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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두런두런'39

어느 날의 기도 어느 날의 기도 말씀 준비를 마치고 준비한 말씀 앞에 앉으면 언제라도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천천히 아득히 말이지요. -죄송합니다, 감히 말씀의 준비를 ‘마쳤다’ 하다니요! 그래도 설렘이 아주 없지는 않아 마치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식구를 기다리는 엄마의 심정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뿌듯한 기다림이지요. 그게 전부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많은 순간 부실함이 마음에 걸립니다. 이걸 먹고 탈이 나진 않을까,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것 아닐까, 노심초사 마음이 무거워지곤 합니다. 일러스트/고은비 주님, 주님의 말씀 앞에 무얼 더 보태고 뺄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정성으로 준비하게 하소서. 어느 해 저무는 저녁 지나가다 우연히 들른 작고 외진 마을 허기를 달래려 찾은 허름한 식당에서 생각지 못한 정갈한 음식 대하.. 2015. 6. 19.
더 기다리지 못한 죄 한희철의 두런두런(11) 더 기다리지 못한 죄 나직한 건 할머니 목소리만이 아니었다. 가만히 손을 들 때부터 그랬다. 아주 먼 곳, 아득히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된 듯 조심스레 손을 드는 할머니의 모습은 눈에 띄게 고요했다.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 할머니의 삶이 그 작은 몸짓 하나에 오롯이 담긴 듯도 싶었다. 여러 해 전 춘천노인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일제며 난리며 보릿고개며 유난스러운 생의 고개를 숱하게 넘어오신 연로하신 분들, 그것이 아픔이든 기쁨이든 지나온 세월은 보석과 같은 시간이니 쓸모없다 여기시지 말고 내 이야기를 시작해 보시라고, 학생으로 참석하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이야기를 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언제였는지, 가장 큰 아픔으로 남아 있.. 2015. 6. 11.
민들레 한희철의 두런두런(10) 민들레 - 동화 - “얘들아, 오늘은 엄마가 너희들에게 중요한 얘기를 들려줄게.” 엄마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낮고 차분합니다. “뭔데요, 엄마?” 엄마 가슴에 나란히 박혀 재잘거리던 씨앗들이 엄마 말에 모두들 조용해졌습니다. “머잖아 너희들은 엄마 곁을 떠나야 해. 제각각 말이야.”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고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씨앗들이 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래. 너희들은 떠나야 해. 떠날 때가 되었어. 보아라. 너희 몸은 어느새 까맣게 익었고, 너희들의 몸엔 하얀 날개가 돋았잖니?”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는 말에 모두들 놀란 얼굴이 되었습니다. “싫어요, 엄마. 우린 언제나 엄마랑 함께 살 거예요.” “우리들끼리도 헤어져야 한다니 너무 무서워요.” “엄마 곁을 떠나.. 2015. 5. 28.
글자 탓 한희철의 두런두런(9) 글자 탓 요 며칠은 예배당 주위의 풀 뽑는 일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예배당 마당 구석구석에 풀들이 제법 자라 올랐다. 잡초는 밤에도 잠을 안 잔다더니, 잠깐 잊고 있으면 어느새 욱 자라 있고는 한다. 저녁나절 괭이로 풀을 긁고 있는데 예배당 옆집에 사는 승혜가 책 하나를 끼고서 마당으로 들어섰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한 예쁜 여자 아이다. 옆구리에 끼고 온 책을 보니 이다. 다음날 배울 내용을 이해할 때까지 읽어가는 것이 선생님이 내준 숙제라고 했다. 지난번 받아쓰기 때 좋은 성적이 아니었던 승혜에겐 바른 생활 과목이 썩 내키는 과목은 아닌 듯싶었다. 승혜가 한 자 한 자 손으로 짚어가며 책을 읽는다. 그러나 곳곳에서 막힌다. 어둘 녘까지 승혜는 내가 풀을 뽑는 곳을 따라다니.. 2015. 5. 14.
창날 위를 맨발로 걷듯 한희철의 두런두런(8) 창날 위를 맨발로 걷듯 아랫마을 단강리에 살고 있는 분 중에 한효석 씨가 있다. 부론을 나갈 때면 자주 만나게 되는데, 만나면 꼭 차를 사신다. 한문은 물론 동양사상이나 동양종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도 해당되는 구절이 있으면 원문을 줄줄 외우신다. 그 모든 것을 독학으로 이뤘다니 놀랍기만 하다. 얼마 전 원주를 다녀오며 흥호리에서 버스를 같이 타게 되었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 분은 ‘실천’이란 말의 뜻을 설명해 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거나 믿고는 있는데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것 같다며 아쉬워했다. ‘실’(實)은 ‘갓머리’와 ‘어미 모’(母)와 ‘조개 패’(貝)가 합해진 말이라 했다. 갓머리는 ‘하늘’이라는 뜻을 담고 있고,.. 2015. 4. 28.
한 사람을 살리면 모두를 살린다 한희철의 두런두런(9) 한 사람을 살리면 모두를 살린다 독일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이 전도사님을 오랜만에 만나게 된 것은 목사 안수례 때문이었습니다. 개신교의 한 교단인 감리교에서는 해마다 4월경이 되면 지역별로 연회를 여는데, 연회 일정 중 중요한 것이 목사 안수식입니다. 이 전도사님은 결코 쉽지 않았던 긴 과정을 마친 뒤 목사 안수를 받으며 제게 안수보좌를 청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고 첫 번째로 맞이한 주일, 저는 이 목사님께 제가 섬기는 교회에 와서 설교와 축도를 해 줄 것을 부탁했지요. 마침 세월호 사고가 난지 1년이 되는 주일, 이 목사님은 설교를 시작하며 세월호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해 독일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세월호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되었는데, 세월호에 대한 소식은 독일에서 있.. 2015. 4. 22.
자유시장에서 생각하는 자유 한희철의 두런두런(8) 자유시장에서 생각하는 자유 원주 시내 한복판에는 자유시장이 있습니다. 이른바 ‘A도로’라 불렸던 중앙로 한복판, 자유아파트 아래층에 자리를 잡고 있는 꽤 넓은 시장입니다. 단강에서 목회를 하며 이따금씩 자유시장을 찾았던 것은 시장 안에서 한 지인이 레코드가게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음악을, 음악보다는 사람을, 사람보다는 만남을 좋아하는, 우리 젊은 목회자들이 편하게 ‘아저씨’라 부르는 분이었습니다. 토요일이면 인쇄소에 주보 원고를 맡기고 주보를 인쇄하는 동안 아저씨 가게에 들러 차 한 잔을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지요. 자연스럽게 그 가게는 젊은 목회자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그날도 레코드 가게로 가기 위해 막 자유시장 길로 접어들었는데,.. 2015. 4. 17.
세월의 강 한희철의 두런두런(7) 세월의 강 겨울비 내리는 강가는 유난히 추웠다. 그만큼의 추위라면 눈이 맞았을 텐데도 내리는 건 비였다. 내리는 찬비야 우산으로 가렸지만 강물 거슬러 불어대는 칼날 바람은 사정없이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가장자리 얼어가는 강물이 톱날 같은 물살을 일으키며 거꾸로 밀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리며 강 건너 묶여 있는 배를 기다렸지만 사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해 가을, 10여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치화 씨의 지난 시간을 알기 위해 교회의 젊은 집사님과 마을 이장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쪽 부론은 강원도, 겨울비 속 풍경화처럼 자리를 잡은 강 건너편은 충청북도, 치화 씨의 먼 친척이 살고 있다는 곳이다. 기구한 사연 속 열세 살 땐가 아버지의 죽음을 이유로 가족들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 2015. 4. 6.
아 도 한희철의 두런두런(7) 아 도 - 동화 - 용소골에서 아도를 모르면 한마디로 간첩입니다. 이장님을 몰라보고, 용소골에서 태어나 용소골을 떠나지 않고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몰라볼지는 몰라도, 아도를 모르는 사람은 동네에 없습니다. 그건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네 아이들 얼굴과 이름을 다는 몰라도 아도를 모르진 않습니다. 동네를 드나드는 버스 기사 아저씨들도 아도를 알 정도입니다. 아도는 가끔씩 먼 길을 걸어 동네 바깥으로 나갈 때가 있는데, 저녁 무렵 아도가 터덜터덜 걸어올 때면 버스 기사 아저씨들은 뒷모습만 보고도 아도인 줄 알고 버스를 세워 아도를 태워주곤 했으니까요. 물론 돈을 받지 않고 말이지요. 아도는 한 마디로 바보입니다. 아도라는 별명이 언제부터 왜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아도라는 별명을 .. 2015. 3.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