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읽기, 침묵 말하기, 침묵하기
꽃자리의 종횡서해(4)
침묵 읽기, 침묵 말하기, 침묵하기
-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
“태어나자마자 죽어버린 줄 알았던 책이 되살아나는 걸 보니 여간 기쁘지 않다. 이 책을 이미 읽었던 이들이 바로, 이 책의 부활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8년 만에 재쇄에 들어가면서 역자가 붙인 글이다. 이 책이 얼마나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긴 침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다시 소리 없이 부활했는지, 짧지만 명쾌하게 설명하는 글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은 책에도 운명(사실은 앞이든 뒤든 생년월일을 명확히 박는 까닭에 사주라고 하지만, 매체의 특성상 다소 광범한 언어로 대체한다)이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이 책으로 말하자면 깊은 수도원의 은둔자처럼 존재하지만 눈이 밝은 사람들은 용케 찾아내어 오래도록 곁에 두고 지내다가, 기력이 쇠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되는 순간이 오면 무심한 듯했던 그 오랜 친구들이 새삼스럽게 정열을 되찾아 열렬히 구애하여 다시 회생시키는, 희미하지만 생명선이 긴 운명을 타고난 것 같다. 이를테면 ‘고전의 운명’ 말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 침묵
‘침묵’에 대해 읽고 공감하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긴 말을(문자 역시 소리 큰 말이다) 해야 한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그것은 마치 늘 ‘기도에 대해’ 읽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기도’는 하지 않는 것과 혹시 같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침묵의 세계》는 이러한 모순에 대해 처음부터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침묵이란 그저 말하기를 그만둠으로써 성립되는 것은 아니다. 침묵은 단순한 말의 포기 그 이상의 것이며, 단순히 자기 마음에 들면 스스로 옮아갈 수 있는 어떤 상태 이상의 것이다”(15쪽).
저자인 침묵의 사람 막스 피카르트는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침묵은 세상으로 난 창을 모두 닫고 홀로 있을 때 느껴지는 막막한 존재감이나 고립감과 다르며, 주관적인 고독과도 엄연히 구분된다.
“침묵이 작용하는 세계에서 고독은 주관적인 것에 달려 있지 않으며 주관적인 것에서 유래되지 않는다. 고독은 어떤 객관적인 것으로서 인간 앞에 존재하고 있으며, 인간 자신의 내부 속에 있는 고독 역시 그러하다. 고독은 침묵으로서 인간 앞에 존재하고 있다. 옛 성자들이 고독 속으로 들어가서 마주쳤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침묵의 객관적인 고독이었고, 그래서 그들 자신의 내적 고독은 객관적인 고독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성자는 그 객관적인 고독을 그것이 제삼자로부터 온 것인 양 받아서 가졌고, 그것을 당연한 것인 양 받았다. 따라서 성자의 고독은 오늘날의 “내적” 고독처럼 긴장되어 있지 않다. 반대로 그것은 침묵의 위대한 객관적인 세계와 그 객관적인 세계의 고독과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표시였다…. 그러나 고독이 다만 인간의 내부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 곳에서는 인간은 고독에 의해서 소진되고, 고독에 의해서 수축된다”(65-66쪽).
그는 침묵을 단순히 소리 없는 상태로 인식하지 않는다. 침묵은 하나의 독자적인 현상이며, 독립된 전체이며, 그 자신으로 인하여 존립하는 어떤 것이며, 모든 것에 존재하며 그 자체이기도 하다. 피카르트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모든 물자체로부터 인식한 침묵의 세계는 능동적인 것이고 독자적이며 완전한 세계이다.
그러나 뒤이어, 피카르트는 굴곡 없는 낮은 목소리로 탄한다. 침묵하는 실체를 가지지 못한 인간은 오늘날(이 오늘날은 1940년대 말을 가리킨다. 그때와 지금의 오늘날은 또 얼마만한 간극이 있는가) 매순간마다 그 앞에 제공되는 지나치게 많은 사물들로 인해 압박을 받게 되었다고. 그리하여 오늘날의 세계에서 침묵은 사물과 소음에 속박당하고 말았으며, 무언과 진공 상태가 침묵으로 행세한다고. 실로 침묵은 지속적인 소음의 흐름 속에 나타난 어떤 구조적인 결함처럼 보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적어도 영혼 속에 사물들의 침묵하는 형상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인간의 정신은 대상을 단순히 자기 눈앞에 보이는 대로 사실적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의 운동을 통하여 대상을 초월하여 나아간다”는 후설의 지적처럼 막스 피카르트는 정신의 폭과 침묵의 폭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침묵의 폭은 정신이 폭넓어지도록 일깨우는 자연으로부터의 경고로 받아들인다.
“침묵의 모습”에서 시작해 “말 속의 침묵”, “자아와 침묵”, “인식과 침묵”, “사물과 침묵”, “시와 침묵”, “침묵이 없는 세계”, “침묵과 신앙” 등등 침묵과 관련된 32개의 사색의 편편들은 길지 않지만, 수심 깊은 곳에 추를 드리우고 있는 침묵의 언어들은 읽는 이의 마음을 묵직하게 잡아당기며 함부로 빠져나올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침묵의 세계》에서 가벼이 발을 뺄 수 없는 이유가 재미나 감동 때문은 아니다.
재미있는 책을 수식할 때 쓰는 상투적인 표현이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어 단숨에 읽어버렸다”이다. 그러나 달려가는 재미보다 멈추어 보는 쪽에 기울어 있는 이 책은 단숨에 읽을 수도 없고, 감히 말하지만 단숨에 읽어서도 안 된다. 이 책을 읽는 데에는 문자를 읽는 데 들이는 시간 이상의 침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줄거리 파악해 가며 처음부터 차곡차곡 읽을 책도 아니다. 늘 같은 자리에 두고 비오는 날 익숙한 손잡이의 우산을 펼치는 마음으로 읽으면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도 이 책에 혹은 몇몇 문장이나 관통하는 정신에 대해 토를 달거나 몇 마디로 정리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다만 32개의 방을 가진 《침묵의 세계》는 그 자체로 깊고 무궁하게 열려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되찾아야 할 세계, 침묵
‘침묵’은 사실 ‘우리’와 멀어 보인다. 우리는, 기도는 이야기하되 침묵은 멀리한다. 우리 울타리에서 상용화된 언표가 아닌 것이다. 침묵이라는 말 그 자체가 주는 이질감은 아마도 침묵이 가 닿는 궁극의 지점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에 있지 않은가 싶다. 의식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자아와의 마주섬 혹은 무의식에까지 무한대로 펼쳐지는 자아의 확장, 침묵으로 가 닿을 수 있다고 말해지는 그곳이, 오직 그분을 만나고, 다만 그분을 향해야 한다고 믿는 우리의 목적지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도의 길은 여러 갈래로 나 있고 그 끝에 구원이 있다. 침묵의 세계 역시 굴속처럼 어둡고 깊게 나 있어 쉽게 들어서기가 망설여지지만 걸어봄직한 길 중 하나다. 그래서 이 책이 고전의 운명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말하는 것들, 소음
무엇에서나 침묵을 발견하고 어디서나 침묵의 얼굴을 찾았던 저자 막스 피카르트는 1888년 독일의 슈바르츠발트 지방에서 태어나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의학부 조교수를 거쳐 뮌헨에서 개업한 의사다. 만년에는 스위스에서 문필 활동을 하다가 1965년에 영원한 침묵의 세계에 들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신으로부터의 도주』(1934), 『우리 속의 히틀러』 (1964), 『인간과 그의 얼굴』(1952) 등이 있다.
피카르트는 오로지 자기 내면에만 갇혀 사유했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너무 한 사람의 목소리에만 의존해 지루해질 만하면 “강철 화살들이 가득 찬 화살통, 단단하게 감겨진 닻줄, 날카로운 음, 약간만으로도 대기를 찢어놓는 청동 나팔, 그것이 히브리어다. 히브리어는 조금밖에 할 수 없지만, 히브리어로 말하는 것은 망치로 모루를 치는 것과 같다”(르낭)와 같은 위트 넘치는 인용과, 유머를 위해서는 “끝없는 쾌활함이 필요하며, 자기 자신의 모순을 완전히 초월하여 그 모순 속에서 괴롭고 불행해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필요하다”라는 헤겔의 유머관을 얻어들을 수도 있다.
군데군데 과문한 나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이름들이 눈에 띄지만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고, 대부분은 친절한 역자가 뒤에 색인을 붙여 놓아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정도의 간단한 정보는 얻을 수 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이 시대 저명한 생물학자 중 한 분은 꼭 소리를 내어 책을 읽는 버릇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다른 종류의 책들을 그런 대로 읽을 수 있었는데 희곡은 끝까지 읽는 걸 포기했다고 어딘가에 썼다. 등장인물에 따라 다른 목소리로 읽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감 없는 사실이라면 그분에게 《침묵의 세계》 읽기는 또 다른 고역일 수도 있을 것이다. 소리 내어 읽으면 전혀 다른 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책을 읽기 위해 내는 시간 자체가 곧 침묵일 수 있다. 문자가 소리라고 했지만 그것은 정말 많은 뜻을 품은 채 침묵하고 있다. 그것을 읽어내는 것은 오로지 읽는 사람의 몫이다. 만일 침묵이 어렵다면 이 책을 읽는 것 그 자체가 침묵의 훌륭한 연습이 될 것이다.
침묵은 정지해 있는 것 같으나 가만히 자신을 밀고 가는 힘이다.
자, 이것으로 침묵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마치자.
이제… 침묵이다….
김경실/<아름다운 날>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