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한종호 2024. 10. 23. 09:26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폴 틸리히는 신앙이란 궁극적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라 했다. 사로잡힘은 주체적으로 조장할 수도 없고 물리칠 수도 없다. 불가항력이다. 그래서 사로잡힘은 마치 교통사고처럼 다가온다. 그렇게 느닷없고 충격적이다. 그리고 그 후유증 또한 만만치 않다. 예수에게 사로잡혀 살아온 세월을 돌아본다. 사로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일심으로 달리긴 했다. 돌아보면 갈짓자 걸음이었지만, 그래도 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미로 속에서 헤매고 있다. 다가섰다 싶은 순간 멀어지고, 멀어졌다 싶은 순간 다가오는 길, 탄생에서 죽음으로 이어진 그 길이 참 힘겹다.

 

한국교회가 위기다. 아무리 뻔뻔한 사람이라 해도 이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시적인 위기라면 좋겠는데, 그게 그렇지가 않다. 근본적 위기이다. 교세가 확장되고, 대형교회도 많이 등장했지만 복음은 후퇴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경계했던 ‘다른 복음’이 슬그머니 틈입하여 주인 노릇하고 있다. 십자가는 자동차 룸미러에 매달려 대롱거릴 뿐, 많은 이들이 십자가라는 스캔들과 대면하려 하지 않는다. 행복한 삶의 루틴을 깨뜨리는 메시지는 수취인 불명이 되어 허공을 맴돈다. 은혜스러운 찬양의 소리는 도처에서 들려오지만, 예수의 벗들의 신음소리는 경청되지 않는다. 그래서 하늘도 외롭다.

 

 

에덴의 동쪽으로 이주한 가인은 도시 건설자가 되었다 한다. 에덴의 동쪽이 가리키는 것은 ‘불안’, ‘안식 없음’, ‘뿌리 뽑힘’이다.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그 폭력의 흐름은 아직도 잦아들지 않았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든 화를 낼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다. 거리를 걷는 이들의 얼굴마다 오랜 피곤이 똬리 틀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던졌던 두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첫 번째 질문,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책망이다. “네가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을 벗어났구나.” 아담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은 바로 하나님 앞이었다. 그런데 죄로 인해 천진함을 잃어버린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나무 뒤로 숨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후 사람은 그 마음에 깃든 불안을 달래기 위해 어떤 대상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불안의 대용물 말이다. 누군가 인간 속에는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울 수 없는 허구렁이 있다고 말했다. 채울 수 없는 것을 채우려니 삶은 힘겹고 마음의 공허는 깊어간다.

 

두 번째 질문, “네 동생이 어디에 있느냐?” 가인이 아벨을 죽인 후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이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닐 것이다. 가인은 불퉁거린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냐고.” 하나님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아무리 무심해도 그 눌함訥喊을 모른 체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인간을 이웃을 지키는 자로 만드셨다. 하나님에 대한 책임, 그리고 이웃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한 인간다운 삶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책임이라는 말이 너무 강박적으로 들려서일까? 성경은 ‘책임’을 ‘사랑’으로 바꾸곤 한다.

 

성경 인물 가운데 노아는 순종의 챔피언이다. 그는 폭력과 부패함이 가득찬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다.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신 하나님도 노아만 보면 흐뭇해 하셨다. 그는 하나님이 하라시는 대로 했다. 방주를 만들라 하면 만들고, 짐승들을 이끌어 들이라 하면 그렇게 했고, 들어가라 하면 들어갔다. 마침내 홍수가 끝났음을 알았을 때도 그는 방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만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노아가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신 것일까? 물론 아브라함도 순종의 사람이다. 떠나라 하면 떠났고, 바치라 하면 바쳤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있고 노아에게는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한 책임성이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누군가의 필요에 응답하는 일인 동시에, 그를 위해 스스로를 위기에 내던지기도 하는 행위이다. 아브라함은 전쟁 중에 사로잡힌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출정했고,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기 위해 길을 떠난 하나님 일행 앞을 막아서기도 했다. 순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한국교회에서 슬그머니 사라진 것은 바로 책임의 윤리이다. 민족사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기독교는 위험을 무릅쓰고 진리 편에 섰고, 사회적 약자들의 편에 섰다. 그 때 기독교는 젊었다. 야성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기독교는 늙어버렸다. 불의에 대해 저항할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벗들인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자리로 내려가지도 않는다. 위선적인 종교인과 지도자들을 향해 ‘화가 있을진저!’라고 일갈하던 예수의 얼굴에는 베일을 덮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나만 바라봐 달라고 말할 뿐이다.

 

야훼는 제국의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세계에 던져진 혁명의 깃발이었다. 하나님은 힘으로 사람들을 압도하던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제국을 지푸라기 강아지로 여기셨다. 현실이 아무리 암담해도 초월적 비전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예수는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화려하고 늠름한 이들만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니라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삶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꿈 자체가 불온하기 이를 데 없다.

 

오늘의 제국은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강화한다. 자본주의는 ‘희소성’의 신화를 가지고 사람들을 쥐락펴락한다. 희소한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경쟁한다. 적당한 경쟁이 나쁠 것은 없다. 하지만 희소성의 신화에 갇힌 이들에게 ‘적당히’라는 말은 적용되지 않는다. 무한 경쟁이 있을 뿐이다. 경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루저가 되고 승리한 이들은 득의만면이다. 예수의 세계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이 불편을 감수하지만, 희소성의 세계는 한 마리 양을 위해 모든 양을 희생시킨다. 욕망의 덫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 망각이 깊어지면 주체의 몰각이 찾아온다. 거라사 광인을 사로잡고 있던 레기온이 돼지떼에게로 들어가자 돼지떼는 비탈길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다.

 

기독교는 이런 세계의 실체를 폭로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그동안 번영의 복음과 죄 경영(sin-management)을 통해 몸집을 불리느라 바빠, 자본주의의 신화를 받아들이기에 급급했다. 왜곡된 정신을 타격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정방향으로 되돌리고, 세속적 가치 질서의 우상적 작동을 막아야 할 교회가 세상에 투항해버리고 만 것이다. 예수 정신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예수에 대한 소문만 무성하다. 이런 교회는 무너지는 게 순리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광야 공동체는 애굽과 바로 체제에 대한 대안이었다.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없는 이들에게 일은 창조적 노동이 아니라 고역이다. 고역으로서의 노동은 비인간화를 가속화시킨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히브리들에게 제시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비옥한 땅을 일컫는 말이라기 보다는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사는 세상을 암시하는 말일 것이다. 출애굽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 나일강물이 피로 변한 사건은 그 위대한 문명이 사실은 밑바닥 계층 사람들의 피를 통해 형성된 것임을 가리킨다. 야훼 신앙은 이처럼 당파적이다. 하지만 그 것은 보편을 지향하는 당파성이다. 헤게모니 장악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광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살 떨리게 경험하는 학교였다. 만나는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졌을 때 주어졌다. 만나는 제대로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친다. 그것은 하늘로부터 받아먹는 것이고, 필요한 이들과 나누는 것이다. 밥을 함께 나눔으로 그들은 한 식구가 되었고, 진정한 공동체를 이루었다. 공동체를 뜻하는 community는 ‘서로 함께’라는 뜻의 ‘com’과 ‘선물’이라는 뜻의 ‘munus’가 결합된 단어이다. 신앙 공동체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때 든든히 서 간다. 초대교회의 애찬은 바로 이런 공동체의 이상적인 모습을 잘 보여준다.

 

신앙 공동체는 또한 하나님의 파토스를 함께 느끼는 이들을 통해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린다.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나그네,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을 외면할 때 우리는 예수님도 외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을 약자들 속에 숨겨 놓으셨다. 그들 앞에 멈춰서고, 곁에 다가서고, 그들의 몸에 손을 대고, 그들을 돕기 위해 위험을 감수할 때 생의 비애는 줄어들고 내적 자유의 공간은 늘어난다. 신앙 공동체는 자신이 몸 담고 있는 사회적 세계의 민중적 현실에 연루되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가끔 남은 목회 은퇴 후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는다. 참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별다른 목표를 세우지 않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색하게나마 대답한다.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는 말을 실감하고, 삶을 이웃과 더불어 누리는 축제로 경험하도록 돕고 싶다고 말이다. 신앙생활이란 우리를 동화시키려는 세상의 인력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주하여 하나님 마음이라는 중심을 향해 순례를 계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슬아슬하지만 즐거운 탈주이다. “여행자는 요구하고 순례자는 감사한다”는 중세의 격언이 떠오른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순례자가 되어야 한다. 삶의 모든 순간은 그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안내인이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출구인 동시에 입구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을 통해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 그 꿈이 현실이 되게 하는 일, 그것 말고 다른 목표를 나는 알지 못한다.

 

김기석/청파교회 원로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