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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숙의 글밭490

플라스틱 그릇과 찻잎 찌꺼기 엄마가 일하러 나간 후 배고픈 아이들만 있는 빈 집으로 짜장면, 짬뽕, 마라탕, 베트남 쌀국수, 떡볶이 국물이 이따끔 지구를 돌고 돌아가며 다국적으로 배달이 된다 늦은 밤 높이 뜬 달을 보며 집으로 돌아오면 한 끼니용 플라스틱 그릇들이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공장에서 기름으로 만든 일회용 플라스틱 그릇에 먹다가 남긴 배달음식들도 죄다 기름투성이들 주방세제를 열 번을 뭍혀가며 제 아무리 문질러도 기름과 기름은 서로 엉겨붙어 미끌미끌 나를 놀린다 그냥 대충 헹구어 재활용 폐기물로 버릴까 하다가 천 년의 세월이 흘러도 썩지 않는다는 플라스틱이라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나 하나라도 하나의 쓰레기라도 줄이자는 한 생각을 씨앗처럼 숨군다 주방세제를 뭍히고 또 뭍히고 씻겨내고 또 씻겨내어도 미끌미끌 저 혼자서.. 2021. 6. 19.
기말고사가 끝나면 <조국의 시간>을 읽기로 했다 요즘은 학생들 기말고사 기간이라고 한다. 학교에서도 코로나 안전 수칙을 잘 지키느라 등교하는 날이 많지 않다. 고1이 된 딸아이가 가끔 침대에 모로 누워서 귀로만 듣는 온라인 수업이 절반이래도, 돌아오는 시험날은 나가는 월세와 월급처럼 어김이 없다. 그 옛날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버스에서 내리면, 혼자서 집으로 걸어가는 밤길이 어둑했다. 동대신동 영주터널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멈추어 서면, 언제나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먼저 살피다가, 머리 위에는 달이 혼자서도 밝고, 바로 옆으로 우뚝 보이는 혜광고등학교 창문들마다 그 늦은 시간까지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거기서 그대로 북녘 하늘로 가로선을 그으면, 저 멀리 대청공원 6·25충혼탑 꼭대기에 작은 불빛들이 마치 작은 별빛 같았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 .. 2021. 6. 14.
한국은 섬나라가 아닌, 대륙과 하늘의 나라다 해외 여행이라 하면 비행기가 먼저 떠오른다. 지금은 코로나 비상시기로 출입국이 엄격한 시절을 보내고 있지만, 생각해 보면 비행기를 타고 가는 하늘길이 아니고선, 지구상의 그 어느 다른 나라든 갈 수 없는, 땅의 길이 막힌 처지가 현재 한국의 입장인 셈이다. 세삼스레 이런 현실을 떠올리다 보면 가슴 한 구석이 갑갑해진다. 마치 지구촌의 대륙으로부터 한국이라는 나라가 뚝 떨어져 섬처럼 고립된 것 같아서 스스로의 입지를 돌아보게 된다. 마치 일본처럼 섬나라가 된 한국은 아닌지. 그래서 국민들의 정서까지도 섬나라의 폐쇄성을 은연중에 닮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염려를 내려놓지 못할 때가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구한말 한국이 일제강점기의 수탈을 겪으며, 광복 직후 열강들이 이 땅에서 일으킨 6.. 2021. 6. 2.
홀씨랑 나랑 바람이랑 입바람에 날아갈까 손바람에 흩어질까 홀씨랑 나랑 바람이랑 셋이서 잠잠히 있었지 몸으로 숨 한 점 잇는 일이 허공으로 손길 한 줄 긋는 일이 땅으로 한 발짝 옮기는 일이 순간을 죽었다가 영원을 사는 바람의 길이라며 홀씨랑 나랑 바람이랑 셋이서 숨 한 점 나누었지 하지만 한 점도 모르는 이야기 몰라도 훌훌 좋은 숨은 바람의 이야기 2021. 5. 31.
윤동주 시인의 하늘, 그 원맥을 <나철 평전>에서 찾았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인, 일본인도 사랑하는 세계 평화의 시인, 내가 가장 사랑하는 하늘이 아름다운 시인, 그런 윤동주 시인의 하늘이 나는 늘 궁금했었다. 그 하늘은 어디에서 왔을까?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학술서와 문학서에선 어린 시절 윤동주 시인이 살았던 마을인 북간도, 그곳 마을에 살던 이웃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라서 그렇다고들 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윤동주 시인의 하늘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 펼쳐지는 하늘은 분명히 크고 밝은 배달의 하늘이다. 시에서 크고 밝은 한의 정서가 가장 잘 드러나는 시인이 윤동주인 셈이다. 나는 늘 그의 하늘이 궁금했었다. 그 하늘의 원맥이 궁금했었다. 그동안 윤동주 시인과 관련한 대부분의 책들 그 어디에서도 안타깝지만 그 원맥을.. 2021. 5. 29.
펼치다 펼치다 책의 양 날개를 두 손의 도움으로 책장들이 하얗게 날갯짓을 하노라면 살아서 펄떡이는 책의 심장으로 고요히 기도의 두 손을 모은다 느리게 때론 날아서 글숲을 노닐다가 눈길이 머무는 길목에서 멈칫 맴돌다가 머뭇거리다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본다 내 안으로 펼쳐지는 무한의 허공을 가슴으로 불어오는 자유의 바람이 감당이 안 되거든 날개를 접으며 도로 내려놓는다 날개를 접은 책 책상 위에 누워 있는 책이지만 아무리 내려놓을 만한 땅 한 켠 없더래도 나무로 살을 빚은 종이책 위에는 무심코 핸드폰을 얹지 않으려 다짐한다 내게 남은 마지막 한 점의 숨까지 책과 자연에 대하여 지키는 한 점의 의리로 하지만 내게 있어 책은 다 책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이란 돈 냄새가 나지 않는 책 탐진치의 냄새가 나지 않는 책을 .. 2021. 5. 27.
박모종 좋아요 참 좋아요 너무 좋아요 우리집 마당 돌담 밑에는 엄니가 딸을 위하여 어렵사리 구해오신 올해만 세 번째로 여차저차 이렇게 심어 놓으신 어린 박모종이 살고 있어요 정말 좋아요 비가 오는 날도 좋아요 해가 쨍한 날도 좋아요 아무리 외롭고 쓸쓸한 저녁답이라도 하얗고 순한 박꽃은 새벽답까지 어둠과 나란히 밤길을 걸어가는 다정한 길벗이 되어주지요 초여름부터 둥근 박이 보름달을 닮아 익어가는 늦가을까지 하루도 어김없이 박꽃은 하얗고 순한 얼벗이 되어주지요 고마워요 참 고마워요 너무 고마워요 2021. 5. 26.
한 음의 빗소리 구름이 운을 띄우면 하늘이 땅으로 빗줄기를 길게 드리우고 무심히 지나던 바람이 느리게 현을 켠다 낮아진 빗소리는 풀잎들의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로 작아진 빗소리는 거룩한 이마에 닿는 세례의 손길로 땅에 엎드려 울음 우는 모든 생명들을 어르고 달래는 공평한 선율로 낮게 흐르는 한 음의 빗소리에 기대어 가슴으로 깊고 긴 침묵이 흐른다 2021. 5. 25.
터치폰과 지평 어느 날 보니 검지손가락이 아렸다 왜 그런지 몇 날 며칠 몸속을 샅샅히 돌며 역학조사를 해보니 통증의 원인은 터치폰 늘상 검지손가락만 쓴 것이다 안 되겠다 싶어 무딘 가운뎃손가락과 약지를 조심스레 써 보았다 이처럼 새로운 손가락을 쓰는 일은 몸이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넓혀 가는 일 그래도 새끼손가락은 먼 곳 아직은 미지의 땅 그러는 동안 가장 튼튼한 엄지손가락은 뭘 하고 있는지 문득 보았더니 언제나 빈 공간에서 홀로 하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땅에는 머리 둘 곳 없어 깊고 푸른 하늘로 둔 꽃처럼 2021. 5.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