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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7

봄(6) 숙제를 하다말고 책상에 엎으려 잠든 아이의 손에 파란 물이 들었습니다. 그리다 만 그림일기 속 푸른 잎 돋아나는 나무가 씩씩하게 서 있습니다. 나무도 푸르고 나무를 그리는 아이의 손도 푸르고 푸른 나무를 푸르게 바라보는 아이의 마음도 푸르고 아이는 오늘 밤 푸른 꿈을 꾸겠지요. 봄입니다. - (1996년) 2021. 3. 23.
자로 사랑을 재면 좋지 않은 일이 생긴다 지금이야 대부분 미터법을 사용하지만 이전에는 치(寸), 자(尺), 척(尺) 등 지금과는 다른 단위를 썼다. 거리를 재는 방법도 달라져서 요즘은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도 기계를 통해 대번 거리를 알아내곤 한다. 하지만 아무리 측정법이 좋아져도 잴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다. 하늘의 높이나 크기를 누가 잴 수 있을까. 바라볼 뿐 감히 잴 수는 없다. 그런데도 자기 손에 자 하나 들었다고 함부로 하늘을 재고 그 크기가 얼마라고 자신 있게 떠벌리는 종교인들이 더러 있으니 딱한 노릇이 아닐 수가 없다. 사람의 마음도 잴 수가 없다. 기쁨과 슬픔 등 사람의 마음을 무엇으로 잴 수가 있겠는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니다. 잴 수 없고, 재서는 안 되는 것 중에는 사.. 2021. 3. 22.
봄(5) 윗작실 죽마골을 오르다 만난 꽃댕이 할머니 강 건너 꽃댕이 마을에서 시집온 뒤론 아예 이름이 꽃댕이가 되었다. 귀가 잡숴 큰소리로 싸우듯 소릴 쳐야 알아듣지만 사실 그럴 일이 뭐있담 그냥 얼굴 보면 알지 낯빛 보면 맘 알지 말은 그담 아닌가 환한 웃음으로 지나쳤는데 저만치 가던 할머니 뭐라도 잊은 듯 급하게 달려와선 혼자 사는 당신 집 빈 마루에서 웬 까만 비닐봉지 전하신다. 무슨 설명 대신 손을 잡는데 화로에 잘 익은 고구마처럼 할머니 손이 따뜻하다. 돌아와 열어보니 냉이와 달래 들었다. 혼자 사는 외로움 사람에 대한 그리움 가득 들었다. 달래 향기가 싸하다. 봄이다. - (1996년) 2021. 3. 21.
봄(4) 산이 젖을 꺼내 젖을 준다. 두 손 벌겋도록 얼어온 자식 얼른 가슴 열어 젖가슴으로 녹이 듯 경운기 지나가는 거친 산비탈 겨우내 언살 녹여 어쩜 저리 고운 흙을 내는 걸까 못자리 할 때 되지 않았느냐고 못자리 하려면 고운 흙 필요하지 않냐며 젖을 꺼내 뽀얀 젖을 내는 봄이다. - (1996년) 2021. 3. 21.
봄(3) 인적 끊겨 길마저 끊겨가는 윗작실서 안골로 넘어가는 옛길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단옷날 그네가 걸려 어릴 적 시간으로 단숨에 들게 하던 근심과 걱정 그나마 털던 품 넓고 장한 느티나무 위로 바람과 볕 잔잔한 안골이 있는데 안골 한복판엔 감나무가 섰다. 가을이면 하늘을 다 덮을 만큼 감이 열리고 고추잠자리 붉은 노을 부러움을 살만큼 붉은 감이 눈부신 나무다. 어느 날 여든이 넘은 이한조 할아버지 지게 위에 달랑 낫 하나 걸고 불편한 걸음 지게막대 의지해 안골로 건너와선 지난겨울 둘러준 감나무 밑동 메밀짚을 걷어낸다. 얼지 말라고 장난꾸러기 손주 내복 입히듯 둘러준 메밀짚 짚을 걷어 바닥에 깔고 서너 번 나무 밑동 쓰다듬곤 돌아선다. 봄이다. - (1996년) 2021. 3. 20.
봄(2) 아랫작실 양짓말 세월을 잊고 선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이씨 문중 낡은 사당이 있고 사당으로 들어서는 왼쪽 편 살던 사람 떠나 쉽게 허물어진 마당 공터에 비닐하우스가 섰다. 하우스 안에선 고추 모들이 자란다. 막대 끝에 매단 둥근 바구니를 터뜨리려 오자미 던져대는 운동회날 아이들처럼 고만 고만한 고추 모들이 아우성을 친다. 저녁녘 병철 씨가 비닐을 덮는다. 아직은 쌀쌀한 밤기운 행여 밤새 고추 모가 얼까 한 켜 비닐을 덮고 그 위에 보온 덮개를 덮고 그래도 마음이 안 놓여 다시 한 번 널따란 보온 덮개를 덮는다. 이불 차 던지고 자는 어린자식 꼭 꼭 덮어주는 아비 손길처럼 고추모를 덮고 덮는 병철 씨 나무 등걸처럼 거친 병철 씨 손이 문득 따뜻하다. 고추 모들은 또 한 밤을 잘 잘 것이다. 봄이다. - (.. 2021. 3. 19.
봄(1) 윗작실 하루 두 차례 들어오는 버스 정류장 옆에 허름한 집이 한 채 있다. 여기저기 헐리고 주저앉은 다 쓰러져가는 토담집이다. 오래된 장작이 아무렇게나 쌓여있고 문풍지 숭숭 뚫린 문은 바람과 친해져 무사통과다. 거기 한 할머니가 산다. 기구한 사연으로 한동안 주민등록이 말소되어 세상에 근거 없는 삶을 살았다. 집이라기보다는 움막 그래도 겨울 내내 연기는 피어올랐다. 밖으로 반 집안으로 스미는 것 반 겨울잠을 자듯 또 한 번의 겨울을 할머닌 그렇게 났다. 며칠 전 할머니 집 앞마당 마당이래야 주먹만 한 마당에 파랗게 싹들이 돋았다. 마늘이었다. 짧고 좁은 가운데 길을 빼곤 빼곡하게 마늘 싹이 돋았다. 항아리 몇 개 놓인 뒤뜰 둑에 산수유 꽃망울이 터진다. 노랗게 터진다. 봄이다. - (1996년) 2021. 3. 18.
볏가리 어둠이 내리는 저녁 들판에 선 볏가리들이 가만 고개를 숙였다. 시커먼 어둠을 가슴으로 안은 것이 기도하는 수도자 형상이다. 베어진 뒤에도 그들은 묻고 있다. 제대로 익었는가 다 익었는가 - (1995년) 2021. 3. 17.
흐르는 강물처럼 강가에 나갔더니 불어오는 바람이 차다. 훤히 트인 강에서 물살을 거슬러 달려오는 바람이 맵고 거세다. 사진/김승범 거센 바람을 맞으며 강물이 거꾸로 밀린다. 어, 어, 어, 어, 뒤로 자빠진다. 그래도 물은 아래로 흐른다. 여전히 강물은 아래로 흘러간다. 잠시 표정이 바람에 밀릴 뿐 거센 바람을 기꺼이 달게 받으며 강은 여전히 아래로 흐른다. 결국은 우리도 그렇게 흘러야 할 터 우리에게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속을 속으로, 안으로, 아래로. - (1995년) 2021.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