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14)

사진/김승범

 

아침 햇살 담쟁이넝쿨처럼 
예배당 벽을 거반 오른 시간
계단을 올라 목양실 문을 여니
와락
햇살이 먼저 안으로 든다
내내 웅크리고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더는 참기가 어려웠다는 듯
한 순간에 든다
맘껏 들어오렴
맘껏 숨을 쉬렴
말굽을 세워 문을 열어 둔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며
책상에 앉아 짧은 기도 바칠 때
문득
마음 문 덩달아 열고 싶은 가난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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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춤

 

 





꽃이 춤을 춘다

하늘 하늘 하늘

꽃이 웃음 짓는다

하늘 하늘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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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가져갔다

무릎 꿇고 손가락으로 읽는 예레미야(72)

 

 

모두 다 가져갔다

 

 

“시위대(侍衛隊) 장관(長官)이 또 잔(盞)들과 화로(火爐)들과 주발(周鉢)들과 솥들과 촛대(燭臺)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물(金物)의 금(金)과 은물(銀物)의 은(銀)을 가져갔는데 솔로몬 왕(王)이 여호와의 전(殿)을 위(爲)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 아래 있는 열 두 놋소 곧 이 모든 기구(器具)의 놋 중수(重數)를 헤아릴 수 없었더라”(예레미야 52:19~20)

 

 

 

피에르 신부가 쓴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이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첫 손에 꼽았던 사람이다. 책에는 피에르 신부가 남미의 한 대도시에서 경험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된다.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하는 교회의 통치조직과 그 대표들 가운데 일부의 태도가 때때로 복음의 정신과 동떨어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나는 새로운 교황대사의 관저가 건축되고 있던 남미의 한 대도시에서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건축이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밤에 몰래 와서 타르로 벽에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나니’라고 적어놓곤 했다. 그러자 건축을 맡은 성직자가 경찰을 불렀다. 교황의 집에 복음의 말씀이 적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마지막 문장 부호가 느낌표다. 일부러 그렇게 선택했지 싶은 느낌표는 깊고 긴 탄식처럼 다가온다. 밤에 몰래 와서 건축 중인 교황대사의 관저 벽에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나니’라고 적는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이 오롯이 전해진다. 교황의 집에 복음의 말씀이 적히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을 부르는 성직자, 그런 아이러니가 어디 흔할까 싶다. 같은 책에서 만난 다음 구절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성소의 아름다움은 그 대리석 포석이나 장식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소 주변에 거주지 없는 가족이 단 한 가족도 없다는 사실에 달려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세상의 어떤 건물도 부럽지 않을 만큼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규모,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장식물, 값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성구, 성소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들은 적지가 않다. 거기에 다른 교회에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 또한 은근하기도 하고 집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노사제(老司祭) 피에르는 성소의 아름다움을 그런 류에서 찾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소 주변에 집 없는 자가 없다는 것, 헐벗은 자가 없다는 것, 굶는 자가 없다는 것, 혼자 우는 자가 없다는 것, 단순하고 단호한 지적에 마음이 울컥해진다.

 

 

 

 

 

바벨론에 함락당한 예루살렘의 모습은 처연하다. 주님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큰 건물은 모두 불태워지고 말았다.(52:13) 처참하게 허물어지고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그것이 아무리 성전이라 할지라도 무너질 수 있고, 불태워질 수 있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건물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바벨론의 군대는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약탈해갔다. 그 목록이 다양하다. 놋기둥, 받침, 놋대야, 가마, 부삽, 부집게, 주발, 숟가락, 모든 놋그릇, 잔, 화로, 솥, 촛대, 향 접시, 놋바다, 열두 놋소…, 종류를 다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들이 가져간 것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사용하던 제구(祭具)였다. 열왕기상 7:48~50에 들어있는, 솔로몬이 금으로 만든 성전 기구들이 거반 포함 되어 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사용하던 거룩한 도구들이 전리품과 노략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놋기둥과 받침들과 놋바다는 크기가 커서 있는 그대로를 옮길 수가 없자 바벨론 군인들은 그것을 산산조각 내어 가져간다. 놋기둥도 빠지지 않았다. 놋기둥은 솔로몬 성전 입구에 서 있던 두 개의 기둥이다. 높이 9미터 정도의 크고 화려하게 꾸민 기둥으로 주님께서 그곳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주님의 위엄과 임재를 느끼게 해주는 거룩한 상징이었다.

두 개의 기둥과 관련하여 역대하 3장 15~1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성소 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 머리에 두르고 석류 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주님의 위엄과 임재를 나타내던 성전 기둥은 결국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서 쓰러졌고, 운반이 가능하도록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바벨론 군인들은 성전의 온갖 기물들을 ‘금으로 만든 것은 금이라고 하여 가져갔고, 은으로 만든 것은 은이라 하여 가져갔다.(19절) <새번역> 그들이 가져간 것을 두고 성경은 ‘모든’ ‘모두’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바벨론 근위대장이 가져간 놋쇠만 해도 ‘그 무게를 달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사라져간 영화를 새기듯 놋기둥 위에는 놋쇠로 된 기둥머리가 있고, 기둥머리 위 사방에는 그물과 석류모양의 장식이 얹혀 있었다고, 그물에 사방으로 매달린 석류는 모두 백 개인데 밖에서 보이는 것은 아흔여섯 개였다고, 더는 아무 소용없을 것을 그래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성전은 불에 타 허물어지고 성전 안 온갖 기물은 모두 탈 탈 털린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할 때, 오늘 이 땅의 교회가 겹쳐 떠오르는 것은 혼자만의 기우일까? 예배당 건물은 여전히 화려하고 웅장할지 몰라도 더는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오늘 이 땅의 교회 모습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면, 성전 안 모든 기물을 바벨론에게 빼앗긴 당시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라에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다’고, 성전 안 거룩함을 모두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여전히 자기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면 더는 할 말이 없겠지만.

 

 

한희철/동화작가, 정릉락으로 읽는 예레미야(72)

 

 

 

 

 

모두 다 가져갔다

 

 

 

 

 

“시위대(侍衛隊) 장관(長官)이 또 잔(盞)들과 화로(火爐)들과 주발(周鉢)들과 솥들과 촛대(燭臺)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물(金物)의 금(金)과 은물(銀物)의 은(銀)을 가져갔는데 솔로몬 왕(王)이 여호와의 전(殿)을 위(爲)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 아래 있는 열 두 놋소 곧 이 모든 기구(器具)의 놋 중수(重數)를 헤아릴 수 없었더라”(예레미야 52:19~20)

 

 

 

 

 

 

 

피에르 신부가 쓴 《단순한 기쁨》이라는 책이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첫 손에 꼽았던 사람이다. 책에는 피에르 신부가 남미의 한 대도시에서 경험했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된다.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하는 교회의 통치조직과 그 대표들 가운데 일부의 태도가 때때로 복음의 정신과 동떨어진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 나는 새로운 교황대사의 관저가 건축되고 있던 남미의 한 대도시에서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일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이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건축이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이 밤에 몰래 와서 타르로 벽에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나니’라고 적어놓곤 했다. 그러자 건축을 맡은 성직자가 경찰을 불렀다. 교황의 집에 복음의 말씀이 적히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

 

 

 

 

 

마지막 문장 부호가 느낌표다. 일부러 그렇게 선택했지 싶은 느낌표는 깊고 긴 탄식처럼 다가온다. 밤에 몰래 와서 건축 중인 교황대사의 관저 벽에다 ‘가난한 자는 행복하나니’라고 적는 가난한 사람들의 심정이 오롯이 전해진다. 교황의 집에 복음의 말씀이 적히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을 부르는 성직자, 그런 아이러니가 어디 흔할까 싶다. 같은 책에서 만난 다음 구절도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성소의 아름다움은 그 대리석 포석이나 장식물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성소 주변에 거주지 없는 가족이 단 한 가족도 없다는 사실에 달려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세상의 어떤 건물도 부럽지 않을 만큼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규모,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장식물, 값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성구, 성소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들은 적지가 않다. 거기에 다른 교회에 뒤지지 않으려는 경쟁 또한 은근하기도 하고 집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노사제(老司祭) 피에르는 성소의 아름다움을 그런 류에서 찾고 있지 않다. 오히려 성소 주변에 집 없는 자가 없다는 것, 헐벗은 자가 없다는 것, 굶는 자가 없다는 것, 혼자 우는 자가 없다는 것, 단순하고 단호한 지적에 마음이 울컥해진다.

 

 

 

 

 

 

 

 

 

 

 

바벨론에 함락당한 예루살렘의 모습은 처연하다. 주님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큰 건물은 모두 불태워지고 말았다.(52:13) 처참하게 허물어지고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예루살렘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진다. 그것이 아무리 성전이라 할지라도 무너질 수 있고, 불태워질 수 있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건물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바벨론의 군대는 성전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약탈해갔다. 그 목록이 다양하다. 놋기둥, 받침, 놋대야, 가마, 부삽, 부집게, 주발, 숟가락, 모든 놋그릇, 잔, 화로, 솥, 촛대, 향 접시, 놋바다, 열두 놋소…, 종류를 다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들이 가져간 것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사용하던 제구(祭具)였다. 열왕기상 7:48~50에 들어있는, 솔로몬이 금으로 만든 성전 기구들이 거반 포함 되어 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사용하던 거룩한 도구들이 전리품과 노략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놋기둥과 받침들과 놋바다는 크기가 커서 있는 그대로를 옮길 수가 없자 바벨론 군인들은 그것을 산산조각 내어 가져간다. 놋기둥도 빠지지 않았다. 놋기둥은 솔로몬 성전 입구에 서 있던 두 개의 기둥이다. 높이 9미터 정도의 크고 화려하게 꾸민 기둥으로 주님께서 그곳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주님의 위엄과 임재를 느끼게 해주는 거룩한 상징이었다.

 

두 개의 기둥과 관련하여 역대하 3장 15~17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성소 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 머리에 두르고 석류 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주님의 위엄과 임재를 나타내던 성전 기둥은 결국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서 쓰러졌고, 운반이 가능하도록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바벨론 군인들은 성전의 온갖 기물들을 ‘금으로 만든 것은 금이라고 하여 가져갔고, 은으로 만든 것은 은이라 하여 가져갔다.(19절) <새번역> 그들이 가져간 것을 두고 성경은 ‘모든’ ‘모두’라는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는데, 바벨론 근위대장이 가져간 놋쇠만 해도 ‘그 무게를 달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사라져간 영화를 새기듯 놋기둥 위에는 놋쇠로 된 기둥머리가 있고, 기둥머리 위 사방에는 그물과 석류모양의 장식이 얹혀 있었다고, 그물에 사방으로 매달린 석류는 모두 백 개인데 밖에서 보이는 것은 아흔여섯 개였다고, 더는 아무 소용없을 것을 그래도 기록으로 남기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성전은 불에 타 허물어지고 성전 안 온갖 기물은 모두 탈 탈 털린 예루살렘의 모습을 생각할 때, 오늘 이 땅의 교회가 겹쳐 떠오르는 것은 혼자만의 기우일까? 예배당 건물은 여전히 화려하고 웅장할지 몰라도 더는 하나님의 영광을 찾아보기가 힘든 것이 오늘 이 땅의 교회 모습이라면, 세상 사람들의 조롱과 비난을 받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면, 성전 안 모든 기물을 바벨론에게 빼앗긴 당시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라에 아무도 잃어버린 자가 없다’고, 성전 안 거룩함을 모두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여전히 자기만의 잔치를 벌이고 있다면 더는 할 말이 없겠지만.

 

 

 

 

 

한희철/동화작가, 정릉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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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13)

사진/김승범

 



눈길 한 번에
화인(火印) 되고


손길 한 번에
화인(花印)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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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곁에





 

 

민들레 곁에 
가까이 앉으며

노란꽃 언저리에
떠돌던 숨을 얹는다

봄바람 같은
봄햇살 같은

꽃잎마다 결결이
숨결을 고르다가

숨이 멈추어
쉼이 되는 순간

웃음이 난다
민들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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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12)



난분분 난분분
때늦은 눈발 날릴 때
꽃잎에 닿는 눈은
눈물로 닿고
눈을 맞는 꽃잎은
향기로 떨고 

 -<얘기마을> (1996년)

 

사진/김승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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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11)



아랫작실 양짓말 
세월을 잊고 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이씨 문중 낡은 사당이 있고 
사당으로 들어서는 왼쪽 편 
살던 사람 떠나 쉽게 허물어진 마당 공터에 
비닐하우스가 섰다. 
하우스 안에선 고추 모들이 자란다. 

 

사진/김승범


막대 끝에 매단 둥근 바구니를 터뜨리려 
오자미 던져대는 운동회날 아이들처럼 
고만 고만한 고추 모들이 아우성을 친다. 


저녁녘 병철 씨가 비닐을 덮는다. 
아직은 쌀쌀한 밤기운 
행여 밤새 고추 모가 얼까 한 켜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보온 덮개를 덮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다시 한 번 널따란 보온 덮개를 덮는다. 


이불 차 던지고 자는 어린자식 
꼭 꼭 덮어주는 아비 손길처럼 
고추모를 덮고 덮는 병철 씨 
나무 등걸처럼 거친 병철 씨 손이 문득 따뜻하다. 
고추 모들은 또 한 밤을 잘 잘 것이다.


봄이다.

-<얘기마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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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10)



낡은 종탑 종소리 울려 퍼지는 주일 아침
목양실 창문을 통해 예배당을 찾는 교우들을 봅니다
지팡이를 짚기도 했고
유모차에 의지해 걸음을 떼기도 합니다
수술을 받은 이도 있고
일자리를 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다만큼은 아니라 해도
분명 운동장보다는 클
아픔과 갈망
채울 길이 무엇일지 아뜩해지는데
어깨마다 내리는 환한 햇살
그러면 된다고
한 줌의 은총이면 족하다고
어느새 내 안으로도 드는
한 줄기 햇살 

-<얘기마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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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9)



돌아서는 이를 향해
모두가 등을 돌릴 때
너는 가만 가슴을 연다

 


눅눅한 이를 향해
무심한 눈을 흘길 때
너는 눈물을 흘린다


응달 자리 더욱 붉은 진달래
그럴수록 아픈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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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넓히십시오

“그러자 우리 주님이 내게 한 질문을 던지셨다. 내가 너를 위하여 고난당한 그것이 너를 만족케 하였느냐? 내가 말했다. 예, 선하신 주님, 제 모든 고마움을, 선하신 주님, 당신께 드립니다. 복되소서. 우리 선하신 주님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만족이면 나도 만족이다. 너를 위해 당한 고난이 내게는 기쁨이요, 지복이요, 한없는 즐거움이다.“(<노리치의 줄리안>, 이현주 옮김, 말씀과밥의집, p.149)


주님의 평안이 세상의 나그네로 살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사순절 순례의 여정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전보다 조금은 더 맑아지고 깊어지셨는지요? 엄벙덤벙 시간에 떠밀리며 살다 보면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잊을 때가 많습니다. 삶에 대한 질문은 잠시 멈춰 서라는 요청입니다. 우화 속의 토끼가 생각납니다. 토끼는 하늘이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무 아래 누워 낮잠을 자던 토끼는 사과 한 알이 떨어지는 소리에 소스라쳐 놀라 일어나 다짜고짜 달리기 시작합니다. 하늘이 무너졌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숲속에 있던 동물들도 토끼의 서슬에 놀라 함께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왜 달리고 있는지 아는 동물은 없었습니다. 다른 동물들이 달리기에 무작정 따라 달렸으니 그럴 수밖에요. 우리도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무지 속에 있을 때 두려움은 이렇게 물결처럼 번져 가게 마련입니다.

코로나 확진자 수가 400여명 근처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수십 명만 돼도 화들짝 놀라곤 했는데, 이제는 조금 무덤덤해진 것 같습니다. 긴장들이 풀린 탓인지 공원이나 거리 혹은 식당이나 카페에 사람들이 정말 많이 몰리고 있습니다. 백신 접종이 더디게나마 지속되고 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비록 20% 밖에는 허용되지 않지만 대면 예배가 시작된 지 몇 주가 지나고 있습니다. 마스크에 가려진 얼굴이라도 볼 수 있어 다행입니다. 속히 모든 이들이 함께 모여 예배드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다가오는 주일은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환호성을 올렸던 그 순간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들뜬 표정의 사람들 속에서 주님 홀로 쓸쓸하셨을 것입니다. 당신 앞에 드리운 어둔 그늘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저는 이맘 때면 예수님이 감내하셔야 했던 고독과 쓸쓸함에 깊이 감응하는 편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주님의 괴로움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허망한 기대에 들떠 건듯건듯 걷고 있었습니다.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들의 활기로 인해 도성은 흥청거렸지만 주님의 마음은 쓸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지금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외롭게 하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집니다. 주중에 목사 안수식을 앞둔 젊은 후보자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생명부지의 사람이었지만 꼭 제게 안수를 받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간곡한 부탁을 차마 뿌리치지 못하고 일단 만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 위한 자격 심사를 받는 과정 가운데서 깊은 절망감을 맛보았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절망감이라기보다는 굴욕감 혹은 염증이라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심사위원들은 그에게 곤혹스러운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를테면 차별 금지법이라든지 방역 지침을 위반하였다가 두 주간 교회 폐쇄 명령을 받았던 00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분들이 듣고 싶었던 말은 차별 금지법에 반대한다는 명백한 답변이었고, 정부가 교회를 박해하고 있다는 자신들의 입장에 동조하는 것이었습니다. 신학적인 논증이 끼어들 자리는 애초에 없었습니다. 심사위원들은 대답을 망설이는 후보자를 꾸짖으며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 진급에서 누락될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설명은 필요 없으니 가타부타만 명확히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보자는 마음으로 흔쾌히 동의할 수 없는 견해에 맞서기보다는 ‘알겠습니다’라는 애매한 대답으로 그 순간을 모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슴 가득 비애가 차올랐을 겁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처럼 슬픈 일이 또 있을까요? 저는 젊은이들을 길들이려는 순간 역사는 퇴행을 거듭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카로운 모서리들이 깎인 채 기존 질서에 두루뭉수리로 적응하며 살도록 강요하는 것이 폭력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존 웨슬리는 ‘관용의 정신’이라는 설교에서 논쟁을 통해 누군가를 굴복시키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주장이나 예배나 회중에 대한 견해가 어떠하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라면, 죄를 피하여 애쓰고, 선한 일을 하는 데 열심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입니다.“(한국웨슬리학회 편, <웨슬리 설교전집 3>, 대한기독교서회, p.77)

어느 누구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가르침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진리라는 실체를 찾기 위해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철학사 책에서 읽은 것이라 기억이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레싱의 말이 떠오릅니다. 만일 신이 오른손에 모든 진리를 쥐고 왼손에는 살아 있는 진리를 향한 노력을 쥐고 계시면서 어느 쪽을 택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택하시겠습니까? 레싱은 자기라면 공손하게 왼손을 택하면서 이렇게 말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 주십시오. 순수한 진리는 오직 당신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젊은 시절 진리에 대한 목마름에 시달리던 제게 이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진리 그 자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속의 어둠을 밝히며 앞으로 나갈 뿐입니다.

자기 확신에 찬 언어가 횡행할 때 세상은 거칠어집니다. 내가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와 생각이 다르고 입장이 다른 사람은 비진리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근본주의가 위험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근본주의는 옳고 그름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 세상을 재단합니다. ‘옳음’과 ‘그름’을 그렇게 두부모 자르듯 가를 수 있나요? 세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고 이질적입니다.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는 섬세함이 곧 사랑이 아닐까요? 양극적 사고는 위험합니다. 우리가 위치를 나타낼 때 쓰는 지시대명사 ‘여기’와 ‘저기’ 혹은 ‘이것’과 ‘저것’은 그 내포하는 의미가 참 모호합니다. 도무지 둘 사이의 거리를 가늠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반경 10미터 안에 있으면 ‘여기’고 더 멀면 ‘거기’인가요? 서울에 있으면 ‘여기’고 부산에 있으면 ‘거기’인가요? 지리학자인 이-푸 투안은 이런 양극적 언어는 사람들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언어 하나를 예시합니다.

“시베리아 북동부의 추크치족의 경우는 화자와 관련해 대상의 위치를 표현하기 위해 무려 아홉 개의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이-푸 투안, <공간과 장소>, 윤영호 김미선 옮김, 사이, p.155)

이 말 속에는 위치를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 세분화될 때 우리 감정 또한 양극단에서 벗어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여백이 있는 언어, 나와 생각이 다르다 하여 즉각적으로 배제하거나 동화시키려 하지 않는 언어가 절실히 필요한 시절입니다. 요즘 토마스 베리 신부와 수리물리학자인 브라이언 스윔이 함께 쓴 <우주 이야기>(맹영선 옮김, 대화문화아카데미)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버리는 것, 다른 존재들과의 밀접한 관계로부터 단절되는 것, 상호 공존의 기쁨에 들어갈 수 없는 이런 상황들을 지옥의 본질the essence of damnation로 여겼다.”(p.133-4)

조그마한 차이를 용납할 수 없어 배제해 버리는 일이야말로 편협한 정신의 특색입니다. 지금은 충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더 깊은 이해에 이르기 위해 마음을 열 때 우리는 비로소 참을 찾는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고난 주간 연속 강좌가 열립니다. 교회에 모일 수 없기에 유튜브 영상으로 송출할 예정입니다. 매년 맞이하는 절기이지만 이번에는 목회자들이 한 권의 책을 텍스트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로완 윌리엄스의 책 <심판대에 선 그리스도>(비아)을 읽어나갈 예정입니다. 각각의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재판 이야기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 이야기를 통해 복음서 기자들이 증언하려 했던 예수님은 누구인지를 살피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서계셨던 그 재판정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 자리는 예수님에 대한 심판 자리가 아니라 몰상식과 관행화된 신앙에 기댄 채 살아온 우리 삶에 대한 심판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한번쯤은 점검해보아야 할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사순절의 남은 기간만이라도 순례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살면 좋겠습니다. “주님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에,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2) 라고 청했던 죄수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변함없으신 주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

2021년 3월 25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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