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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7

산과 강 어느 날 산이 강에게 말했다. “네가 부럽구나, 늘 살아 움직이는 게.” 그러자 강이 산에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부러워. 한 자리 변함없는 게.” 1988년 2021. 5. 25.
눈물겨움 이따금씩, 뜻도 없이 눈물겨울 때가 있다. 서울 종로서적 앞, 일찍 내려진 셔터에 몸을 기대고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오가는 사람들, 정말 많은 사람들, 멍하니 그들 바라보다가 불쑥 시야가 흐렸었다. 언젠가의 졸업식. 축하할 사람 만나지도 못한 채 한쪽 구석 햇볕 쬐며 잔디밭에 앉아 사람들 구경하다가 그때도 이유 없이 눈물이 솟았다. 저녁 어스름 코트 깃 세우고 서둘러 귀가하다가 문득 바라본 2층 양옥집. 불 켜진 방 한 개 없었고 빨래만 2층에서 펄럭이고. 그때도 그랬다. 한참을 서 있었다. 얼마 전 수원을 다녀오며 차창 밖, 미친 듯 휘날리는 춘설을 보면서도 ‘살아야지, 살아야지’ 확 치민 뜨거움에 또 눈이 젖었었다. 무심히 창문만 닦았다. 동부연회 마지막 날. 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목사.. 2021. 5. 24.
낙태와 나태 “우리가 낙태 되지 않게 지켜 주옵소서.” 안갑순 속장님은 당신 기도 차례가 되면 한 주를 어렵게 보냅니다. 희미해진 기억력, 순간순간 끊어지는 생각들, 갈수록 기도의 책임이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똑똑 드물게 떨어지는 물을 받아 병 하나 채우듯 새벽녘 깨어 그나마 정신이 맑을 때 한 두 줄 기도문을 적고, 그 한 주 분의 기도를 모아 제단에 섭니다. 속장님의 기도 속에 자주 들어가는 내용이 ‘우리를 낙태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낙태는 나태의 잘못된 표기일 것입니다. 쓰기도 그렇게 쓰고, 읽기도 그렇게 읽지만 속장님이 드리는 기도의 뜻은 ‘나태’일 것입니다. 그런 단어의 혼돈쯤이야 너그러우신 하나님께서 바로 잡아 들으시겠지요. 나태를 낙태로 써서 읽는 속장님의 기도를 들을 때마다 사실 가슴이 찡.. 2021. 5. 23.
돌아보니 새벽 세 시, 환갑을 맞은 변학수 씨의 축하예배가 새벽 3시로 정해졌습니다. 일단 잔치가 시작되면 손님들이 끊이질 않는지라 예배드릴 시간이 마땅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는 지집사님이 아예 시간을 새벽으로 잡았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부터 드리고 시작하겠다는 믿음에서였습니다. 너무 이른 시간이긴 했지만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그 새벽에 우리는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환갑을 맞기까지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렸습니다. 축하의 말을 하던 집안 어른이 나무장사 얘길 했습니다. 변학수 씨가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왔던 방책은 나무장사였습니다. 허리가 휘도록 나뭇단을 내다 팔아 그나마 어려운 생계를 이어왔던 것입니다. 일제에, 6.25에, 보릿고개에 모질고 험한 세월 살아왔지만 .. 2021. 5. 22.
새벽 응급실 주보를 만들고 늦은 밤 잠이 들었는데 얼마나 잤을까, 전화벨 소리가 울려 놀라 깼다. 부인의 상태가 심상치 않으니 급히 병원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한 교우의 전화였다. 확 잠 달아난 눈으로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이럴 땐 차가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비가 쏟아져 내리고 안개가 자욱한 한 새벽. 한치 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손으로 숲속 나무를 헤치듯 어둠과 안개 속을 달려야 했다. 응급실은 그 시간에도 번잡했다. 온갖 환자들의 고통스런 모습과 피곤 가득한 얼굴이면서도 긴박하게 돌아가는 의료진, 수속 밟으랴 간호하랴 분주한 환자의 가족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넓은 응급실 병실과 복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다. 약간의 응급처치가 있은 후 어느.. 2021. 5. 21.
마음까지 덥히려면 작실 속 속회예배를 드리고 내려오는 길, 오늘 하루 무엇 하셨느냐 김 천복 할머니께 여쭈니 지게 지고 나무를 했다 하신다. 75세, 연세도 연세려니와 허리가 굽으신 분이다. 나무를 사 놓긴 놨는데 사다 놓은 나무를 때자니 아깝기도 하고 너무 쉬 때는 것도 같아 섞어 땔 나무를 했다는 것이었다. 원래, 사다 논 나무를 때는 것은 곶감 꼬치에서 곶감 빼 먹듯 쉬 없어지는 법이라고 이식근 성도님이 웃으며 할머닐 얘길 받는다. 작은 방바닥만이 아니라 당신의 외로운 마음까지 덥히려면 얼마만큼의 나무가 더 필요한 것일지. 1988년 2021. 5. 19.
단강초등학교 졸업식 반짝이는 보석상자, 영롱한 추억의 보고(寶庫), 끊임없이 되살아와서 따뜻하게 생(生)을 감싸는 손길, 편안한 귀향(歸鄕), 마르지 않는 웃음들, 싫증나지 않는 장난감이 가득한 방, 끈끈한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곳, 그게 어린 시절이지 싶다. 지난 2월 19일 단강초등학교 졸업식이 있었다. 작은 교실 한 칸에 졸업생과 재학생, 그리고 학부모들과 내빈들이 둘러앉았다. 뒤편으론 몇 사람이 서기도 했다. 사무실용 의자를 옆의 사람에게 양보를 하고 난 정말 오랜만에 작은 초등학교 때 앉아 공부하던 작은 의자에 앉았다. 연필로 혹은 칼로 금을 그어 짝과 경계를 정하고 나란히 앉아 공부했던 그 어린 시절. 내 자릴 넘었다고 때론 짝꿍과 다투기도 했지만 실은 모든 것이 넉넉했었지. 우리들 이름이 적히기도 했던 칠판도.. 2021. 5. 18.
‘하나님은 농부시라’ 작은 체구. 그러나 그는 결코 작아 보이지 않았다. 투박한 그의 말이 오히려 설득력을 가지고 들려 왔다. 그런 설득력의 근거는 그의 말이 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데 있었다. 분명 그의 말속에는 땀내와 흙내가 섞여 있었다. 농민 선교 대회, 오전 강사로 나온 를 쓴 윤기현 선생은 자신이 자라온 지난날들 속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전라도 그 특유의 사투리를 섞어가며 과장 없이 이야기 해 나갔다. 이야기를 들으려 참석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농한기를 맞은 농촌교회 교인들이었고 살아가며 직접 겪고 느꼈던 여러 가지 지적들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착하고 열심히 살면 부자 된다는, 어린 시절 그의 성실함을 지켜주었던 그 그럴듯한 교훈이 한갓 공허한 교훈일 뿐이었음을 깨.. 2021. 5. 17.
세월의 강 겨울비 내리는 강가는 유난히 추웠다. 그만큼의 추위라면 눈이 맞았을 텐데도 내리는 건 비였다. 내리는 찬비야 우산으로 가렸지만 강물 거슬러 불어대는 칼날 바람은 쉽게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가장자리 얼어가는 강물이 잡다한 물결을 일으키며 거꾸로 밀리고 있었다. 하늘은 잿빛으로 낮게 내려앉았다. 한참을 떨며 강 건너 묶여있는 배를 기다렸지만 뱃사공은 나타나지 않았다. 강 하나 두고 떠난 사연은 무엇일까. 지난해 가을 10여년 만에 고향을 찾은 유치화 청년의 지난 내력을 알기 위해 교회 젊은 집사님과 마을 청년과 치화 씨와 함께 길을 나선 것이다. 이쪽 부론은 강원도, 짧은 폭 강 하날 두고 겨울비 속 풍경화처럼 자리 잡은 저편은 충청북도. 유치화 청년의 먼 친척이 살고 있는 곳이다. 기구한 사연 속, 열세 .. 2021.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