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혀가시는 예수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7)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 수난곡
No. 18 잡혀가시는 예수
마태수난곡 1부 32b번~33번 마태복음 26:47~50 | |||
32(26)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47. Und als er noch redete, siehe, da kam Judas, der Zwälfen Einer, und mit ihm eine große Schar, mit Schwerten und mit Stangen, von den Hohenpriestern und Ältesten des Volks. 48. Und der Verräter hatte ihnen ein Zeichen gegeben und gesagt: Welchen ich küssen werde, der ist's, den greifet. 49. Und alsbald trat er zu Jesum und sprach: | 47.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열둘 중에 하나인유다가 왔는데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가 검과 몽치를 가지고 그와 함께 하였더라. 48. 예수를 파는 자가 군호를 짜 가로되 내가 입맞추는 자가 그이니 그를 잡으라 하였는지라. 49. 곧 예수께 나아가 |
대사 | 유다 | 49. Gegrüßet sei seist du, Rabbi! | 49.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49. Und küssete ihn. 50. Jesus aber sprach zu ihm: | 49. 하며 입을 맞추니 50. 예수께서 가라사대: |
대사 | 예수 | 50. Mein Freund, warum bist du kommen! | 50.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50. Da traten sie hinzu, und legten die Hände an Jesum, und griffen ihn. | 50. 이에 저희가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
33(27) 코멘트 | 듀엣 (소프라노 알토) & 합창 | SOLI So ist mein Jesus nun gefangen. CHOR Laßt ihn! haltet! bindet nicht! SOLI Mond und Licht Ist vor Schmerzen untergangen, Weil mein Jesus ist gefangen. CHOR Laßt ihn! haltet! bindet nicht! SOLI Sie fuhren ihn, er ist gebunden. CHOR Sind Blitze, sind Donner in Wolken verschwunden? Eröffne den feurigen Abgrund, o Hölle; Zertrümmre, verderbe, verschlinge, zerschelle Mit plötzlicher Wut Den falschen Verräter, das mördrische Blut! | 솔로들 오 그렇게 나의 예수가 지금 붙잡히셨네. 합창 그를 놔 줘라! 멈추어라! 그를 풀어줘라! 솔로들 달과 그 빛도 슬픔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는구나. 나의 예수가 붙잡히는 모습에 합창 그를 놔 줘라! 멈추어라! 그를 묶지 마라! 솔로들 그를 끌고 가네. 그는 묶이셨네. 합창 번개여, 천둥이여, 구름 사이로 사라져 버렸는가! 오, 지옥이여! 불 구덩이를 열어라 당장 분노를 터뜨려 저들을 파괴하고 파멸시키고 삼켜버리고 박살내어라 저 거짓된 배반자들을, 살인자의 피를! |
거기 너 있었는가?
유다가 칼과 몽치를 든 큰 무리들과 함께 나타납니다. 에반겔리스트가 이 장면을 이끌어가는 것을 대본과 함께 유심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에반겔리스트는 마치 청중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변사처럼 능수능란하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성경원문 뿐만 아니라 루터도 한편의 이야기로서 십자가 사건을 번역했고 바흐도 루터의 의도를 파악하여 음악적으로 이 이야기를 극대화 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한 편의 ‘이야기’로서 들어야 합니다. 찬송가 147장 ‘거기 너 있었는가/Were you there’의 가사처럼 우리는 십자가 사건 속으로 들어가서 그 일의 목격자요 증인이 될 때 십자가의 은혜를 보다 깊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로 만나는 십자가 사건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복음서의 초기 형태는 예수의 어록이었습니다. 예수 어록으로 전해진 복음서에는 십자가 사건이 없었습니다. 이후에 십자가 사건을 전달하기 위해서 이야기의 형식이 필요했고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가 추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인 통일성을 위해서 내러티브가 복음서 전체를 이끌게 된 것이지요. 아무튼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한 편의 이야기로서 들을 때 가장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습니다. 현장의 목격자로서 참여한다면 더할 나위 없지요. 그런 면에서 복음서에 기록된 십자가 사건에 코멘트와 기도가 추가 되어 그 위에 음악이 입혀진 마태수난곡은 십자가 사건을 마치 그곳에서 만나는 듯한 감상을 전해 줍니다. 독일 남부의 작은 마을 ‘오버암머가우/Oberammergau’에서는 1634년 이래 거의 4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매 10년 마다 수난극(Passionsspiel)이 펼쳐집니다. 온 마을이 수난극의 무대가 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배우로서 뿐만 아니라 십자가 사건의 증인으로 참여합니다. 예정대로라면 올해 5월에 열려야 하지만 코로나 전염병으로 인해 2022년으로 연기되었다고 합니다. 제 소원이 있다면 그때 까지 이 연재를 마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5월에(Im wunderschönen Monat Mai)’ 바흐가 살았던 도시들을 순례하고 오버암머가우의 수난극에 십자가 수난의 증인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독일 오버암머가우 수난극(Oberammergau Passionsspiel)
오늘 이야기의 바로 전 부분은 겟세마네의 기도를 끝내신 예수께서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말하심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는 예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매우 급하게 이어진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로 시작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에반겔리스트는 왜 그렇게도 급하게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것일까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중에 유다와 무리들이 들이닥쳤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아니면 그들이 살기등등하게 서둘러 왔거나 워낙 급박한 순간이라 그들이 다가오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게 느껴졌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되지는 않았지만 독일어 성경에는 ‘noch/아직'라는 부사가 쓰여 급박감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헬라어 원문에서도 ’에티/‘ 라는 단어가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새번역은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라고 원문대로 번역하여 이야기의 느낌을 더욱 살려 긴장감을 끌어 올리고 있습니다.
또한 47절을 보면 ‘Siehe!/보라!’라는 표현이 나와서 독자들을 장면 속으로 끌어들입니다. 음반을 통해 에반겔리스트의 음성으로 들어보면 훨씬 더 명확하게 들리실 것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도 ‘이두/ ’라는 단어로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성경에는 그 어떤 번역에도 이 표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성경은 공통적으로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의 측면보다는 기록의 측면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보라’와 같은 표현이 들어가는 것은 번역 상 매끄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중요한 표현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부언컨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한 편의 ‘이야기’로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순례에 동참하는 여러분들은 마태수난곡을 통해 우리말 성경의 아쉬움을 충분히 달래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 중에서 “und mit ihm eine große Schar/그와 함께 큰 무리가 왔다”라고 설명하는 장면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에 ‘Schar/무리/[샤~르]’라는 단어를 외칠 때 굉장히 높은 고음이 나옵니다. 그동안 이야기꾼으로서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고 애썼던 에반겔리스트도 예수 한 사람을 잡으려고 검과(Schwerten)과 몽둥이를(Stangen)를 들고 온 무리들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
유다와 거짓의 입맞춤
유다는 드디어 거짓의 입맞춤, 죽음의 입맞춤을 합니다. 다른 신호의 방법도 많았을 텐데 왜 하필 입맞춤이었을까요? 우리 인간이 얼마나 거짓되고 위선적일 수 있는지를 가장 극적인 방법으로 보여주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랑마저 거짓으로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또 하나, 수난 이야기에 왜 제자 유다가 중요한 역할을 했을까요? 당시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던 사람들은 너무나 많았고 예수께서 숨어 다니신 것도 아니기에 굳이 유다가 배신하지 않아도 예수를 잡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인 유다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성경은 주목하고 있을까요?
유다의 입맞춤/The Kiss of Judas, 제임스 티소/James Tissot(1836-1902), Brooklyn Museum.
슬프게도 저는 이 대목에서 어떤 목사님들의 군상이 떠오릅니다. 제자였던 유다처럼 예수의 꿈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선택 받았고 설교단상에서는 눈물과 감성적인 노래들 섞어가며 하나님과 예수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단상 아래에서는 끼리끼리 모여 자기의 자리나 물질적 이익과 욕망과 명예를 더욱 탐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이용하는 사람들, 결과적으로 예수를 배신하고 팔아버리려는 사람들 말입니다. 목회의 현장에 있다 보니 교회와 목회 자리를 사고팔며 일반인들이 상상하지도 못할 고액의 사례비와 각종 수당, 퇴직금을 받는 분들을 보아왔습니다. 제가 셈에 밝아서 돈 문제만 문제 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유다의 문제도 결국 돈으로 귀결되었듯이 오늘날과 같은 물질주의 시대에 목사가 돈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일만 악의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 의해서 오늘도 배신을 당하시고 팔림을 당하시고 잡혀가십니다. 예수를 몰랐던 사람들 보다 예수를 알았던 사람들의 배반이 주님을 더 아프게 했습니다. 그들의 책임이 더욱 큽니다. 그래서 성경은 십자가 사건에서 유다의 역할을 크게 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 예수는 이마저 다 받아주고 참아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마태수난곡의 대본인 루터성경은 “Mein Freund, warum bist du kommen/친구여, 왜 여기에 왔느냐?”라고 원문에 가깝게 번역합니다.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닐 것입니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듯이 한치 앞의 자기 운명을 모른 채 기어이 배신하고 파멸과 죽음으로 나아가는 사랑하는 제자 유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잡혀가시는 예수
유다의 신호를 확인한 무리들이 예수께 손을 대어 잡습니다. 이어 이중창과 합창이 함께 하는 곡을 위한 긴 전주가 시작됩니다. 하나의 멜로디 라인이 끝나갈 즈음 다른 음높이에서 비슷한 멜로디 라인이 다시 시작되면서 주고받는 형식을 대위법이라고 하는데 이 곡은 대위법적으로 작곡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장면에 숨어 있습니다. 예수를 붙잡기 위해 큰 무리가 왔었고 이제 예수를 묶어 끌고 가고 있습니다. 좁은 산길을 내려가느라 긴 행렬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오페라의 한 장면처럼 바흐는 대위법을 통해 그 기나긴 행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음악사적으로 볼 때 이 정도의 극적 표현은 50~100년 뒤에나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페라의 본고장인 이탈리아나 당시 오페라가 성행했던 영국에 가보지도 못한 바흐가 이렇게 놀라운 전위음악을 펼쳐 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놀랍습니다.
이 곡을 계속 들어 보겠습니다. 전주에 이어 소프라노와 알토의 이중창이 시작 되고 중간 중간에 합창이 등장하여 그 비극적인 행렬에 코멘트를 합니다. 합창은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여(56절) 숲 속에 숨어들어 몰래 그 장면을 지켜보는 제자들일수도 있고 그곳에 증인으로 참여하여 그 장면을 바라보는 우리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소프라노와 알토 솔로는 열한 번째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우리 안에 있는 여성적인 감성을 상징합니다. 소프라노는 순수한 여성적 사랑을, 알토는 공감과 모성적 사랑을 노래하는데 지금, 그 두 사랑 모두가 하나의 노래를 이중창으로 부르며 함께 슬퍼하고 있습니다. 말없이, 힘없이 끌려가는 예수의 모습에 집중하며 안타까워하고 있지요.
반면 합창은 그 장면 속으로는 들어가 있지 못하지만 최대한 가까이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며 그 감정을 좀 더 외부적이고 적극적으로 표출하고 있습니다. 합창은 이중창의 중간 중간 마다 예수를 끌고 가는 무리를 향해 애원하듯 소리치고 있습니다. ‘Laßt ihn! haltet! bindet nicht/그를 놔 줘라! 멈추어라! 그를 왜 묶느냐!’ 십자가의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들어 그곳에서 목격하고 반응하고 있는 우리들의 외침입니다. 그 애원은 점점 요청으로, 더 나아가 명령으로, 급기야 저주로 점점 강해지고 있습니다.
분노하는 신앙
그를 풀어달라는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무리들은 예수를 죄인처럼 끌고 갑니다. 도대체 지금 자신들이 어떤 분을 끌고 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로부터 명받은 일을 성공했기에 그 사실만 기뻐하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있었을 것입니다. 무지하고 미련한 앞잡이들입니다. 이를 보고 참다못한 합창단은 예수를 끌고 가는 무리와 예수를 배반하고 죽이려는 무리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하늘에 이 억울하고 답답한 상황을 토로합니다. 베이스 파트부터 시작하여 테너 알토 소프라노 순으로 한 파트씩 ‘Sind Blitze, sind Donner in Wolken verschwunden?/번개여, 천둥이여, 구름 사이로 사라져 버렸는가!’라고 하늘에 울부짖다가 종국에는 모든 소리가 섞여지고 천둥이 치고 번개가 치며 하늘이 응답하여 진노하는 소리로 변합니다. 그러다가 잠시 멈추더니 갑자기 지옥문이 열리는 듯 새로운 전개가 다시 시작됩니다.
Eröffne den feurigen Abgrund, o Hölle;
Zertrümmre, verderbe, verschlinge,
zerschelle Mit plötzlicher Wut
Den falschen Verräter, das mördrische Blut!
오, 지옥이여! 불 구덩이를 열어라
당장 분노를 터뜨려 저들을 파괴하고
파멸시키고 삼켜버리고 박살내어라
저 거짓된 배반자들을, 살인자의 피를!
거룩한 분노의 카타르시스입니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솔직한 맘으로, 시원합니다. 기독교인은 무조건 참아야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를 배반하고 죽이고 그가 품은 고귀한 뜻을 폄훼하는 자들에게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것이 나 자신을 향할 수도 있지만, 예수를 묶어버리고 배신하고 죽이는 모든 것들에 대해, 특히 이 시대의 유다들에게 분노하고 울분을 쏟아 부을 수 있어야 합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