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신비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3. 8. 06:53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창세기 8:22).

 

한 번도 뵌 적 없는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사실 사별의 아픔을 겪은 이들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칫하면 아물어 가고 있던 상처를 후벼파거나, 슬픔의 기억을 소환하는 일일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편지를 올리는 것은 뭔가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슬픔에 공감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삶은 다양한 만남의 점철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태도와 지향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관계라는 단어는 빗장이라는 뜻의 잇다라는 뜻의 가 결합된 것입니다. 누군가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의 빗장을 열어 그와 연결됨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일 겁니다. 관계 맺음은 그런 의미에서 결단입니다.

 

살아가면서 수없이 많은 타자들과 만나지만 우리 인생에 소중한 타자로 받아들이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삶이 그런대로 괜찮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때일 겁니다. 소속과 연결이야말로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기본 바람일 겁니다. 하지만 그 연결이 지나치게 많거나, 그 연결이 오히려 우리 삶을 옥죄는 사슬이 될 때 우리는 고독에의 열망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연결을 원하는 동시에 그 연결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모순된 소망을 품고 우리는 시간 속을 바장입니다.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섬세하게 키워가다가 마침내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파트너의 이름을 호명함으로 부부가 된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입니다. 삶의 조건이 어떻게 변하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과 평생 함께 걷겠다는 결혼 서약은 그 신비 속으로 성큼 들어서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인간의 선택이지만 결혼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약은 그렇기에 엄중한 것입니다.

 

결혼을 유지하는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겠지만 더 근본적 외연은 서약에 대한 충실함입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내다보면 사랑의 감정이 식을 때도 있고, 권태감이 찾아들 때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관계의 위기가 찾아와 결국 헤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부부간에 벌어지는 갈등은 어느 누구도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할 수 없습니다. 만나고 헤어지기도 하는 게 인생이라지만, 그 만남의 기억은 쉽게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낼 수 없습니다. 그 기억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영혼에 흔적을 남겨놓게 마련입니다. 중도에 사별의 아픔을 겪은 이들이야 새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것이 부모 자식간의 관계이든, 부부간의 관계이든, 가장 가까운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 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어버리면 세상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낯선 곳으로 변해버린다는 말입니다. 나가사키의 바닷가에는 소설 침묵을 썼던 엔도 슈사쿠의 비문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설명하지 않더라도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일 겁니다.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는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나 아는 뻔한 이야기 같지만, 그 말은 그의 철학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유한성을 알 뿐 아니라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죽음을 의식하지만 죽음은 우리 경험 속에 없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것이 진짜 죽음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죽음의 경험은 사실은 가장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우리 속에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상실감 그리고 쓸쓸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생각할 때 이런 전제를 한다고 합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아니다라는 생각은 우리 삶에 안정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행한 사건과 사고에서 나만은 예외가 되어야 한다는 덧없는 생각의 반향일 뿐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상황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죽음, 죄책, 질병, 우연 등은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고, 우리 생의 유한함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한계 상황은 우리를 몹시 힘들게 만들지만 본래적 삶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예기치 않는 시간에 닥쳐온 아픔과 슬픔을 경험한 분들입니다. 사고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분도 계시고, 질병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분들도 계십니다.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혹은 파트너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삶의 토대가 흔들렸다는 고백은 참 적실합니다. 든든한 줄 알았던 터전이 흔들릴 때 우리는 멀미를 느낍니다. 돌연 익숙하던 세계가 낯선 곳으로 변하고, 세상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이 찾아들 때 어떻게들 견디셨습니까? 앞서 잠시 언급했던 엔도 슈사쿠의 침묵을 처음 읽었을 때 어떤 문장에 이르러 멍해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의 기독교 박해사를 다룬 이 소설은 참으로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견지하려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을 끝내 지켜주고 싶었던 신부가 바라보는 가운데 한 사나이가 처형을 당했습니다. 후미에라고 하는 성화상에 발을 올려놓기를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부는 텅 빈 안마당에 하얀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광경을 지켜보며 삶의 부조리함에 몸서리칩니다.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매미가 계속 울고 있다. 바람은 없다. 파리 한 마리도 여전히 그의 주위를 윙윙거리며 날고 있다. 외계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 사람의 인간이 죽었다고 하는데도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런 일이, 이럴 수가.’ 신부는 창살을 꼭 잡은 채 현기증을 일으켰다”(엔도 슈사쿠, 침묵, 김윤성 옮김, 바오로딸, 209).

 

그에게 현기증을 일으킨 것은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한 인간이 죽었는데 외계는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무심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안마당의 고요함과 매미소리, 그리고 윙윙거리는 파리소리가 그렇게 부조리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별자들이 겪는 일도 마찬가지라지요? 나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슬픔을 겪고 있는데 세상은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지속되는 현실에 분노할 수도 있겠습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상실감이 일으키는 우울증에 대한 반응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하나는 멜랑콜리입니다. 성찰적 거리를 두고 자기가 겪은 일을 돌아보기보다는 우울 속으로 더 깊이 침강하는 심리적 태도가 그것입니다. 멜랑콜리에 사로잡히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곤 합니다. 원망, 히스테리, 자학 등을 낳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다른 하나의 반응은 애도입니다. 자기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서, 상실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진정한 애도는 삶의 에너지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기 위한 노력을 포함합니다. 애도자는 상실한 사랑의 대상을 지속적으로 기억함으로 자기 삶의 일부가 되게 합니다. 기질이나 삶의 여건에 따라 이런 반응으로 갈리는 것 같습니다. 삶의 가장자리로 떠밀렸는데 중심에 이르는 길을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길을 찾을 의욕도 없고, 기다림조차 부질없어 보일 때, 희망의 불빛은 가물거리게 마련입니다.

 

살다보면 우리는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현실에 직면하곤 합니다. 합리적이고 질서정연한 줄 알았던 세상이 사실은 혼돈 그 자체이고, 누군가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놀라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다른 이들에게 드러나지 않는 슬픔의 지층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생의 이면입니다. 소설가 이승우는 마음의 부력이라는 소설에서 요양원에 계신 어머니가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큰 아들에 대한 미안함을 평생 간직하고 사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는 이렇게 자책합니다.

 

상실감과 슬픔은 시간과 함께 묽어지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시간과 함께 더 진해진다는 사실을, 상실감과 슬픔은 특정 사건에 대한 자각적 반응이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자신의 감정에 대한 무자각적 반응이어서 통제하기가 훨씬 까다롭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상실감과 슬픔은 회한과 죄책감에 의해 사라질 수도 있지만, 회한과 죄책감은 상실감과 슬픔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히려 그것들에 의해 더 또렷해진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44이상문학상 작품집, 이승우, 마음의 부력, 문학사상, 47).

 

아마 여러분의 마음도 이럴 거라고 짐작합니다. 사별의 고통을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사랑하는 이의 부재가 아니라, ‘나 때문에혹은 더 잘해 줄 걸이라는 자책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지금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렇듯 당연히 여기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때로는 다정하게 지내지만, 때로는 성을 내기도 하고, 등을 돌리기도 합니다. 당연하게 생각한 그의 존재가 비존재로 바뀔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시인 김승희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2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아침에 눈뜨면 세계가 있다

아침에 눈뜨면 당연의 세계가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있다

당연의 세계는 당연히 거기에 있다

 

너무 뻔한가요? 그런데 시인은 당연의 세계에서 나는 당연하지 못하여/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선 나라고 노래합니다. 당연의 세계가 항상 낯설기만 하다는 것처럼 아뜩한 노릇이 또 있을까요? 삶은 이렇게 처연한 것이지만 그런데도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숙명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더 이상 볼 수 없는 데도, 때가 되면 배가 고프고, 공과금 내야 하는 시간은 꼬박꼬박 돌아오고, 돌보아 주어야 할 이들이 눈에 밟히고, 먹고 살기 위해 일을 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런 일상이 우리의 삶을 존속 가능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성경구절은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시간은 지속될 것이고, 계절의 변화 또한 지속됩니다. 바로 그것이 은총의 징표라는 것입니다. 납득하기 어렵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거기에 삶의 길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보다 그렇지 못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물론 쓰나미처럼 몰려와 우리 삶을 뒤흔드는 자연재해도 그렇지만 선한 이들에게 닥치는 불행도 많습니다. 우리 사회 시스템 속에 내재된 불의에서 비롯되는 악도 많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 마음에 익혀온 권선징악의 윤리가 작동되지 않는 현실을 목도한다는 것은 참 쓸쓸한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시편의 시인들도 이런 현실 앞에서 탄식하곤 했습니다. ‘어찌하여’, ‘언제까지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조리한 현실에 당혹감을 느낍니다. 그 당혹감을 안고 사는 것이 인생인가요?

 

마치 삶에 정답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대개 삶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다른 이들을 오도함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삶이란 어쩌면 답이 없는 삶을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욥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급전직하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며칠 사이에 재산을 다 잃고, 자식도 다 죽고, 아내에게 버림받았고, 몸에는 사람들이 혐오할 만한 질병이 나타났습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칠일 낮과 밤을 친구 곁에 머물렀습니다.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만한 우정이 또 있을까요? 그런데 욥이 자기 처지를 한탄하며 태어난 날을 저주하자 친구들은 깊은 침묵을 깨고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욥이 그런 처지에 떨어진 것은 숨겨진 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번에 걸쳐 논쟁이 계속되지만 기본 전제는 욥의 죄가 그런 현실을 잉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창조하고 섭리하시는 세상의 질서정연함을 확신합니다.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은 틀렸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오만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피조물인 우리는 다만 그 현실을 겪어낼 뿐입니다. 비극적이지만 그건 어김없는 삶의 실상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알 수 없는 일을 아는 것처럼 말했다고 하여 꾸중을 듣습니다. 모름을 받아들이는 것이 지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그 불행의 와중에 사람들이 들려주는 섣부른 위로의 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하시더군요. 좋은 의도로 하는 바른 말이 때로는 더 큰 상처가 될 수도 있습니다. 애도의 시간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어진 사건을 제멋대로 해석하려는 이들을 보면 분노의 감정이 일기도 합니다. 말이 오히려 소통의 장애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가장 큰 슬픔의 시간에 제일 고마운 사람은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이 아니던가요? 물론 홀로 있고 싶은 시간도 있겠습니다만.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은 우리가 삶의 세계로 복귀하려 할 때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핍에 집중되어 있는 우리 시선을 있는 것에 돌리도록 해주기도 합니다. 숙명의 잡아당기는 힘에 저항할 힘을 우리 속에 채워주기도 합니다.

 

사별자들의 모임은 어쩌면 슬픔의 강에 놓인 징검다리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 다 아픔과 상실감을 겪은 이들이기에 서로의 감정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고, 격려하고 보듬고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모임이었으니 말입니다. 그곳은 장벽이 무너진 세계라지요? 차마 다른 이들에게는 할 수 없는 내밀한 이야기도 털어놓을 수 있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용기도 북돋워주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요.

 

그곳에서 함께 글로 공유했던 이야기들은 사별자들이 슬픔의 미궁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준 아리아드네의 실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를 객관화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론 글은 쓰는 이의 주관이 들어가지만 그의 경험을 언어라는 도구를 통해 전하기 위해서는 객관화 작업이 필수입니다. 가장 깊은 내면의 고백이라 해도 거리두기는 필수입니다. 글의 내용을 살아냈던 나와 글을 쓰는 나는 같은 나이면서도 다릅니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자기를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쓰기 전까지는 내 생각과 감정의 빛깔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입니다. 씀을 통해 우리는 가장 내밀한 자신과 만납니다. 과거의 나와도 만나지만 미래의 나와도 만납니다. 그래서 글쓰기는 새로운 삶을 향한 발돋움입니다.

 

길고 지루한 이야기를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저는 생텍쥐페리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참 좋아합니다. 그는 1935년에 파리와 사이공 사이의 장거리 항로 개척 비행 중에 북아프리카의 리비아 사막 한복판에 추락했던 적이 있습니다. 산채로 모래바다 위에 내던져진 것만도 기적이었습니다. 침착한 그는 치밀한 과학자의 계산으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모색하여 인간의 세계로 되돌아갈 길을 찾아 헤맸습니다.

 

습도가 낮은 이곳에서 이대로 가면 24시간이 지나면 목숨이 가랑잎처럼 말라버릴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동북풍이 바다 쪽에서 불어오니 습도는 약간 높아질 것이다. 그래, 동북쪽으로 가자.”

 

그는 밤에는 낙하산 천을 찢어 모래 위에 깔아놓았다가 새벽에 이슬을 짜서 목을 축였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구원의 여망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냉철한 그는 마지막 방법을 쓰기로 합니다. 비행기의 잔재를 태우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불을 다룰 수 있는 동물은 오직 인간뿐이니, 누군가가 사막에서 일어나는 불꽃을 본다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누군가가 찾아와 주기를 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그는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대로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문득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라디오 앞에 앉아 이지러진 얼굴로 절망에 잠겨 기다릴 아내의 얼굴과 불안과 초조에 사로잡힌 친구들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때 섬광처럼 조난자들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들이다. 내가 그들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인식의 전환이 일어난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이긴 합니다만 생텍쥐페리는 다른 소설에서도 안데스에서 조난당했다가 귀환한 기요메라는 비행사의 말을 들려줍니다.

 

내가 한 일은 결단코 어떤 짐승도 일찍이 한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하네”(인간의 대지/야간비행/어린왕자/남방우편기, 안응렬 옮김, 동서문화사, 41).

 

그가 한 일은 절망을 딛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딘 것입니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긴 합니다만 조난자는 내가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이들인지도 모른다는 인식의 전환, 그리고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한 걸음씩 희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겠다는 결의야말로 우리 앞을 비춰주는 등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 세상을 떠나신 분들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이신 분의 자비에 맡기십시오. 그리고 용감하게, 씩씩하게 주어진 길을 걸으십시오. 주님의 은총이 사별의 고통을 경험한 모든 이들을 감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posted by

호박꽃



호박꽃이 불평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거름더미 담벼락 논둑 빈터 어디다 심어도 여기가 내 땅 뿌리를 내리고 쑥쑥 순을 뻗어 꽃을 피울 뿐이다. 

 


조심스러울 것도 없는 꽃을 피워 벌과 나비를 부르고, 누가 어떻게 먹어도 탈이 없을 미끈한 호박을 맺을 뿐, 왜 내가 여기 있냐고, 하필 이름이 호박꽃이 뭐냐고, 호박은 자기를 불평하는 법이 없다. 
호박꽃!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박꽃  (0) 06:20:31
할아버지의 아침  (0) 2021.03.07
싱그러움  (0) 2021.03.06
어느 날의 기도  (0) 2021.03.05
새벽 강  (0) 2021.03.04
봄 들판  (0) 2021.03.03
posted by

할아버지의 아침


이른 아침, 변관수 할아버지가 당신의 논둑길을 걸어갑니다. 
꼬부랑 할아버지가 꼬부랑 논둑길을 꼬꾸라질 듯 걸어갑니다. 
뒷짐 지고 걸어가며 벼들을 살핍니다.

간밤에 잘 잤는지. 밤새 얼마나 컸는지, 물이 마르지 않았는지, 피가 솟아나진 않았는지 이른 아침 길을 나서 한 바퀴 논을 돕니다. 


그게 할아버지의 하루 시작입니다. 
할아버지는 논을 순례하듯 하루를 시작합니다.   
곡식이 주인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는 말은 참말입니다.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박꽃  (0) 06:20:31
할아버지의 아침  (0) 2021.03.07
싱그러움  (0) 2021.03.06
어느 날의 기도  (0) 2021.03.05
새벽 강  (0) 2021.03.04
봄 들판  (0) 2021.03.03
posted by

싱그러움



오랜만에 비가 내린다. 목말랐던 땅이, 나무와 풀이 마음껏 비를 맞는다. 온 몸을 다 적시는 들판 모습이 아름답다. 


석 달 가뭄 끝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이 흙먼지 적실 때, 그때 나는 냄새처럼 더 좋은 냄새가 어디 있겠냐 했던 옛말을 실감한다. 

 


"타-닥. 타-닥. 타다닥" 


잎담배 모 덮은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더없이 시원하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뿌리에 닿을 비, 
문득 마음 밑바닥이 물기로 젖어드는 싱그러움.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박꽃  (0) 06:20:31
할아버지의 아침  (0) 2021.03.07
싱그러움  (0) 2021.03.06
어느 날의 기도  (0) 2021.03.05
새벽 강  (0) 2021.03.04
봄 들판  (0) 2021.03.03
posted by

어느 날의 기도


받으라고
받을 수 있다고
때때로 당신
뜻 모를 고통과 아픔 주지만

받을 수 있다고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지만

그러나 주님
저만치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툭 길 끊기고
천 길 벼랑일 때가 있습니다.

받으라 하시고
받아야 한다고
인정하지만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할아버지의 아침  (0) 2021.03.07
싱그러움  (0) 2021.03.06
어느 날의 기도  (0) 2021.03.05
새벽 강  (0) 2021.03.04
봄 들판  (0) 2021.03.03
단강의 아침  (0) 2021.03.02
posted by

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다

“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창 18:19)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길 빕니다.

큰비가 내리더니 대기가 며칠 청명합니다. 영동 지역에는 폭설이 내려 사람들의 발이 묶였더군요. 피해는 없으셨는지요? 폭설로 불편을 겪은 분들에게는 죄송한 말이지만 눈 덮인 산과 들, 그리고 마을은 왠지 포근한 느낌이 듭니다. 마치 동화 속의 나라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16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테르 브뤼헬(1525-1569)의 ‘눈 속의 사냥꾼’이라는 그림이 떠오릅니다. 화가는 사냥꾼들이 사냥개들과 함께 마을로 돌아오는 풍경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사냥의 수확물이라고는 여우 한 마리뿐입니다. 지쳤는지 그들의 허리는 구부정합니다. 개들도 지쳐 보입니다. 눈을 핥아먹는 녀석도 있습니다. 곧게 솟은 나무 위에 까마귀가 앉아 있습니다. 사냥꾼들 옆에 있는 선술집에서는 사람들이 짚불을 피우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따뜻하게 보이는 광경입니다. 저 멀리 깎아지른 듯한 봉우리가 인상적인 높은 산이 보입니다. 하지만 사냥꾼들이 가고 있는 곳은 가족들과 따끈한 차가 기다리는 각자의 집일 것입니다. 마을 앞에 형성된 얼음판 위에서 사람들이 신나게 놀고 있습니다. 팽이를 치는 아이도 있고, 썰매를 타는 이들도 보입니다. 기차놀이 하듯 열을 지어 미끄럼을 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키 채 비슷한 것도 보입니다. 놀이는 현실의 곤고함을 잊게 만듭니다. 놀이는 지나치게 경직되기 쉬운 우리 정신을 환기시키는 창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눈을 보러 나갈 짬을 내지 못하니 이런 식으로라도 겨울 풍경을 즐기는 것입니다.

 


학생이 아니라 해도 각급 학교가 새로운 학년을 시작하는 3월 2일은 왠지 모를 설렘을 안겨줍니다. 보호자의 손을 잡고 학교로 향하는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도 그렇고, 처음 입는 교복이 어색한지 조금은 자기 모습을 의식하는 것처럼 보이는 중학교 입학생, 의젓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만 누가 봐도 신입생인 대학생들의 모습까지, 그 풋풋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 낯선 이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교회학교를 담당하는 선생님들과 줌 미팅을 했습니다. 교육의 근본 목표는 ‘유능한 인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줄 아는 사람이 되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존재의 신비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야 하고, 자기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자각하도록 해야 합니다. 어린 학생들에게 죄의식을 주입하거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면서 상과 벌을 내리시는 하나님 이미지를 심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섣부른 죄의식은 우리에게서 경탄의 능력을 앗아갈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이들 속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인간의 죄성과 참상에 대한 이야기는 미리 하지 않더라도 삶의 과정을 통해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 6:34)

그날 시간이 없어서 미처 하지 못했던 말들이 있습니다. 교사들이 일상 속에서 꼭 명심해야 할 내용입니다. 저는 그것을 아동과 청소년 교육 전문가인 얀-우베 로게(Jan-Uwe Rogge)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는 그것을 네 가지로 요약하여 들려줍니다(안젤름 그륀/얀-우베 로게, <아이들이 신에 대해 묻다>, p. 9-11 참조).

첫째, 교육에 관여하는 이들은 아이들이 자기감정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아무리 어려도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행복과 기쁨, 슬픔과 분노의 감정을 느낍니다. ‘어린 게 뭘 안다고…’라며 윽박지르거나, 그 감정을 하찮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감정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아이들은 다른 이들을 신뢰하게 됩니다.

둘째, 아이들이 성장하는 속도를 참을성 있게 지켜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을 몰아대지 말고 천천히 그와 동행해야 합니다. 야곱 이야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20년 만에 귀향한 야곱은 형 에서와 화해했습니다. 두 형제가 부둥켜안고 우는 모습은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한감정이 풀어진 에서가 ‘갈 길을 서두르자’고 말하자 야곱은 아이들이 아직 어리고, 돌보아야 할 양 떼와 소 떼가 많다며, 하루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창33:13). 사람마다 속도가 다 다릅니다. 사랑은 그 속도를 알아차리고 거기에 발을 맞추는 것이 아닐까요?

셋째, 아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불완전해질 수 있는 용기를 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아이에게 답을 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배워야 합니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이들과 지내다 보면,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하는 무능력자가 됩니다. 실패를 해도 자신이 받아들여진다는 사실을 알 때 아이들은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공보다 실패가 우리를 더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넷째, 경계를 정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만사가 자신의 의도나 계획 혹은 바람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욕망의 성취가 지체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욕망이 발생하는 순간 즉각 해소되지 않으면 불행하다고 느끼거나, 부모나 어른들의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제게도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손녀가 둘 있습니다. ‘잘 적응하겠지’ 하고 생각하다가도, 그 여린 감정을 다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닙니다. 소극적이어서 자기감정이나 생각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아이의 경우가 더 그렇습니다. ‘손녀 바보’ 소리 들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냥 있는 것만으로도 어른들의 마음을 정화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리 아이가 더 크지 않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기도 하더군요. 나중에 교회학교 어린이들이 교회에 올 수 있게 되면 어느 교우가 제게 보내준 그림 동화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를 읽어주고 싶습니다. 조금 느리고 빠를 수는 있지만, 모든 삶은 저마다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을 더듬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은 매일 아침 낱말들의 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지만 그 소리를 발음하는 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학교에 가서도 맨 뒤에 앉았습니다. 온종일 말을 할 일이 없기만 바랐습니다. 어쩌다 선생님의 지목을 받아 이야기를 하려면 입술이 뒤틀리고 일그러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친구들은 키득거리며 웃었습니다. 아이의 마음에 그늘이 드리웠겠지요? 어느 날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온 아빠가 소년을 강으로 데려갔습니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알록달록한 바위와 물벌레를 살펴보면서 강을 따라 걷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습니다. 편안했습니다. 그때 아빠가 말했습니다. “강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이지? 너도 저 강물처럼 말한단다.” 아이는 물끄러미 강을 바라보았습니다. 물거품이 일고, 소용돌이치고, 굽이치다가, 부딪치는 강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강은 지체할 때도 있지만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강물처럼 말해.’ 소년은 나중에 울고 싶을 때마다 아빠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면 울음도 삼킬 수 있고 말할 수도 있었습니다. 강물도 더듬거릴 때가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던지요. 나중에 소년은 친구들 앞에 서서 강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조던 스콧 글, 시드니 스미스 그림,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 김지은 옮김, 책읽는 곰).

우리는 어쩌면 너 나 할 것 없이 ‘강물처럼 말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영원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면 그뿐입니다. 앞섰다고 우쭐거릴 것도 없고, 뒤쳐졌다고 주눅들 것도 없습니다. 지향이 바르면 언젠가 우리는 그 바다에 당도하게 될 것입니다. 가끔 그 물살 위에 몸을 맡긴 채 둥둥 떠내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 않나요? 뭔가를 붙잡으려던 마음도 내려놓고, 다른 이들과 차이를 만들려는 조바심도 내려놓고, 우리가 전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일 때 편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난 주일(28일) 미얀마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대에게 군대와 경찰이 발포를 해서 많은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우리 또한 역사의 격동기를 거쳐왔기에 미얀마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차마 외면할 수 없습니다. 미얀마에서 더 이상 폭력사태가 벌어지지 않도록, 평화롭게 살고 싶은 대중들의 소박한 꿈이 짓밟히지 않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십시오.

벌써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조금은 의식적으로 사순절기에 맞갖은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순절 달력에 제시된 실천 사항들을 잘 지켜보십시오. 잘 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깨어 있음입니다. 성공담이든 실패담이든 우리 영혼을 밝히는 좋은 재료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길든 짧든 그런 경험을 나눠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삶이 더 따뜻하고 밝고 견실해지기를 빕니다. 모든 이에게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넘치기를 빕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1년 3월 4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posted by

새벽 강



새벽 강가에 물안개가 뽀얗게 피어올랐습니다.
어둠 속을 밤새 흐른 강물이 몸이 더운지 허연 김으로 솟아오릅니다. 

 


우윳빛 물안개가 또 하나의 강이 되어 강물 따라 흐를 때, 
또 하나의 흘러가는 것, 물새 가족입니다. 

때를 예감한 새들이 나란히 줄을 맞춰 날아갑니다. 


이내 물안개 속에 파묻혀 더는 보이지 않는 새들, 
물안개 피어나는 새벽 강에선 새들도 강물처럼 흘러갑니다.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싱그러움  (0) 2021.03.06
어느 날의 기도  (0) 2021.03.05
새벽 강  (0) 2021.03.04
봄 들판  (0) 2021.03.03
단강의 아침  (0) 2021.03.02
멀리서 온 소포  (0) 2021.03.01
posted by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1. 3. 3. 19:06

 

 

스물세 번째의 시도, 그렇게 해서 이 원고는 책으로 세상과 만났습니다. 사별, 그러니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떠난 이들의 슬픔을 듣는 일은 괴롭습니다. 그러니 이 이야기를 담은 원고를 들고 여기 저기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반기는 이가 별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출판사 문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스물두 번의 시도는 사별의 아픔에 더하여 좌절의 고통을 주었을 것입니다. <꽃자리>는 이 원고들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빨려들 듯이 읽었습니다. 전문적으로 글을 써온 이들도 아닌데 이들이 토로하는 고통과 그 고통을 치유하고 일어나는 과정은 어느 글장이보다 더 깊게 가슴에 파고 들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상실과 충격, 혼자 남겨진 외로움과 감당해야 하는 현실의 삶. 방황할 수밖에 없고 비탄의 시간이 쉽게 멈추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코로나로 모두가 우울하게 지나는 세월에 이런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는 것 자체도 힘겨움을 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들 멈칫했을 것입니다. 그런 판단과 결정이 충분히 이해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절실했습니다. 초연결의 시대에 그 연결이 끊어지고 고립되고 만남 자체가 불안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사별은 그런 고립감의 극단에 있는 경험이 됩니다. 그 지점에서 다시 사람들과 이어지고 위로하고 서로 격려하며 일으키는 마음이 만나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이들 사별자의 경험과 지혜는 우리 시대 모두에게 일깨우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잃어버리고 이어지지 못하는 삶을 어떻게 이겨내면서 다시 연결되는 우리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이 여기에 녹아 있습니다. 당연히 배우자의 사별은 시간과 순서만 다를 뿐이지 우리 모두가 겪었거나 겪게 될 일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인생사의 사건입니다. 노년의 죽음이 당연한 듯하지만 그 역시도 충격이며 어쩌면 더 큰 상실감으로 남은 이는 예정보다 더 빨리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별자들의 고통이 남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자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건 경우와 상황만 다를 뿐이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 순서대로 실린 글의 주인공 이정숙, 권오균, 임규홍, 김민경의 사연은 각기 다릅니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사별 이후의 삶에서 넘어지지 않고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내디디고 있습니다. 자기들만이 아니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 다른 이들을 위로하고 방황하지 않도록 안내자 역할을 하려는 것입니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이정숙 님은 사별 3년 차로 10살에 아버지를, 20살에는 어머니와 할머니를 한날에 잃었습니다. 그리고 47살에 남편과 사별하였습니다. 그녀는 47살에 또다시 찾아온 사별로 인한 슬픔과 고통, 좌절과 희망이 담긴 글을 써서 사별 카페에 공유했고, 그녀의 솔직한 고백과 희망이 담긴 글은 사별 카페의 많은 사별자들에게 공감의 위로와 더불어 희망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이제는 사별의 아픔을 딛고, 사는 날 동안 봄바람의 꽃잎처럼 삶의 풍경 안으로 들어오는 아름다운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권오균 님은 사별 3년 차로 슬픔에 빠져있기 보다는 나는 지구라는 별을 방문한 여행자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이 세상을 더 많이 경험하고 배우고 느끼며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인간에게 죽음은 끝이나 소멸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라고 믿고 있으며 이 여행이 끝나면 다시 아내와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책을 쓰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지만 아내가 원하는 일일 것이라 생각해서 이 책의 총괄책임자로 활동했습니다. 이 책뿐만 아니라 사별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홈페이지 제작/운영을 꿈꾸고 있는 분입니다.

 

임규홍 님은 사별 5년 차인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행복한 삶을 위한 대화외에 국어 교육과 우리말에 관한 다수의 저서가 있는 분입니다. 사별 초기 그가 쓴 사별 카페의 글은 국어학자의 지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아내를 잃은 고통으로 횡설수설하는 원초적 슬픔의 글이었습니다. 누구보다 힘든 시간을 보낸 후, 그는 자신과 같이 슬픔으로 절망하는 사별자들을 돕고 싶어 했습니다. 사별자에게 보편적이고 실제적으로 가장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책이라고 생각하여, 이 책을 쓰자고 최초로 제안했습니다.

 

김민경 님은 사별 8년 차로, 사별 후 친정에 갔을 때, 시뻘건 눈에 눈물을 가득 담고 자신을 마중하던 아버지를 보며 자신은 부모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은 죄인이 되었다라고 당시를 회상합니다. 그 죄짐을 벗는 것은 자신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지난 8년간 그녀는 누구보다 열심히 어린 두 자녀를 키우고 자신의 삶을 잘 살아냈습니다. 그녀는 별이 된 그대라는 온라인 사별 카페를 운영하고 있으며 여러 가지 이벤트를 통해 사별자들에게 다양한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 그녀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지만, 추후 사별심리학을 공부하여 사별자를 위로하는 일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의 형편과 상황이 다른 이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묶인 것은 참으로 소중합니다. 홀로 남겨져 이기기 어려운 고독과 싸우고 삶 자체의 무게로 무너지지 않고 함께할 수 있는 일을 결국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물두 번의 좌절을 겪고야 비로소 책을 낼 수 있게 되긴 했으나 그 과정이 또한 이분들에게 사별자와 세상이 서로 대화하는 방식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사별자들이 최초로 겪는 일은 바로 이 세상과의 대화가 단절되는 경험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의 고통을 남들이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세상이 자신을 위로해줄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자신의 처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그대로 내보일 수 있는가?” 이 모두가 다 고난도의 과제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 내보이는 용기를 키워왔습니다. 그리고 이 용기가 다른 이들의 안내판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 또는 문화에서 죽음을 일상의 화제로 떠올리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그것은 두렵거나 불쾌해지거나 불편하던가 아니면 자신과는 관련이 없는 주제라고 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요? 지금 누리고 있는 생명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사별자들은 사별이 자신에게 어느날 갑자기 닥칠 일이라고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았을까요?

 

그런 까닭에 이들의 증언과 고백 그리고 경험과 나름의 조언은 누구에게나 귀중하다 할 것입니다. 비극적인 일은 막상 겪으면 정신이 없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마음에 여러 상념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누구에게나 권하게 되는 책이라고 믿습니다.

 

서양의 경우, 사별자가 쓰거나 사별자를 위로하는 책들이 드물지 않습니다. 죽음과 관련된 문화적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례식의 풍속이 다른 까닭도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도 요즈음은 서양식 장례 분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대성통곡을 하지 않습니다. 슬픔을 조용히 안으로 삭이는 분위기입니다. 그건 예전 같으면 장례 예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슬픔은 밖으로 드러나 해소되지 못한 채 내면화되고 응어리지기도 합니다. 그건 충격 이후의 우울과 불안의 증세를 더 가중시킬 수 있습니다. 슬픔과 비탄을 내놓고 표현하지 못하니 속은 더욱 아프고 쓰리며 외로워집니다. 내색하지 않는 슬픔이란 언제나 비탄의 극단에 갈 준비를 하기 마련입니다. 장례가 끝나고 모두가 다 떠난 자리에서 사별자는 혼자 덩그렇게 남게 됩니다.

 

그리고 진짜 이야기는 이때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풀어놓게 되는 속사정을 들려줍니다. 그리고 그걸 듣는 우리 자신이 이걸 말하는 이의 삶 속에 들어가 함께 아파하고 함께 슬퍼하며 함께 위로하고 함께 길을 찾아나서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시간에서 죽음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이미 예정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와의 별리(別離)가 가져올 아픔은 상상하고 싶지 않으나 언젠가 닥칠 사건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고맙습니다.

 

이미 겪은 이의 고통에서 위로의 길을 미리 발견한다는 것은 어쩌면 미안한 일이지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별자들은 그 발견이 곧 자신에게도 위로가 된다고 믿을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이어져서 서로 다독거리며 죽음의 강이 갈라놓은 인연의 무게를 새롭게 정리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스물세 번째의 시도는, 편집자로서는 감사이며 축복입니다. 낙담하고 좌절했다면 오지 않았을 기회였습니다. 그 기회를 열어준 저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읽혀 우리 사회를 보다 건강하고 힘차게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별은 사랑의 종식이 아니라 확인이며 그 사랑으로 다시 살아갈 길을 찾는 용기 있는 여정의 출발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posted by

봄 들판

들판에 가 보았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이들은 들판을 가로 질러 
아지랑이처럼 달렸네 

들판에 가 보았네 
조용한 푸름
번지고 있었네 
하늘이 땅에 무릎 꿇어  
입 맞추고 있었네 

들판에 가 보았네 
언덕 위 
한 그루 나무처럼 섰을 때 
불어가는 바람 
바람 혹은 나무 
어느 샌지 나는 
아무 것이어도 좋았네.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의 기도  (0) 2021.03.05
새벽 강  (0) 2021.03.04
봄 들판  (0) 2021.03.03
단강의 아침  (0) 2021.03.02
멀리서 온 소포  (0) 2021.03.01
봄 들판  (0) 2021.02.26
posted by

단강의 아침



단강의 첫 아침을 여는 것은 새들이다. 아직 어둠에 빛이 스미지 않은 새벽,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삐죽한 소리가 있다. 가늘고 길게 이어지다 그 끝이 어둠속에 묻히는 애절한 휘파람 소리, 듣는 이의 마음까지를 단숨에 맑게 하는 호랑지빠귀 소리는 이 산 저산 저들끼리 부르고 대답하며 날이 밝도록 이어진다. 


새벽닭의 울음소리도 변함이 없다. 그게 제일이라는 듯 목청껏 장한 소리를 질러 댄다. 그 뒤를 잇는 것이 참새들이다. 참새들은 소란하다. 향나무 속에 모여, 쥐똥나무 가지에 앉아, 혹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수선을 핀다. 저마다 간밤의 꿈을 쏟아 놓는 것인지 듣는 놈이 따로 없다. 그래도 참새들의 재잘거림은 언제라도 정겹다. 가벼운 음악으로 아침 맞듯 참새들의 재잘거림은 경쾌하고 즐겁다.


오늘 아침엔 후투티 소리도 들었다 


“호-옹!”
“호-옹!” 


빈 병 가장자리에 입술을 대고 불면 나는 그 소리, 후투티는 이름도, 우는 소리도, 생김새도, 나는 모양도 모두가 특이하다.


새들이 여는 단강의 아침. 어느 샌지 날이 밝으면 이내 경운기 소리 햇살 따라 울려 퍼지고. 

-<얘기마을> (1995년)

'한희철의 '두런두런' > 한희철의 얘기마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벽 강  (0) 2021.03.04
봄 들판  (0) 2021.03.03
단강의 아침  (0) 2021.03.02
멀리서 온 소포  (0) 2021.03.01
봄 들판  (0) 2021.02.26
사랑하며  (0) 2021.02.25
posted b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