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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9)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사랑하는 법을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할 때가 있다.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오히려 사랑은 아픔과 상처가 된다.

 

사랑하는 마음이 크다 생각할수록 
상처와 아픔도 커진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은 아니다.
사랑한다면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ㅡ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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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10)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언젠가 잘 아는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정형외과 의사였다. 
그가 뜻밖의 말을 했다.

 

“목사님, 평생 의사 생활을 했지만 갈수록 모르겠어요. 어떤 경우는 분명히 낫는다 확신하고 수술을 했는데 낫지 않는 경우도 있고, 어떤 경우는 도무지 자신이 없어 흉내만 냈는데 깨끗하게 낫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지요.”

갈수록 모르겠다고, 의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일까, 이야기를 듣고서는 선생님께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선생님께 더 신뢰가 갑니다.”

 

진심이었다.

우리가 신뢰하는 것은 
누군가 가지고 있는 실력이나 능력만이 아니다.
더욱 신뢰하는 것이 있다. 
진실함이다. 
겸손함에서 비롯된.

 

ㅡ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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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11)



나는 춤을 모른다.
춤을 춰 본 적도 없고, 따로 관심을 가져본 적도 없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어쩌면 나는 춤과 술을 모르는 만큼 생의 즐거움과 거리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춤을 모르는 몸치라는 것은 몸만 굳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굳었다는 것,
몸도 마음도 유연하지 못하고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나에게 춤의 의미를 일러준 이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이다.
<그리스인 조르바>였다.


죽은 아들을 백사장에 뉘이고 그 앞에서 춤을 추는 조르바에게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다.
그 때 조르바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내가 춤을 추지 않았다면, 나는 정말로 미쳤을 것이다.”


그것이 기쁨이든, 슬픔이든, 마음속 응어리든, 희열이든, 분노든, 사랑이든,
언젠가 한 번은 마음 가는대로 춤을 춰 보고 싶다.


달빛 아래 혼자서.
맨발로.


춤은 눈물로,

눈물은 통곡으로,

통곡은 웃음으로,

웃음은 맑은 숨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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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8)

 

쉼표


“나는 음표는 몰라도 쉼표 하나는 다른 연주자들보다 잘 연주할 수 있다.”


이성복 시인의 책을 읽다가 만난 한 구절,

<피아노 이야기>라는 책에 나오는 말이라 한다.


문득 그렇게 말한 연주자의 연주가 듣고 싶다.
음표보다도 쉼표의 연주에 더욱 귀를 기울이면서.

말과 생각을 빈틈없이 채우는 사람이 아니라
여백을 말하고 여백을 남기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행간을 읽을 줄 알고 행간을 남기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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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5)

 

시(詩)란


어려워서, 가벼워서, 이래저래 시가 시시해진 세상,
시를 읽거나 쓴다는 것은

생각의 난해함이나 미숙함을 가리는 것이 아니다.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무례한 비약이나 과장이나 생략이 아니다.
버릴 걸 버려 마침내 본질에 닿는 것이다.


‘마침내’는 ‘단번에’이기도 하다.
게으름이나 주저함과는 거리가 있다.


‘詩’란 ‘언어(言)의 사원(寺)’,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을 그렇게 말하는 것,
침묵과도 말없이 마음이 통해

마침내 세상의 모든 것을 사랑으로 대면하는 것이다.
눈물로 얼싸안는 것이다.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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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4)

 

만절필동(萬折必東)


새로 부임한 정릉교회의 홈페이지가 페이스 북과 연동이 된다는 말에 페이스 북을 시작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반응을 모르고 지나가는 것은 결례일 수 있겠다 싶었다.


안 하던 것을 시작하고 나니 당황스러운 일들이 있다. 그 중 당황스러운 것은 설교 영상이 공개되는 것이다. 아무리 그동안의 관례라지만 설교를 하고나면 금방 페이스 북에 올라간다. 그것도 1부, 2부, 오후예배가 즉시.


지금까지 목회를 하며 설교를 교회 홈페이지에 올리자는 의견들을 고집 부려 피해왔다. 그러다가 큰 양보를 하여 받아들인 것이 음성만 올리는 것이었다. 영상이든 음성이든 설교를 올리는 것은 말씀의 확장이라기보다는 말씀을 가볍게 하는 일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결국 말씀을 가볍게 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이제는 설교를 하자마자 페이스 북에 올라간다. 아찔한 생각이 들어 1,2부 중 하나만 올리라고 했지만, 어서 다른 변화를 찾아보려고 한다.

 

 

이왕 페이스 북을 시작한다면 하루에 글 하나쯤을 올리자고 마음을 정했는데, 글을 올리고 나면 사람들의 반응이 이어진다. ‘좋아요’를 누르는 것부터, 댓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반응을 보게 된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누군가의 반응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싶어 짧은 댓글을 단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참 묘하여 사람들의 반응에 마음이 간다. 내가 올린 내용에 얼마나 반응을 보이는지, 누가 어떤 댓글을 다는지가 궁금해진다. 많은 반응을 보이면 기분이 좋아지고, 신뢰하는 이가 댓글을 달면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다른 이들의 반응을 통해 내 삶의 무게나 내 존재의 영향력을 가늠하려고 한다. 이런! 마음과 감정이 타인 의존적이 되어가다니.

 

강은 연연히 흐른다. 누가 박수를 친다고 더 빨리 가거나, 바라보는 이 없다고 주눅이 들지 않는다. 골짝과 골짝 사이를 제 걸음으로 간다. 모두가 잠든 어둠 속에서도 달빛이나 별빛을 품고는 여전히 자기 걸음이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이라는 말이 있다. 강은 만 번을 꺾여도 바다에 이른다는 뜻이다. 내 걸음으로 가야 한다. 주변의 반응에 민감해지는 것은 결국 길을 잃는 것과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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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3)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김영광 시인이 낸 산문집 제목이다.
제목이 인상적이어서 설교 시간에 소개한 적이 있다.
두 가지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지구에 00하러 오지 않았다,
나는 지구에 00하러 왔다.

 

제목이 마음에 닿았을까,

몇 몇 교우들이 책 제목 이야기를 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말이다.

 

마음에 남는 것은 따로 있다.
때로는 의외의 것이 남기도 한다.

 

-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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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생각(2)

 

겨울 나그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모르지 않는다.

이번 겨울을 지나면서도 몇 번인가 노래를 들었다.

들을 때마다 음습하고 을씨년스러운 독일의 겨울이 펼쳐진다.
하지만 몰랐다.

겨울 나그네가 한 시인의 시에 붙인 곡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 시인이 빌헬름 뮐러라는 건 잊고 있었다.

전혀 몰랐던 것도 있었다.

겨울 나그네가 ‘낯선 이로 왔다가 낯선 이로 간다네.’로 시작된다는 것,

그리고 다음과 같이 끝난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저편 마을 한 구석에 거리의 악사가 서 있네.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손풍금을 빙빙 돌리네.
맨발로 얼음 위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흔들지만
그의 조그만 접시는 언제나 텅 비어 있어.
아무도 들어줄 이 없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네.
개들만 그 늙은이 주위를 빙빙 돌며 으르렁거리고 있네.
그래도 그는 모든 것을 되는 대로 내버려두고 손풍금을 돌린다네.
그의 악기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네.’

 

 

거리의 늙은 악사가 눈에 선하다.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손풍금을 빙빙 돌리는,

맨발로 얼음 위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흔드는,

개들만 주위를 빙빙 돌며 으르렁거릴 뿐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악사 앞에 놓인 조그만 접시는 언제나 텅 비어 있는,

그런데도 손풍금을 절대 멈추지 않는…

누구의 노래인 줄도 모르고 듣고 부르는 노래가 얼마나 많을까?

 

어떤 노래인 줄도 모르고 흥얼거리는 노래는 얼마나 많을까?

어떻게 시작되는 줄도 모르고 시작하는 걸음과,

어디서 마치는 줄도 모르고 마치는 길은 얼마나 많을까?

헤아리기 힘든 누군가의 슬픔과 아픔을

거리의 풍경처럼 여기며 그냥 지나쳐 가는 경우는.  

그가 누구라 할지라도 얼어붙은 손가락으로

손풍금을 빙빙 돌리는 겨울 나그네 곁은 이렇게 지나가는 것이 맞겠다.

겨울 나그네의 마지막 노래처럼.


‘참으로 이상한 노인이여, 내가 당신과 함께 가드릴까요?
나의 노래에 맞춰 손풍금을 켜주지 않을래요?’

 

_ 한희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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