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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철의 '두런두런'1157

꿈을 갖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마음속 좋은 생각을 품고, 품은 생각을 지키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다른 이의 눈치 살핌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의 꿈을 일궈내는 일은 그 꿈이 무엇이건 아름다운 일입니다. 꿈을 버리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일임에도 스스로 버리는 꿈은 어려운 일입니다. 오직 한 가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나머지 바람들을 사소한 것으로 돌리는 것, 어려운 만큼 고귀한 일입니다. 버리고 품는 꿈, 꿈이 필요한 때입니다. - (1992년) 2021. 2. 6.
산수유 단강의 한해는 산수유로 시작해 산수유로 끝이 납니다. 이른 봄, 단강의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꽃이 산수유입니다. 잎보다도 먼저 노란 꽃으로 피어나 봄이 왔음을 알립니다. 한 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가을철, 모든 이파리 떨어지고 나면 빨간 꽃처럼 남는 것이 또한 산수유입니다. 빨갛게 익어 가지마다 가득 매달린 산수유 열매는 열매라기 보다는 또 한 번의 꽃입니다. 콩 타작 마치고. 마늘 놓고 나면 한해 농사도 끝나고, 그러면 사람들은 산수유 열매를 털어 집안으로 들입니다. 멍석에 널어 말린 산수유는 긴긴 겨울, 마을사람들의 소일거리가 됩니다. 씨를 빼낸 산수유를 잘 말려두면 장사꾼이 들어와 근수를 달아 산수유를 사 갑니다. 해마다 값이 다르긴 하지만 한약재로 쓰이는 산수유는 그런 대로의 값이 있어 단강에선 .. 2021. 2. 5.
보물 미영이, 은희, 경림이는 단강교회의 보물들입니다.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보물들입니다. 고등학교 학생, 그래도 그들은 교회 학교 선생님입니다. 몇 안 남은 동생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칩니다. 토요일 밤에 따로 모여 주보를 접고, 적잖은 주보를 늦도록 접고, 다음날 아이들 가르칠 걸 준비합니다. 한나절이 다 걸리는 주보발송도 그들의 몫입니다. 궂다면 한없이 궂은 그 일을 그들은 웃음으로, 얘기꽃으로 대신합니다. 행사 때마다의 제단 장식도 그들의 몫이고, 때때로의 청소도 그들 몫입니다. 공부에, 농사일에 쉽지 않은 시간들, 그래도 그들은 기쁨으로 모든 일을 받습니다. 지난해부터 이진웅 선생님이 들어와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의대 졸업반, 만만한 시간이 아니면서도 언제 한 번 거르는 법 없습니다. 너무 .. 2021. 2. 4.
어떤 하루 아침 일찍 끝정자로 내려가 안 속장님과 속장님의 언니를 태우고 작실로 올라갔습니다. 며칠째 앓아누워 있던 속장님의 언니가 작실 집으로 돌아가는 날입니다. 속장님 또한 몸이 안 좋은 상태지만 더 아픈 언닐 혼자 보낼 수가 없어 속장님이 언니를 따라 나섰습니다. 며칠 동안을 텅 비어있던 썰렁한 집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의 눈에서 핑그르르 눈물이 돕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네들, 게다가 걸음도 편치 않은 병약한 몸들입니다. 내려오는 길, 김천복 할머니 댁에 들러 할머니를 모시고 부론으로 나왔습니다. 밀려있는 객토 대금을 갚으러 농협에 가는 길입니다. 허리 굽은 여든의 노인네가 콩과 깨, 고추 등을 장에 이고 가 푼푼이 팔아 모은 돈으로 농협 빚을 갚으러 갑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웃으며 나누지만 할머니 모시고 .. 2021. 2. 3.
일하는 아이들 주일 어린이 예배. 종을 쳤지만 아이들이 모이질 않았다. 늘 빠짐이 없던 은옥이와 은진이까지 안 나왔다. 녀석들이 모두 웬일일까, 허전하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저녁 무렵 아랫말로 내려가다 은옥이 은진이 은희를 만났다. 그들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온통 얼굴이 벌겋게 탔고 옷은 흙과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할머니가 몸져누워 계시자 어린 그들이 할머니 대신 당근 밭을 매고 오는 길이었다. 미안했다. 놀면서 안 오는 줄 알고 섭섭하게 생각했던 내가 영 부끄러웠다. 일하는 아이들을 두고 난 너무 쉽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 (1993년) 2021. 2. 2.
가래질 한희철의 얘기마을(219) 가래질 신작로 건너편 산다락 논. 병철 씨가 일하는 곳에 다녀왔다. 소를 끌고 쟁기를 메워 가래질을 하는 일이었다. 층층이 붙어 있는 고만고만한 논들, 작고 외지다고 놀리지 않고 그 땅을 일구는 손길이 새삼 귀하다. “이렷, 이렷” 다부지게 소를 몰며 논둑을 간다. 석석 논둑이 쟁깃날에 갈라진다. 멀쩡한 둑을 반이나 잘라낸다. 저러다 둑이 무너지지 않나 싶을 정도다. 그러나 가래질을 해야 한 해 동안 논둑이 견딘다. 잘라낸 둑 부분을 물에 이긴 진흙으로 발라두어야 물이 새지 않고 둑이 터지지 않는 것이다. 물로 반죽한 물컹물컹한 진흙, 허술하고 약하지 싶은 진흙들이 오히려 물을 견뎌 둑을 둑 되게 하는 것이 신기하다. 단단하고 견고한 것보다는 한없이 약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물을.. 2021. 2. 1.
아이스러움! 한희철의 얘기마을(218) 아이스러움! 근 두 달간 놀이방 점심 반찬을 놀이방 엄마들이 준비를 했다. 아내 몫이었던 그 일이 아기 출산으로 엄마들이 돌아가며 맡게 되었다. 사실 아이들 반찬을 준비한다는 것은 쉽지가 않다. 먹는 것과 안 먹는 것이 구별되기도 하고, 매번 같은 걸 준비하기도 그렇고, 은근히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언젠가 한번은 점심 반찬으로 멸치볶음이 준비되었는데 그날 아이들은 멸치를 하나도 못 먹고 남겼다. 멸치를 막 먹으려는 순간 소리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선생님, 멸치들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는 것 같아요.” 그 얘길 듣고 보니 반찬 그릇마다 멸치가 눈을 똥글똥글, 더 이상 아이들의 손이 멸치에게로 갈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스러움! - (1993년) 2021. 1. 31.
농사꾼 생일 한희철의 얘기마을(217) 농사꾼 생일 “오늘 뭐 해요?” 비가 제법 내리는 아침 병철 씨를 만났다. 아무 일 없으면 낮에 차 한 잔 하러 들르라고 하자 병철 씨가 껄껄 웃으며 그러겠다고 했다. 그의 대답이 재미있다. “비 오는 날은 농사꾼 생일이잖아요.” 2021. 1. 30.
자기 몸집만큼만 한희철의 얘기마을(216) 자기 몸집만큼만 농활 나온 대학생들에게 병철 씨가 콩 심는 방법을 가르친다. “자, 이렇게 호미로 파가지고 콩을 심는데, 한번에 5-6알씩 넣으면 돼. 그러고는 자기 발로 두 개쯤 간격을 두고 또 파서 심으면 되고.” 한 학생이 물었다. “콩은 얼마나 묻으면 돼요?”“응, 그냥 살짝 묻으면 돼. 너무 깊게 묻으면 오히려 안 되지. 옛날 어른들이 그랬어. 씨앗 크기만큼만 묻으면 된다고. 깨는 깨만큼 묻으면 되고 옥수수는 옥수수만큼만 묻으면 된다고. 씨앗 크기만큼씩만 묻으면 싹이 다 난다는 거지.” 자기 크기만큼씩만 묻으면 싹이 난다는 씨앗, 모든 살아있는 것이 그리하여 자기 몸집만큼만 흙속에 묻히면 땅에서 사는 걸, 뿌리 내리고 열매 맺는 걸, 더도 덜도 말고 자기 몸집만큼만 흙.. 2021. 1.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