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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47

봄(3) 인적 끊겨 길마저 끊겨가는 윗작실서 안골로 넘어가는 옛길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단옷날 그네가 걸려 어릴 적 시간으로 단숨에 들게 하던 근심과 걱정 그나마 털던 품 넓고 장한 느티나무 위로 바람과 볕 잔잔한 안골이 있는데 안골 한복판엔 감나무가 섰다. 가을이면 하늘을 다 덮을 만큼 감이 열리고 고추잠자리 붉은 노을 부러움을 살만큼 붉은 감이 눈부신 나무다. 어느 날 여든이 넘은 이한조 할아버지 지게 위에 달랑 낫 하나 걸고 불편한 걸음 지게막대 의지해 안골로 건너와선 지난겨울 둘러준 감나무 밑동 메밀짚을 걷어낸다. 얼지 말라고 장난꾸러기 손주 내복 입히듯 둘러준 메밀짚 짚을 걷어 바닥에 깔고 서너 번 나무 밑동 쓰다듬곤 돌아선다. 봄이다. - (1996년) 2021. 3. 20.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산다는 것 “‘내가 그들을 여러 백성들 가운데 흩으려니와 그들이 먼 곳에서 나를 기억하고’(슥10:9) 기독교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분의 뜻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서, 마치 씨앗처럼 ‘땅의 모든 나라 중에’ 뿌려져 있는 것입니다.(신 28:25). 이것은 그들에게 저주인 동시에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머나먼 나라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것은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씨앗으로 존재하는 길이기도 합니다.”(디트리히 본회퍼, , 김순현 옮김, 복 있는 사람, p.22) 주님의 평강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미세먼지가 우리 마음을 어둡게 만들지만, 봄기운이 완연한 나날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건강에 유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로 생긴 대형 백화점에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 2021. 3. 20.
봄(2) 아랫작실 양짓말 세월을 잊고 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이씨 문중 낡은 사당이 있고 사당으로 들어서는 왼쪽 편 살던 사람 떠나 쉽게 허물어진 마당 공터에 비닐하우스가 섰다. 하우스 안에선 고추 모들이 자란다. 막대 끝에 매단 둥근 바구니를 터뜨리려 오자미 던져대는 운동회날 아이들처럼 고만 고만한 고추 모들이 아우성을 친다. 저녁녘 병철 씨가 비닐을 덮는다. 아직은 쌀쌀한 밤기운 행여 밤새 고추 모가 얼까 한 켜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보온 덮개를 덮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다시 한 번 널따란 보온 덮개를 덮는다. 이불 차 던지고 자는 어린자식 꼭 꼭 덮어주는 아비 손길처럼 고추모를 덮고 덮는 병철 씨 나무 등걸처럼 거친 병철 씨 손이 문득 따뜻하다. 고추 모들은 또 한 밤을 잘 잘 것이다. 봄이다. - (.. 2021. 3. 19.
봄(1) 윗작실 하루 두 차례 들어오는 버스 정류장 옆에 허름한 집이 한 채 있다. 여기저기 헐리고 주저앉은 다 쓰러져가는 토담집이다. 오래된 장작이 아무렇게나 쌓여있고 문풍지 숭숭 뚫린 문은 바람과 친해져 무사통과다. 거기 한 할머니가 산다. 기구한 사연으로 한동안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세상에 근거 없는 삶을 살았다. 집이라기보다는 움막 그래도 겨울 내내 연기는 피어올랐다. 밖으로 반 집안으로 스미는 것 반 겨울잠을 자듯 또 한 번의 겨울을 할머닌 그렇게 났다. 며칠 전 할머니 집 앞마당 마당이래야 주먹만 한 마당에 파랗게 싹들이 돋았다. 마늘이었다. 짧고 좁은 가운데 길을 빼곤 빼곡하게 마늘 싹이 돋았다. 항아리 몇 개 놓인 뒤뜰 둑에 산수유 꽃망울이 터진다. 노랗게 터진다. 봄이다. - (1996년) 2021. 3. 18.
볏가리 어둠이 내리는 저녁 들판에 선 볏가리들이 가만 고개를 숙였다. 시커먼 어둠을 가슴으로 안은 것이 기도하는 수도자 형상이다. 베어진 뒤에도 그들은 묻고 있다. 제대로 익었는가 다 익었는가 - (1995년) 2021. 3. 17.
다시 쓰는 사랑의 서사 넘을 수 없는 게 죽음이다. 그러니 “죽음을 넘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할까? 그런데 그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그것도 자신을 넘어 남들을 위해서. 이들은 사랑하는 배우자가 세상을 떠난 후 겪는 충격과 고독 그리고 고통의 삶을 끌어안고 그 힘겨운 내면 풍경을 우리에게 드러낸다. 그런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 것은 아무래도 고통스럽다. 그래서 슬며시 외면하는 것이 마음 편한 선택이다. 이들이 그걸 모를까? 폐허가 따로 없다 귀담아 들어주고 알아주는 이야기도 아닌 것을 세상에 내놓는 것은 어리석다. 그 어리석음을 모르지 않는 이들은 그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나는 사별하였다》는 이 정직한 제목은 사실 가혹하면서 도발적이다. 책장을 넘기고 들춰보고 싶게 하지 않는다. 그 도발성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난데없이 .. 2021. 3. 16.
흐르는 강물처럼 강가에 나갔더니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훤히 트인 강에서 물살을 거슬러 달려오는 바람이 맵고 거세다. 사진/김승범 거센 바람을 맞으며 강물이 거꾸로 밀린다. 어, 어, 어, 어, 뒤로 자빠진다. 그래도 물은 아래로 흐른다. 여전히 강물은 아래로 흘러간다. 잠시 표정이 바람에 밀릴 뿐 거센 바람을 기꺼이 달게 받으며 강은 여전히 아래로 흐른다. 결국은 우리도 그렇게 흘러야 할 터 우리에게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속을 속으로, 안으로, 아래로. - (1995년) 2021. 3. 16.
세월 황산개울 다리 건너 충청도 초입 이른바 충청북도 충주시 소태면 덕은리 정월 대보름을 맞아 윷판이 벌어졌다. 노장 대 소장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은데 편은 두 편이다. 썩썩 낫으로 깎아 만든 커다란 윷을 길바닥 아무데나 던지면 된다. 말은 소주병 병뚜껑에 담배꽁초 앞서거니 뒤서거니 흥이 오른다. 윷 한 번 치고는 덩실덩실 춤이 한참이고 저만치 앞선 말 용케 잡고는 서로를 얼싸안고 브루스가 그럴듯하다. 기분 좋아 한 잔 아쉬워서 한 잔 질펀하게 어울릴 때 술 너무 하지 말어 술 먹다가 세월 다 가 지나가던 한 사람 그렇게 끼어들자 그게 뭔 소리 철없는 소리 이게 세월이지 암, 이게 세월이야 윷판은 끝날 줄을 모르고 또 하나의 세월이 그렇게 가고 - (1996년) 2021. 3. 15.
언 손을 녹이는 것은 언 손이구나 글을 읽으며 자주 마주해야 했던 ‘사별자’라는 말은 내내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뜻이야 이내 헤아릴 수 있었지만 뭔가 체온이 빠져나간 듯한 어감과, 나도 모르게 그 말로부터 거리를 두려하는 마음이 그랬습니다. ‘사별자’와 대조가 되는 ‘비사별자’란 말도 그랬고, ‘비사별자’란 ‘잠정적인 사별자’라는 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해와 공감은 되면서도 낯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원고를 다 읽은 뒤에야 항복하듯 서너 가지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가 경험하는 수많은 이별 중에서 가장 아픈 이별이 사별이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 일로 겪어야 하는 아픔은 근원적인 아픔이라는 것 등입니다. 분명 처음 해보는 생각은 아닌데도,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얼음장 아래 날카로.. 2021. 3.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