납고, 때로는 폭력적인 이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람됨은 연약한 사람들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의 연약함은 갈라디아 사람들과 복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되었다. 돌봄을 받은 자가 돌보아 준 이들에게 복음이라는 선물을 내놓았다. 연약함을 돌보는 일을 통해 부드러워진 사람들의 마음은 옥토가 되어 복음을 받아들였다. 바울의 증언을 들은 이들은 기뻐하며 주님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사도들을 통해 놀라운 기적과 표징이 나타났다.

 

*기도*

 

하나님,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우리의 약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무시당하거나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따뜻한 말 한 마디 듣고 싶어서 상처를 드러냈다가 그 상처가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냉혹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연약한 이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의 설 땅이 되어주라 이르십니다. 그런 이들의 벗이 되려고 마음을 낮출 때 주님의 은총이 우리 속에 유입됨을 잊지 않게 해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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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161)

 

 더는 못 볼지도 몰라

 

심방을 하며 교우들의 삶의 자리를 찾아간다. 어찌 삶이 평온하기만 할까, 고되고 험한 삶도 적지가 않다. 높은 곳에 위치해 달이 잘 보인다는 뜻에서 붙여졌다는, 달동네라는 말은 낭만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실상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 사전에서는 달동네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무허가 주택과 노후 불량 주택이 밀집된 도시 저소득층 밀집 지역을 말하며, 산동네라고도 한다. 6 · 25 전쟁에 따른 이재민들에게 무허가 건축 지대의 지정을 시작으로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이농으로 생긴 도시 저소득층을 도시 외곽의 구릉 지대에 집단으로 이주시킴으로써 만들어졌다.’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 있는 언덕 위 긴 골목 끝에 있는 권사님 집도 그랬다. 세상 한쪽 구석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작은 방에 둘러앉아 예배를 드렸다. 연로하신 권사님은 눈과 귀가 어두운데, 그나마 한쪽 눈에 안대를 댔다. 그럴수록 필요한 것은 하늘의 위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은 간절해진다.

예배 후 권사님이 준비한 음료를 마시는데, 바라보니 벽에 웬 글씨가 붙어 있다. 읽어보니 찬송가 가사였다. 달력 뒷장에 권사님이 써서 붙여놓은 것이었다.


“찬송가를 적으셨네요?”


권사님께 여쭸을 때 권사님이 대답했다.


“눈이 점점 나빠져서 더는 못 보겠다 싶기에 그래도 눈이 보일 때 적었어요.”  

 

눈이 흐려져 더는 못 볼지도 모르는 시간을 앞두고 적은 찬송가 가사는 “험한 산길 헤맷때 주의 손 굿끼잡고 찬송하며 가리”였다. 주님은 바로 읽으시리라, 바로 들으시리라, 그리고 권사님 손 굳게 잡아 주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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