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 사회'34

분노사회와 세월호 참사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6) 분노사회와 세월호 참사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현대인의 삶에 별명붙이기를 즐겨하기 시작했다. ‘위기사회’, ‘단속사회’, ‘잉여사회’, ‘갈등사회’, ‘피로사회’, ‘투명사회’ 등등. 그러다 최근엔 ‘분노사회’란 레테르까지 등장했다. 하기야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에 기초한 많은 사건들이 우리 사회를 그렇게 부르기에 조금도 주저치 않게 할 정도이긴 하다. 원한 관계를 따져보기 곤란한 우발적 사고에 불특정 다수를 향한 울분의 폭력행위 등이 우리 일상의 한 부분이 된지도 꾀되지 않던가. 이런 점에서 젊은 작가 정지우의 《분노사회: 현대 사회의 감정에 관한 철학에세이》는 매우 시의적절한 인문적 훈수라 하겠다. 본디 분노란 물리적 대상에 대한 행위 주체자의 생물학적 반응이다.. 2015. 4. 14.
현세종교 내세종교?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5) 현세종교 내세종교? 시마조노 스스무(島薗進)라는 분이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종교학자이며 오래도록 도쿄대학 종교학과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지난 2013년 은퇴하여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으며, 죠치대학(上智大学) 신학부의 특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얼마 전 그분이 펴낸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현대 일본의 종교현황, 특히 여러 신종교의 발흥을 중심으로 그들이 가지는 종교사적 의의를 개념적으로 정리하고 설명한 책이었다. 이 책은 『現代救済宗教論』으로 일본에서는 1992년에 출간되었고, 우리말로는 《현대 일본 종교문화의 이해》라는 제목으로 1997년에 번역되었다. 스스무 선생에 대해서는 독일 유학시절부터 박사 과정 동료였던 순이찌라는 도쿄대 출신 친구로부터 쉼 없이 들어왔기에 .. 2015. 4. 8.
한국 신학계에 ‘첫 새벽’(원효)은 가능하겠는가?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4) 한국 신학계에 ‘첫 새벽’(원효)은 가능하겠는가? 지난 글에서 한국 신학계에 원효란 인물이 배출될 수 있을까를 물었다. 그렇다면 이쯤에선 원효(617~686)란 인물은 어떠했는가를 살피는 것이 순서일 듯싶다. 그러나 예서 다룰 것은 원효의 전부가 아니라 극히 작은 부분일 따름이다. ‘한 마음’(一心)으로 대표되는 그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을 비롯하여 107종 231권에 이르는 그의 방대한 저작물(지금 남아있는 그의 작품은 대략 20여 종에 머물며, 그중 대표적인 것이 (大乘起信論疏)와 (金剛三昧經論)이다.)을 짧은 지면 안에 담아내기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설사 여건이 된다하더라도 그 일을 할 만한 깜냥이 내게는 없다. 따라서 여기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현실성 있.. 2015. 3. 29.
한국 신학계의 원효는 가능할까?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3) 한국 신학계의 원효는 가능할까? 이 땅에 그리스도교가 발을 들인지 개신교는 130년, 가톨릭은 그보다 백여 년이 앞선 230년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알려진 신학이나 학자가 한국의 그리스도교계에서 나왔다는 소식은 좀체 들려오지 않는다. 물론 그나마 서남동(1918~1984), 안병무(1922~1996) 등으로 대표되는 민중신학이 한국적 신학의 한 모습으로 서구에 많이 소개는 되어있다. 하지만 서구신학자들의 냉철한 평가는 민중신학 역시 남미에서 태동한 해방신학의 한 지류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중신학자의 글과 언어 속에 그들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비약논리를 찾아낼 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 까지 한다. 물론 서구인들이야 .. 2015. 3. 23.
종교를 보는 다르나 같은 눈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2) 종교를 보는 다르나 같은 눈 지극히 개인적인 종교, 그리고 그를 보는 지극히 집단적인 시선들 이제 이 서슬 퍼런 ‘이념의 뭉치’는 개신교에 대한 비판에도 고스란히 이용되고 있다. 각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가져온 사회적 결과에 책임을 진다. 그리고 그 책임의 여부와 범위는 사회가 정한 법률과 관습에 따라 결정되면 그뿐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개인이 각 행위 결과에 대한 책임을 법률에 따라 지면 되는 것이다. 어느 종교 어느 단체이든 언제나 그렇듯이 왜곡된 일탈 현상은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생기게 되어있고, 그리고 거기에는 구조적이고 또 개인적 성향의 이유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일어난 문제의 요인을 명쾌히 분석하고 또 비난의 방향.. 2015. 3. 15.
‘집단주의’라는 광기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 사회(11) ‘집단주의’라는 광기 - 종교를 보는 다르나 같은 눈 - 한 참 전의 일이다. 그때 우리는 98년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선이 있기 전 96년 아시안컵에서 한국의 국가대표팀은 이란에게 2:6라는 치욕스런 패배를 당했다. 그때 국가대표팀을 이끌던 이는 84년 청소년 세계 대회 4강의 위업으로 이름 높은 박종환 감독이었다. 아시안컵이 끝난 뒤 박 감독은 사임했고, 그의 뒤를 이어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전설적인 성공 신화를 만들고 돌아온 차범근 씨가 새로운 사령관이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는 40대 중반쯤 되었다.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는 약간 이른 감도 있었지만, 위기에 빠진 한국 축구계를 구할 적임자로서 많은 이들은 차 감독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 2015. 3. 8.
한국교회와 샤머니즘(2)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10) 한국교회와 샤머니즘(2) 지금까지 좀 지루하게 무당을 중심으로 그들이 행하는 샤머니즘이라는 종교 행위의 핵심 구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자, 그렇다면 지금은 우리의 본디 주제였던 한국교회와 샤머니즘과의 관계에 대해서 되짚어 볼 시간이다. 특히 부정적 의미로 종종 언급되던 한국교회의 샤머니즘화에 대하여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보자. 여기서 우리는 이미 기복이라는 열쇠말 하나를 찾아내고 있었다. “한국교회의 기복적 특징은 한국인들의 종교적 심성을 이루는 샤머니즘으로부터 연원한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편하게 내리는 결론일 것이다. 샤머니즘이 가지는 기복행위가 교회에 영향을 주어서 교회의 본질을 훼손해 버렸다는 어떻게 보면 면피성 진단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 2015. 3. 1.
한국교회와 샤머니즘(1)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사회(9) 한국교회와 샤머니즘(1) 한국교회와 샤머니즘은 여러 모로 자주 연결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누구의 분석, 혹은 진단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교회의 샤머니즘화’는 거의 정설처럼 되었고 또 마치 그것이 지금 한국교회에서 파생된 많은 문제의 시발점인양 ‘이해’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판단과 분석 뒤편에는 ‘우리’(한국 교회)는 본디 좋은 것인데 ‘나쁜 저것’(샤머니즘)이 은연 중 들어와 우리의 반듯하고 깨끗함을 흐려버리고 오염시켰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자리한다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한국교회가 샤머니즘을 닮았다고 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떤 기준과 근거로 사람들은 편안한 자세를 하고 한국교회는 샤머니즘에 오염되었다고 선언하듯이 판단하고 있는 것일까? 적지 않.. 2015. 2. 22.
통계로 보는 좋은 종교, 나쁜 종교? 이길용의 종교로 읽는 한국 사회(8) 통계로 보는 좋은 종교, 나쁜 종교? 자, 보통 사람들의 마음속에 매겨지던 좋은 종교, 나쁜 종교를 알아보았으니 이제 현실에서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종교, 나쁜 종교에 대해 생각해 볼 차례이다. 그런데 실상 종교를 가지고 ‘좋다’ ‘나쁘다’라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판단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이긴 하다. 그리고 사실 어떤 종교이든 그 시작은 고결하고, 지향하는 꿈과 이상 역시 공동선이지 않은가. 따라서 엄밀한 의미로 좋은 종교, 나쁜 종교는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의 사회적 기여라는 질적 양적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조금 엄밀한 말로 바꾸어 꾸며보자면, 이는 우리 생활 세계에서 평판이 좋은 종교, 나쁜 종교 정도로 할 수 있을 것이.. 2015. 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