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하게 지으신 몸




밥은 자식이 먹었는데
엄마 배가 부르다고 하셨지요

밥을 먹다가 뉴스에서 누군가가 
높은데서 떨어지거나 다쳤다고 하면

내 정강이뼈가 저릿해지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 떨며 아파하고

밤새 마음이 아파서 잠을 설치게 된다
그래서 평화의 숨으로 스스로를 다스려야 한다

나의 몸은 
나를 스쳐 지나는

이 모든 걸 그대로 느끼며
투명하게 반응한다

저녁밥을 먹다가
이런 나를 지으신 이가 누구인지 

그리고 안녕하신지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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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이 빚어낸 다채로운 무늬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2. 1. 22. 10:17

 

거의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오는 동안 길이 막힐 때마다 시편을 붙들고 살았다는 저자는 시편의 구절들이 거친 바다를 비추는 등대 구실을 해줄 때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시편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보지 못했던 삶의 다른 층위를 바라보는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욕망 사이에서 바장인다.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확신과 회의,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와 불의, 사랑과 미움이 시도 때도 없이 갈마들며 삶의 무늬를 만든다.

 

이 책은 그런 인간의 삶이 빚어낸 다채로운 무늬로 가득 차 있는 시편의 세계를 보여준다. 기쁨의 찬가가 있는가 하면 깊은 탄식이 있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가 하면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있다. 가없는 용서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도 있지만 악인이나 원수들의 불행을 기원하는 시도 있다. 시편을 읽다가 가끔 그 적나라한 감정 표현에 놀라는 당혹스러운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시편 속에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마음을 다해 시편을 읽거나 낭송하는 일은 우리 속에 들끓고 있는 소리를 잠재우는 일이고, 다른 차원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현실이 어둡다고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피조물들의 신음 소리가높아가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사는 이들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용기를 내야 한다.아직도 경제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는 게 우리현실이다.야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우상숭배자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믿음의 사람들은 육체의 욕망,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한일서 2:16)에서 자꾸 멀어져야 한다.그래야 자유로워진다.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욕망에 저항할 생각조차 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세상에 길들여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영혼의 발신음> 중에서

 

 

*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시편 27:3). 하나님의 은총에 자기를 온전히 맡긴 사람의 고백이다. 하나님의 부력을 경험해 본 사람의 고백이다. 길들인 독수리와 함께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날개를 편 채 유영하는 독수리와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이 똑같은 바람을 타고 날았다. 그 모습이 경이로웠다. 신앙인이란 어쩌면 하나님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일을 도외시하고 산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바람은 때로는 지친 나그네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일 때도 있지만, 앞에 있는 장애물을 다 날려버리는 회오리바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일깨우는 봄바람일 때도 있지만, 불의한 세상과 권력을 날려버리는 태풍일 때도 있다. 가깝게 느끼는 몇 분의 목사님들은 평소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고 겸손하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를 질타할 때는 사자로 변한다. 두 모습 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이다.

<영혼의 파열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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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부끄러움을 배우게 하면서도 한없이 기쁘게 만드는 책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2. 1. 22. 10:10

 
요즘은 어느 하루도 황폐하도록 기진하지 않는 날이 없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추악한 요괴들이 도처에 출몰해서 우리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온 몸에 독(毒)이 퍼지겠다 싶을 정도다. 어쩌겠는가. 그러나 이렇게라도 싸우지 않으면 “악의 퇴치”는 없다.
그러나 이런 중에도 우리의 영혼을 스스로 돌보지 않으면 병이 깊어질지도 모른다. 이런 때에 좋은 말씀 한 구절 가슴에 스미면 그게 그날의 구원이다. 우린 어느새 사원(寺院)을 잃은 시대를 살고 있으니 말이다.
일년 열두달, 계절까지 포개어 하루하루의 짧은 일기처럼 쓰여진 한희철의 <하루 한 생각>은 잠언이자 시편이며 말씀이다.
그건 세월로 빚어낸 영혼의 노작(勞作)이며 우리 모두를 위해 길어올린 기도의 생수(生水)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詩’란 ‘언어言의 사원寺’이다.” 우리는 그가 세운 사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자신을 위한 방으로 인도되고 그 안에서 침묵하는 법을 배우며 벽을 마주하여 수련하는 자세를 익히고 숲속의 나무 한 그루가 되어 살아가는 시간을 깨우친다.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실력이나 능력만이 아니다. 더욱 신뢰하는 것이 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이다. 진실에서 비롯된.”
이런 족자가 걸려 있는 방에서 우리는 과욕을 부려 산 겉옷을 벗게 된다. 더는 껴 입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나쁜 놈, 어리석은 놈’이라는 제목의 글은 이렇다. “그 중 나쁜 놈은, 다른 이의 분노를 자극하여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 놈. 그 중 어리석은 놈은, 누군가의 충동에 생각 없이 분노하는 놈.” 해서 이런 충고도 더한다.
“북소리가 들리면 춤 출 일이 아니다. 북을 누가 치는 지를 살필 일이다.”
우리의 허위를 치는 목탁 소리도 들려준다. “말하는 방식은 두 가지다. 삶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고, 혀로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말없이 말하는 사람이 있고, 말로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는 우리가 놓치 말아야 할 줄이 무언지 넌지시 일러준다.
“누군가를 향해 가장 먼 길을 걸어가는. 사랑이란....” 그러기에 이런 말도 이어나간다. “사랑하지 않은 시간. 가장 큰 낭비란...”
‘어느 날의 기도’라는 제목의 글은 진실의 길로 들어서는 법을 깨닫게 한다. “제게 필요한 것은 촛대가 아니라 빛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궁핍한 시대를 먹여 살리기 위해 자신의 살과 피로 빚은 떡과 술을 나눠주는 수도승이 있다.
하여 그는 시편을 인용하면서 이런 글을 우리에게 편지처럼 띄운다.
“‘눈물을 흘리며 씨 뿌리는 자, 기뻐하며 거두어들이리라.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가는 자, 곡식단을 안고서 노랫소리 흥겹게 들어오리라’(시편 126:5~6, 공동번역).
시편의 노래는 내 안에서 다른 시 하나와 만난다.

‘거친 들에 씨 뿌린 자는 들을 잊기 어렵나니/어찌 견딜 수 있는 곳을 가려 아직 너의 집이라 하랴’황동규의 <비가悲歌> 제5가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울며 씨를 뿌린다니, 씨를 담아 들고 울며 나간다니, 생각만 해도 먹먹해진다. 고운 땅이 아니라 거친 들에 씨 뿌리는 자는 들을 잊지 못한다. 안락한 곳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곳을 오히려 자기 존재의 집으로 삼는다.
세상은 그렇게 뿌린 씨로 밥을 먹고 산다. 누가 씨를 뿌렸는지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는 채로.”
아, 하는 탄성을 냈다. 그리고는 다음의 글을 경귀로 삼는다.
“우리가 어떤 짐을 싣고 어떻게 가는지는 세상이 안다. 굳이 우리가 요란한 소리를 따로 내지 않아도 말이다.”

한없이 부끄러움을 배우게 하면서도 한없이 기쁘게 만드는 책 한권, 이 글을 읽는 그대에게 권한다. 등불을 놓친 어두운 길에서도 헤매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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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이





싸늘한 벽돌과 
껑껑 언 모래와 
먼지 같은 시멘트

이 셋을 접붙이는 일
이 셋으로 집을 짓는 일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날
이 차가운 셋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

제 살처럼 붙으리라는
강물 같은 믿음으로

나무 토막 줏어 모아 쬐는
손끝을 녹이는 모닥불의 온기와

아침 공복을 채워주는 
컵라면과 믹스 커피

새벽답 한 김 끓여온
생강차 한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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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빈 가지가 흔들린다
아, 바람이 있다

나에게 두 눈이 있어
흔들리는 것들이 보인다

보이지 않지만
있다가 없는 듯

한낮의 햇살이 
슬어주는 잠결에

마른 가지 끝 곤히
하늘을 지우는

보이지 않지만
없다가 있는 듯

앙상한 내 가슴을 흔드는
이것은 누구의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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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잎

 



스치는
겨울 바람에

몸도 마음도 
움츠러들지만

내려 주시는 
한 줄기 햇살에

몸도 마음도
가벼워만 집니다

- 겨울나무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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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 낯설지 않은 ‘마음’이 밀려온다

<꽃자리> 출간 책 서평 2022. 1. 9. 08:08


저자는 서문에서 「하루 한 생각」이 ‘누군가 지친 이에게 닿는 바람 한 줄기, 마음 시린 이에게 다가 선 한 줌의 볕’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표현이 적합할지 모르겠지만, 글이 참 맛있어 쉬이 책장을 넘기기 아쉬워 자연히 저자의 바람이 내게서 이루어진 독서의 시간이었다. 꽤나 지쳤던 내게 닿았던 ‘바람 한 줄기’가 바로 여기에 담겨 있고, 꽤나 마음 시린 일상을 이어가던 내게 다가 선 ‘한 줌의 볕’같은 맛있었던 시간, 책을 덮는 순간 그 시간을 떠나보내는 것 같은 아쉬움이 느껴진다.

 

어떤 책에선가, ‘삶은 관계’라는 것을 본 일이 있다. 꽤 공감했던 이유는 그간 내가 가진 고민과 고통은 ‘인간관계’이자, ‘소통’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 때문이었는지, 열한 번째 챕터, ‘길’이라는 제목의 짤막한 글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어쩌면 가장 먼 길 한 사람에게 가는 길, 어쩌면 가장 험한 길 한 사람에게 닿는 길.’ 문장을 마주하고 담담하려 애썼지만 오랜 시간 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못했다. 모든 문제를 ‘내 탓’으로 여기며 살아온 내게 ‘넓은 위로’가 여기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의 글은 일상의 공감과 넓은 위로가 있다.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어느 날의 기도’라는 챕터는 참 신선하다. 아니, 신선하다는 표현은 그 챕터를 표현하기에는 어줍잖다.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고, 읽어 내려가지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2월>, 열세 번째 챕터의 ‘어느 날의 기도’를 무게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꽤 무겁다. 무엇이든 ‘충만’하고, ‘충천’한 기대 속에서 ‘당신’(내 마음대로라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신앙의 방법이라고 느낄 법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무도 없는’, 그리고 ‘아무 것도 없는’, 거기에선 ‘당신’을 느낄 수조차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당신’을 가장 선명히 만나는 곳이라니. 아마, 기도는 그렇게 나를 비워내는 과정이 아닐까.

 

사진/김승범


그렇다고 재미를 빠뜨린 것은 아니다. <3월>의 서른 번째 챕터, 저자의 기록대로라면 ‘마크 트웨인’은 ‘침대’를 가장 위험한 장소로 꼽았단다. ‘80% 이상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사망하기 때문’이다. 그의 재미있는 역설과 통찰을 소개하며 삶과 연결 지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저자의 기지가 부럽다. 무엇보다 그가 서른 번째 챕터의 마지막 말로 기록한 것처럼, 조금 더 ‘가볍고 단순한 삶’은 그런 기지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 때문에 더욱 부럽다.

 

독서를 하는 동안, <9월>을 기다렸다. 저자의 가을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을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하기 좋은 계절 같은데, 분명 그런 글 하나 쯤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9월>, 열다섯 번째 챕터 ‘낭비’, 더 나열할 것이 없다. 그저 펜 하나 집어 들고, 아주 굵직하게 따라 써본다. “사랑하지 않은 시간, 가장 큰 낭비란”

 

책의 표지 한 켠 ‘눈부시지 않아도 좋은’이라 이름 했지만, 저자에게만큼은 ‘눈부시지 않았던 하루’는 없었던 것 같다. 매일 그가 들여다보고, 그가 걸음 했던 일상은 꼭 한 줄 남기고 싶은 ‘기록’과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저자가 놓치지 않았던 일상에 대한 눈부신 발견이 ‘마음 시린 내게 다가와 준 한 줌의 볕’이 되었다. 넉넉한 마음이 필요하다면, 시린 마음 달랠 길 없고 누구 하나 내 시린 마음 알아주는 이 없다면 한 줌의 볕으로 다가오는 글 한 모금을 추천하고 싶다. 책을 덮고 끝이려나 싶었더니, ‘그’의 일상이 자꾸 다가온다. ‘그’가 담아 둔 낯설지 않은 마음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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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광등을 갈다

사진/김승범


어둠이 다 내린 저녁, 오토바이를 타고 작실로 올랐다. 패인 길을 고친다고 얼마 전 자갈을 곳곳에 부려 쿵덕 쿵덕 작은 오토바이가 춤을 춘다. 게다가 한손엔 기다란 형광등 전구를 잡았으니, 어둠속 한 손으로 달리는 작실 길은 쉽지 않았다.


전날 우영기 속장님 집에서 속회예배를 드렸는데 보니 형광등 전구가 고장 나 그야말로 캄캄 동굴인지라 온통 더듬거려야 했다. 전날 형광등이 고장 났으면서도 농사일에 바빠 전구 사러 나갈 틈이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교회에 형광등 여유분이 있었다. 그토록 덜컹거렸으면서도 용케 전구는 괜찮았다.


전구를 바꿔 끼자 캄캄한 방안이 대낮처럼 밝혀졌다. 막 일마치고 돌아온 속장님이 밝아진 방이 신기한 듯 반가워한다.


어둔 곳에 불 하나 밝히는 당연함.
필요한 곳에 불 하나 켜는 소중함.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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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통일

사진/김승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이 정성 다해서 통일, 통일이여 오라“

작실서 섬뜰로 내려오는 산모퉁이 길, 아침 일찍 커다란 노랫소리가 들립니다.
책가방 등에 메고 준비물 손에 든 5학년 병직이입니다.


하루 첫 햇살 깨끗하게 내리고, 참나무 많은 산 꾀꼬리 소리 명랑한 이른 아침.
씩씩하게 노래를 부르며 병직이가 학교를 갑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얘기마을>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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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갈증, 그 해갈은 어디에

한종호의 '너른마당' 2022. 1. 6. 14:12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지만 며칠 못가서 어긋나곤 한다. 지난 해를 보내면서 세월의 흐름만큼 우리 자신이 성장했는지 묻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시간의 파편을 주워 모아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가늠하게 마련인가 보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신앙이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여러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 가령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시작해서 어떤 삶을 목표로 삼아야 되는가등등 간단치 않은 주제들과의 씨름을 보다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단 한마디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라고 설득하면 그로써 우리의 고뇌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없는 상태로 안정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우리의 일상의 생활과 분리되어 따로 종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일상의 자질구레한 또는 사사로운 문제와는 관련이 없이 보다 심오하고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들하고만 상대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모두가 다 신앙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믿음이 없는 삶, 삶이 없는 믿음 모두가 다 허무하거나 혹은 껍질뿐인 앙상한 관념의 놀이에 그치기 십상이다. 신앙이란 삶 그 자체의 절박한 주제이고, 그 삶을 펼쳐나가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성서>는 매우 솔직하고 구체적이다.

 

사실 신앙의 세계에 첫 발을 들여 놓거나 또는 그저 주변에서 맴도는 경우에도 성서를 읽게 되노라면 성서가 최상으로 경건한 책이라는 일종의 고정관념과도 같은 생각들이 들어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당혹하게 된다. 인간들의 일상의 고뇌를 비롯해서 전쟁, 파괴, 속임수, 간음, 질투, 투쟁, 사랑, 근친상간, 타락 등등 무수한 드라마가 그 안에 담겨 있어서 그렇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사와 그리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하나님의 존재도 그 속에 그려져 있다. 아니 때로는 더욱 잔혹하고 편협하며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요구를 인간에게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정도이다.

 

그래서 혹자는 성서를 문학으로 이해하고, 혹자는 역사서로 이해하며 혹자는 이스라엘 민족종교의 경전정도로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기도 한다. 성서에 대한 이런 이해가 반드시 틀리지만은 않다. 성서는 그런 면모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성서가 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다가올 수 있는 길을 보게 된다. 오랜 세월 속에서 인간이 겪은 무수한 사건들을 삭이고 삭혀서 그 오랜 시간의 풍파(風波)에 마모되지 않은 평생의 고백들이 정수(精髓)처럼 하나로 묶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런 어려움들을 하나 하나 통과해오면서도 그 삶에 깊숙한 연륜과 지혜가 있는 어른들의 이야기에서 인생의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 그 마음과 영혼이 온통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겪고도 그 삶에 아름다운 품위가 있고, 경청할 만한 진리가 번뜩일 때에 우리는 그가 치른 고난이 도리어 보석이 되어 빛나는 것을 경험하고 감격해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의 이력과 그로써 얻은 진실에 대한 눈뜸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살면서 별로 고생도 해보지 않고, 인생 보는 눈이 가볍고 남의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은 이에게 우리는 인생의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성서는 이런 온갖 고난의 골짜기를 힘겹게 통과한 연후, 자신의 영혼에 길러진 귀중한 생명의 진액을 인류에게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인생사의 갖가지 곡절과 시비 앞에서 성서는 그 모든 문제들을 종국적으로 풀어나가는 힘의 원천이 결국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마음과 고백을 만날 수 있는 현장이 성서 속에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 또는 종교적 교리든지 아니면 신학적 가르침에 좌우되지 말고 자신의 인생살이와 성서속의 세계가 하나로 만날 수 있는지를 물으면서 읽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김승범

 

요한복음에는 나사렛 예수와 한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른 예수께서 물을 길러 나온, 유대인들과는 서로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 그것도 아무도 없는 호젓한 우물가에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종교지도자의 스캔들로 문제 삼을 만한 현장이었다. 물을 한잔 청하자, 여인은 별로 친절하지 않게 대꾸한다. 이에 예수는 자신이 누군가를 알았다면 거꾸로 예수에게 여인이 물을 달라고 청했을 것이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자 여인은 두레박도 없는 주제에 무슨 소리냐하면서 핀잔을 준다. 예수는 자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라고 한다. 매일 물을 길러오는 고된 노동에 시달려 있던 여인은 귀가 번쩍 뜨인다. 팩팩 거리던 여인이 자신의 힘든 지경을 짚어나가는 예수 앞에서 마음이 한결 열린 것이다. 게다가 예수는 여인의 삶, 그 본질적인 고뇌 즉,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진짜 남편이 아니며 이미 몇 사람의 남자를 거치면서 살아온 역경의 현실을 언급한다. 이렇게 저렇게 전전하면서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 마음과 몸이 지쳐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 있는 여인의 영혼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아픔을 어루만진 것이다.

 

그러자 여인의 삶은 전격적으로 예수를 향해 열린다. 그리고는 물을 긷기 위해 가져왔던 물동이를 우물가에 내버려두고 동네를 향해 달려간다. 예수를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여인이 우물에 온 것은 물동이에 물을 담아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이 여인의 삶에 지금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물동이를 버리고 간다. 홀연 정작 중요한 것이 깨달아 지는 순간, 지금껏 집착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신앙의 세계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예수는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을 주는 분이다. 우리의 삶, 그 처지를 바로 보고 짚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껏 매달려 있던 욕망이라든가 좌절감이라든가 또는 허망한 생각에서 단숨에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 그 깊숙한 곳까지 부드럽게 육박해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 그 영혼에 생명의 힘을 길어 올릴 두레박을 얻은 여인이다. 바로 그런 얻음이 있었기에 물동이는 더 이상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영혼의 두레박’, 그것을 우리가 얻게 되면 우리는 인생의 갈증을 새롭게 축이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 무수히 방황하는 심령들은 모두 바로 이 두레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올 한 해, 부디 그런 두레박을 얻어서 삶의 새 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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