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목자 예수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2)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 12 사랑의 목자 예수
유월절 성찬을 마친 예수와 제자들은 감람산으로 나아갔습니다. 성경에는 ‘감람산으로 나아갔다’로 쓰여 있지만 마태 수난곡은 이 구절에 공간감과 움직임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에반겔리스트가 ‘gingen sie hinaus/그들은 나와서 갔다’라고 노래하기 직전을 들어 보면 오르간과 콘티누오(통주저음)의 반주가 갑자기 스타카토로 한 음씩 옥타브 위까지 빠르게 상행하는 것을 들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냥 ‘갔다’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수난곡에서 이 부분을 들을 때 청중들은 그들이 ‘서두르듯 산을 올라’갔음을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의 영화처럼, 살아 움직이는 성경이야기‘를 들려줌으로 청중으로 하여금 예수의 수난에 참여토록 독려하는 것이 수난곡의 목적입니다.
악보 에반겔리스트가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라고 노래하는 부분. 윗줄 맨 아래의 오르간&콘티누오 파트 마지막 마디에 산을 오르는 듯한 스타카토 옥타브 도약이 있다.
실제로 감람산은 예수살렘 성 동쪽에 있는 800미터 정도 높이의 산입니다. 하지만 예수살렘 성이 해발 700미터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보기에는 100미터 남짓의 언덕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공간을 좋아하셔서 예루살렘에 계실 때면 거의 매일 밤 오르셨습니다. 철야 산기도를 하러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쉬러 가셨습니다. 예수께는 쉼이 기도였고 기도가 쉼이었습니다. 낮에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열심히 일하셨지만 밤에는 꼭 하나님과의 조용한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예수께서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누가복음 21:37
사랑의 목자 예수
감람산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배신할 제자들을 원망하고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을 양으로 바라보셨다는 것 자체가 예수 스스로 목자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서 예수를 바라보지만 우리를 향한 예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 보다 훨씬 더 깊습니다.
마태수난곡 1부 20번~21번 마태복음 26:30~32 | |||
음악듣기 : https://youtu.be/BRaQm4M6r7g | |||
내러티브 14(20) |
에반겔리스트 |
30. Und da sie den Lobgesang gesprochen hatten, gingen sie hinaus an den Ölberg. 31. Da sprach Jesus zu ihnen: |
30.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 산으로 나아가니라 31.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
대사 |
예수 |
In dieser Nacht werdet ihr euch alle ärgern an mir, denn es stehet geschrieben: Ich werde den Hirten schlagen, und die Schafe der Herde werden sich zerstreuen. 32. Wann ich aber auferstehe, will ich vor euch hingehen in Galiläam. |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32.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
코멘트 15(21) |
코랄 |
Erkenne mich, mein Hüter, Mein Hirte, nimm mich an! Von dir, Quell aller Güter, ist mir viel Gut's getan. Dein Mund hat mich gelabet Mit Milch und süßer Kost, Dein Geist hat mich begabet Mit mancher Himmelslust. |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지키시는 주님, 나의 목자여 나를 받아주소서 모든 좋은 것은 당신으로부터 왔사오니 온갖 좋은 일을 내게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젖과 맛난 꼴이 되어 나를 위로하셨으며 당신의 영은 나를 천상의 만족으로 채우셨나이다. |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고 버림받고 부인당하여 끌려가 죽임을 당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예수는 지금 제자들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마가복음 6:34)’라는 마가복음의 표현처럼 우리를 양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은 그 자체로 깊은 사랑과 연민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의 마음을 뜻합니다. 죽음을 앞두고 계신 그가, 그 양떼로부터 배신당할 것을 아셨던 그가, 목자 없는 양떼가 되어 유리하게 될 제자들을 걱정하여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라고 부활하시어 갈릴리로 먼저 가시겠노라고 약속해 주신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바흐 시대의 신앙도 이 사랑을 깨닫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흐와 대본을 쓴 피칸더는 예수의 말씀 뒤에 다음과 같은 코랄을 연결시켰습니다.
나를 잘 아시고, 나를 지키시는 주님,
나의 목자여 나를 받아주소서
모든 좋은 것은 당신으로부터 왔사오니
온갖 좋은 일을 내게 베푸셨습니다.
함께 부르는 마태 수난곡
이번 시간부터 새로운 시도를 해 볼까 합니다. 마태 수난곡의 코랄을 우리말로 부르면 어떨까요? 두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마태 수난곡에서 코랄은 주로 ‘코멘트’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코멘트’는 주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자가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적, 신앙적 반응이라고 설명 드렸었지요. 그렇기 때문에 청중으로서 수난의 이야기에 참여하는 우리들도 코멘트에 동참하며 코랄을 함께 부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727년 4월 11일 성금요일,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에서 마태 수난곡이 처음 연주 될 때에도 청중들은 코랄을 함께 따라 불렀을 것입니다.
마태 수난곡을 독일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번역하여 부른다는 것은 썩 권장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작품일수록 언어와 음악이 하나로 움직이며 바흐 또한 가사에 음악을 입혀 그림을 그려내듯 섬세하게 작곡했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오늘 예수의 대사에 있습니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Ich werde den Hirten schlagen, und die Schafe der Herde werden sich zerstreuen”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사는 ‘치다’라는 의미의 ‘슐라겐(schlagen)’과 ‘흩어지다’라는 의미의 ‘체어슈트로이엔(zerstreuen)’입니다.
우선, 음악적인 악센트가 이 두 개의 동사에 맞아 떨어지면서 이 동사들의 표현은 극대화합니다. 또한 이 두 동사를 시작과 끝으로 하여 음악이 갑자기 비바체(vivace)로 빨라지고 현악기들은 목자에게 채찍질을 하고 양떼를 흐트러트리듯이 스타카토를 쏟아내고 있습니다. 만일 이 부분을 우리말로 옮겨 부른다면 독일어와 우리말의 어순 차이 때문에 바흐가 독일어 동사의 자리에 섬세하게 준비한 음악적 악센트의 자리에 우리말의 동사를 위치시키긴 힘들 것입니다.
바흐는 이렇게 가사에 음악을 그려 입히는 방식(Word painting)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 수난곡을 깊이 있게 듣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독일어와 단어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매 시간마다 독일어 가사를 함께 올려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코랄만큼은 우리말로 불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코랄 자체에 그러한 DNA가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을 계속해서 함께 하고 계신다면, 마태 수난곡에서 몇 개의 코랄 멜로디가 반복되어 쓰이고 있음을 눈치 챈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태 수난곡에 쓰인 코랄 멜로디들의 작곡자는 바흐가 아닙니다. 오늘 날의 시각으로 보면 표절에 돌려막기로 보일 수 있겠지만 루터교 전통에서 이것은 매우 일반적인 일이었습니다. 바흐 당시에는 음악을 누군가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기에 음악에 있어서 표절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코랄과 콘트라팍툼
루터교 전통에서 코랄은 매우 중요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성공에는 코랄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코랄은 루터교의 성립과 함께 등장한 새로운 교회음악으로 루터교 음악의 핵심이었습니다. 어린이 성가대원 출신의 미성 테너였고 류트와 플롯도 능숙하게 연주했었던 루터는 음악을 신학에 견줄 하나님의 선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일반 신도들은 성가대가 부르는 라틴어 다성 음악이나 사제들이 부르는 라틴어 성가를 수동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는 본인의 음악성과 새로운 시대의 요청을 코랄이라는 새로운 교회음악을 통해 결합시켰습니다. 일반 신도들이 익숙한 멜로디에 신학적 신앙적 핵심 내용을 담아 독일어로 함께 부르는 코랄이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코랄을 직접 부름으로써 예배에 보다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고 신학적, 신앙적 핵심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습니다.
코랄의 멜로디는 새롭게 작곡되기도 했지만, 이미 있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는 콘트라팍툼(contrafactum) 형태로 많이 만들이 졌습니다. 코랄의 선율은 그레고리오 성가, 비전례적 종교 노래, 세속 선율 또는 민요들로부터 다양하게 차용했습니다. 예를 들면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천부여 의지 없어서’, ‘오랫동안 사귀었던’등의 가사로 불러진 것처럼 말이지요. 오늘의 코랄 선율 역시 원래는 세속적 사랑노래였습니다.
한스 레오 하슬러가 1600년 경 작곡하여 유명해진 ‘내 마음 떨려오네/Mein G'müt ist mir verwirret’의 선율에 루터교 목사요 신학자인 파울 게르하르트가 ‘오 피투성이 상하신 그 머리/O Haupt voll Blut und Wunden’라는 가사를 붙였고 1680년에는 바흐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디트리히 북스데후데가 ‘우리 주님의 몸/Membra Jesu Nostri’이라는 작품에서 주님의 상하신 머리를 표현하는데 이 멜로디를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바흐는 이 멜로디를 마태 수난곡에서만 총 여섯 번 사용합니다. 마태 수난곡의 메인 멜로디라고도 할 수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이 곡을 바흐의 작곡으로 알고 있었지만 나중에 이러한 역사가 밝혀지게 되었고 그래서 찬송가 145장 오른편에는 이례적으로 작곡자 이름에 하슬러와 바흐의 이름이 함께 오르게 되었습니다.
자, 그럼 오늘 소개해 드린 부분을 처음부터 들으시다가 이 코랄이 울려 퍼질 때 우리말로 함께 불러 보면 어떨까요? 코랄 멜로디에 맞춰 부를 수 있도록 가사를 다듬어 보았습니다. 참고로, 음악은 윗부분에 있는 가사 해석표의 ‘음악듣기’링크를 통해 리히터 58년 녹음으로 들으실 수 있습니다. 합창단의 노래처럼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사무치도록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내 목자이신 주님 날 지켜 주-소서
날 먹여 주시시고- 날 채워 주-셨네
생명의 말씀으로 날 먹여주시고
하늘-의 기쁨으로 날 채워주셨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또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예수의 잡히심이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위한 교리적 필연이었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편협한 생각으로 우리의 신앙과 삶을 매우 협소하게 합니다.
예수는 눈앞에 놓인 사랑하는 양들의 위험을 두고 달아 날 수 없으셨습니다. 눈앞의 놓인 양들의 위험과 양을 향한 ‘즉흥적 사랑’을 위해 그는 죽음을 향하여 뛰어드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은 영원하고 변함없기에 그 ‘즉흥적 사랑’이 십자가의 사랑이 되었으며 영원하고 필연적인 사랑이 된 것이지요. 이 마음이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사랑의 목자’, ‘선한 목자’라고 부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음악공부와 선교활동을 하였다.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국립합창단 단원을 역임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의정부 하늘결교회 담임목사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