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의 '종횡서해'

예수는 하나님의 심장이다

한종호 2015. 1. 31. 09:11

꽃자리의 종횡서해(2)

  예수는 하나님의 심장이다

-마커스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

 

기독교의 심장에는 심장의 길, 곧 우리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에서 변화시키는 오솔길이 있다. 기독교의 심장에는 하나님의 마음, 곧 우리가 변화되고 이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열정이 있다. 기독교의 심장에는 하나님의 열정에 참여하는 삶이 있다”(340).

패러다임 변화

욕먹는 게 아픈 게 아니라, 욕을 먹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더 아프다. 한국 교회를 대표한다는 어느 교회가 수천억을 들여 교회를 짓고 그 후유증으로 내홍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사람들의 비웃음 소리는 더욱 크게 들려온다. 사정이 있을 터이다. 하지만 그 사정이 바깥사람들에게는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 않는 것 같다. 소설가 이승우의 <연금술사의 춤>에 나오는 공본영의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너희들, 십자가를 끌어내려 목에다 걺으로써 탐욕스런 육체를 장식하듯 음란하고 부패한 영혼에다 종교를 장식하는 너희들, 예배 행위를 무슨 친교 모임이나 고상한 취미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는 너희들. (), 너희의 썩어문드러진 영혼의 무덤을 은폐하기 위한 회() 외엔 아무것도 아닌, 너희들의 타락을 더 어떻게 참으랴.”

신랄하다. 그런데도 유구무언이다. 소설에서 이야기의 화자는 황금빛 십자가를 보며 “‘십자가가 지향하는 초월성과 황금이 가리키는 속물성간의 저렇듯 무리 없는 접합, 그 부조화한 간통이 이 시대의 초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는 이 땅에서 쇠퇴하고 말 것인가? 많은 이들이 내놓는 전망은 우울하다. 겨울숲보다 더 황량하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꿈을 세상 구석구석으로 나르는 살아있는 유기체를 보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심장이 차가워졌다는 말이다. 멎기 직전이다. 차가워진 심장을 뜨겁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을 붙좇던 삶에서 돌이켜 본()을 꼭 붙들어야 한다. 그 본을 붙잡기 위해서는 좋은 길 안내자가 필요하다.

지난 주 타계한 오레곤 주립대학의 종교와 문화 교수이면서 예수 세미나의 대표적 성서학자였던 마커스 보그의 책 기독교의 심장(The Heart of Christianity)은 우리가 참고해도 좋을만한 지도이다. 역자가 ‘heart’의 번역어로 핵심이 아닌 심장을 택한 것은 어쩌면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절박함과 아울러 교회를 새롭게 할 길을 찾았다는 기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기독교의 심장은 무엇인가?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9)

이 책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211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제1부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해 답하기 위해 신앙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의미 차원들을 밝히는 동시에 성서, 하나님, 예수라는 기독교 전통의 심장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2부는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은 중생, 하나님의 나라, 죄와 구원, 수행, 다원주의의 문제 등이다.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추구하는 저자는 보수주의적 기독교자유주의적 기독교를 나눴던 지금까지의 구분법은 급변하고 있는 이 시대에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본다. 현대 이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은 과학, 역사학, 종교 다원주의,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지평 가운데서 사고할 것을 요청받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시대마다 재구성되어야 할 과제이다. 이런 과제를 수용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해서 저자가 채택한 용어는 '과거의 패러다임''새로운 패러다임'이다. 두 패러다임을 가르는 기준은 성서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과거의 패러다임은 성서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본다. 성서무오설은 이런 관점의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이들은 성서를 '사실적-문자적'으로 이해한다. 신앙도 내적인 변화보다는 '믿는 것'이 중심이 되고, 오늘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보다는 내세에 집중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패러다임이 기독교 고유의 전통이라는 사람들의 통념을 뒤집는다. 이러한 기독교 이해 방식은 사실은 현대성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그 분기점이 된 것은 계몽주의이다.

계몽주의는 사실성을 참됨의 기준으로 보았기에 성경의 참됨을 주장해야 하는 이들은 성경의 언어를 사실의 언어로 제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과거의 패러다임은 기독교 고유의 전통이라기보다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라 말할 수 있다(30). 저자는 이런 기독교 이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성서에 대한, 그리고 기독교적 삶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특색을 역사적’, ‘은유적’, ‘성례전적’, ‘관계적’, ‘변혁적이라는 다섯 가지 형용사를 가지고 설명한다.

 

                                

 

새로운 신앙의 세 기둥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전에 저자는 신앙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된 다양한 층위의 의미에 주목할 것을 요구한다.

첫째는 동의로서의 신앙(faith as assensus)이다. 이것은 교리나 신조 등에 대한 동의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반대어는 의심혹은 불신앙이다.

둘째는 신뢰로서의 신앙(faith as fiducia)이다. 신뢰는 '철저한 맡김'이다. 불안과 공포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부력(浮力)을 신뢰하는 것”(55)이 곧 신뢰이다. 반대어는 불신(mistrust)’이지만 이것은 늘 걱정염려로 나타난다.

셋째는 충실함으로서의 신앙(faith as fidelitas)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것이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책임적 신앙으로 표현된다. 반대어는 배신(infidelity)’이고 성서의 언어로 말하자면 우상숭배이다.

넷째는 보는 방식으로서의 신앙(faith as visio)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관련된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궁극적인 무대를 적대적이거나 무관심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은총이 넘치는 것으로 본다.

이 네 가지 이해 방식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서로를 보충해 주기도 한다. 신앙의 중층적 의미를 천착하고 있는 저자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말의 본래 의미이다. 흔히 '믿음'이란 불확실한 주장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나는 믿는다에 해당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나의 심장을 바친다”(69)는 뜻이다. 믿는다는 말은 우리 삶의 가장 깊은 차원을 봉헌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믿는다는 말이 어떤 선언이나 명제를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한정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신앙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일이다.신앙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신앙은 심장의 길이다”(71)

성서는 기독교인의 기초 문서이고 정체성 문서이고 삶의 지혜를 가르치는 기독교 전통의 심장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성서가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 곧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증언이라고 본다. 따라서 성서는 상대적이며 문화적으로 조건 지어진 문서이다. 성서는 기록될 당시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언어와 개념들을 사용했기에 본문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접근이 필요하다. 해석자들은 본문을 산출하고 전승해온 공동체에게 그 이야기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를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

신앙 공동체는 역사적 기억은유적 이야기를 결합시켜 자기들의 하나님 체험을 전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은유를 '믿는 것'이 아니라 은유를 통해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은유적 언어 속에 내포된 사람들의 내밀한 체험을 읽어내는 해석의 과정은 필수적이다. 성서는 또한 성례전적으로 읽어야 한다. “성례전이란 거룩함을 전달해주는 유한하며 물질적이며 눈에 보이는 매개물(visible mediator)”(96)이다. 성서의 말씀은 성령이 우리에게 현재적으로 말씀하시는 수단이 된다”(97).

저자에게 있어 하나님은 실재의 심장이다.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확고한 고백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 그 이상’, 실재의 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이 종교적 세계관의 핵심이다. 하지만 신을 원본 없이 존재하는 그림자, 곧 시뮬라크르로서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 저자는 하나님이 실재하는가?”라는 물음에 아주 확고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신의 실재를 증명하는 일이 불가능하기에 그는 신의 실재를 암시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신의 실재를 집단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세계 종교들, 다양한 종교 체험에 대한 보고가 그것이다. 현대 물리학도 그 이상의 세계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을 사람과 비슷한 인격적 존재로 보는 초자연적 유신론(supernatural theism)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이다. 그는 범재신론(panentheism)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을 둘러싸고 계신 영으로서 인간과의 상호작용을 중시하는 분이다. 저자가 보는 하나님은 인간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보상으로 상을 주거나 벌을 내리는 군주적 존재가 아니라, 인간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그들을 자비의 길로 초대하는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다. 기독교는 요구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관계와 변화에 관한 것이다(129).

예수는 하나님의 심장이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색은 하나님의 계시를 일차적으로 한 인격(a person) 속에서 찾는다는 점”(131)이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신앙의 예수 중심성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예수가 자신의 정체성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그가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죽음을 통해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라고 믿는 과거의 패러다임은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부활절 이전의 예수를 유대교 신비주의자, 치유자, 지혜의 스승, 사회적 예언자, 하나님 나라 운동의 창시자로 본다. 그에게 부여된 기독론적 칭호들은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자기 진술이 아니라 부활절 이후의 예수 체험에서 비롯된 고백들이다. 기독론적 표현들은 실체에 대한 지시가 아니라 뭔가를 가리켜 보인다는 측면에서 은유적이다. 따라서 해석을 필요로 한다. 예컨대 예수는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다라는 고백은 성전의 용서 독점권과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의 독점권을 부정하는”(156) 체제전복적 은유이다. ‘라는 고백도 마찬가지다. 신앙의 정치적 차원을 잃어버린 한국교회가 경청해야 할 대목이다.

새로운 삶의 여섯 기둥

기독교 신앙의 심장을 붙든 기독교인들의 삶의 특색은 변화이다. 성경은 옛 사람에 대해 죽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가리켜 중생이라 일컫는다. 물론 중생은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영적-인격적 변화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그보다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고 주어지는 옛 자아에 대해 죽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정체성과 존재로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다. 저자는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중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을 기억하고, 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실재를 환기시킴으로써 나는 때때로 존재의 가벼워짐을 느끼는데, 이것은 나의 자기집착과 짐처럼 느껴지는 감금상태에서 벗어남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무덤으로부터 나오도록 부름받고 있다”(189).

이처럼 거짓 자아로부터 벗어나 중생한 사람의 특징은 함께 아파하는’(compassion) 연민이라 할 수 있다. 연민은 생명을 낳고, 양육하며, 포옹하는 마음이다(195).

마커스 보그에게 있어 하나님의 나라는 공동체적-사회적-정치적 변화와 관련된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는 억압적이고 인습적인 사회 체제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예수는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가 일상화되고 종교가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기존 체제를 부정한다. 하나님 나라는 탈세계적 비전이 아니라 이 땅의 현실을 변혁시키는 강력한 비전이다. 하나님의 정의를 옹호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담론은 오늘도 힘으로 지배하려는 제국의 담론에 맞서 의료 보장, 환경 보존, 경제정의, 힘의 남용 금지 등을 요구한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영적인 변화와 더불어 정치적인 변혁 모두를 강조한다(230).

기독교인의 삶이 관계를 맺는 삶이며 변화된 삶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저자가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얇은 곳”(thin places)이라는 표현이다. 저자는 닫힌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간적 은유를 사용하고 있다. “얇은 곳이란 실재의 두 차원 사이의 경계선이 부드러워 서로 스며들고 투과할 수 있게 되는 장소(241)를 상징한다. ‘장소라 말했지만 그것은 자연 혹은 광야처럼 지리적 공간일 수도 있고, 문학과 예술일 수도 있고, 인생의 한계상황인 질병이나 고통 혹은 애도의 순간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하나님의 영은 이런 얇은 곳을 통해 활동하신다. 예배는 얇은 곳을 창조하는 일이다. 신앙을 통한 마음의 변화, 곧 자아가 하나님과 신성함에 대해 열리는 것을 가리켜 저자는 '마음의 부화(孵化)(238)라 일컫는다. 부화된 마음의 특색은 공감의 능력이며, 정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저자는 죄와 구원이라는 전통적 가르침이 때로는 현실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죄는 휴브리스 혹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멀어짐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인간의 문제를 드러내기 위해 성서가 제시하는 이미지 곧 눈멂, 유배상태, 묶임, 닫힌 마음, 굶주림과 목마름, 길 잃음 등을 포괄하기에는 적절치 못하다. 죄에 상응하는 이미지는 용서인데, 용서라는 단어가 과연 인간이 지닌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일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는 행위의 결과인 경우도 있지만 사회에 의해 부과되거나 구성된 경우도 많으니 말이다. 죄와 용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순간 우리는 구조의 문제에 대해서 눈을 감고 내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구원이라고 번역되는 단어는 온전함’, ‘치유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왔고, 성서에서 중심적 모티프가 되는 이야기들은 한결 같이 새로운 백성,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구원이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에 관한 이야기(276)라는 말이다.

기독교인의 삶이 관계를 맺는 것이고 또 변화하는 것이라면 거기에 꼭 필요한 것은 수행’(practices)이다. 신앙과 행위를 구분했던 개신교 전통은 수행을 소홀히 해왔다. 하지만 하나님께 마음을 모으고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서, 기독교인의 정체성과 성품을 형성하기 위해서, 양육되기 위해서, 함께 아파하며 정의를 실천하기 위해서, ‘그 길을 살아내기 위해서(288) 수행은 필수적이다. 저자는 매우 실천적인 수행의 길을 제시한다. 수행의 기본은 교회에 소속하는 것이다. 그 까닭은 현대 문화가 제시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의 비전을 확증하는 기억의 공동체에 소속되어 기도, 명상, 묵상, 독서, 봉사, 일상의 성화에 참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존재의 길로 접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다원주의 시대

이제 남은 질문이 있다. ‘내적 변화의 길을 가르치는 것이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면, 믿음이 구원의 문제가 아니라면 우리는 왜 하필 기독교인인가?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다른 종교를 대하는 태도는 다양하다. 하지만 거칠게 범주화하자면 종교에 대한 절대주의적 이해와 종교에 대한 환원주의적 이해로 나눌 수 있겠다. 종교에 대한 절대주의적 이해는 구원은 오직 우리에게만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이들은 자기 경전과 교리들을 절대화함으로써 종교적 배타주의의 길을 걸어간다. 그들은 다른 종교를 대화의 파트너로 보기보다는 개종의 대상으로 본다. 종교간의 충돌은 당연하다. 종교에 대한 환원주의적 입장은 종교를 인간이 만들어낸 것(invention)”으로 간주한다. 사람들이 종교를 만든 것은 강력한 심리적 및 사회적 필요성 때문”(319)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종교는 오류일 따름이다.

저자는 종교를 성례전적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종교는 인간의 구성물이지만 신성한 하나님체험에 대한 응답이라는 점에서 환원론과 구별된다. 그런데 매우 중요한 전제가 있다. 그에게 오래된 종교들은 모두 절대적인 것의 매개자이지, ‘절대적인 것자체가 아니다”(325). 이 말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적용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종교가 신성한 실재를 가리키고 참된 삶의 을 가리킨다면 왜 우리는 꼭 기독교인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해 저자는 객관적인 대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대답을 할 뿐이다. 기독교전통과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도와준 오솔길인 동시에 친숙한 생활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가 유일한 길이라는 고백은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헌신과 사랑의 표현이다. 신앙의 언어는 고백이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진술이 아니라는 것이다. 논란의 소지가 많지만 이것이 마커스 보그의 고백이다.

반지성적이고 독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오늘의 교회는 어쩌면 니체가 말하는 신의 무덤인지도 모른다. 예수의 뜨거운 심장이 교리와 신조라는 차가운 심장으로 대체되면서 기독교는 삶의 변화와 역사 변혁의 종교가 아닌 비정치적인 종교로 전락하게 되었다. 마커스 보그는 상투적인 신앙언어의 외피를 벗기고, 그 언어 속에 담긴 생동하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매우 도전적이지만 개인의 신앙 체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적실하게 느껴진다. 신학적 토론이 증발되어 버린 채 상투적인 신앙 언어만이 앵무새처럼 되뇌어지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보그의 기독교의 심장은 이제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에 대해 정직하게 재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