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예수는 어디로 갔는가?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19)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 수난곡
No. 20 나의 예수는 어디로 갔는가?
마태수난곡 2부 36번 | |||
음악듣기 : https://youtu.be/VookICUXKfY | |||
36(30) 코멘트 | 알토 아리아와 합창 | SOLO Ach ! nun ist mein Jesus hin!
CHOR Wo ist denn dein Freund hingegangen, O du Schönste unter den Weibern?
SOLO Ist es möglich, kann ich schauen?
CHOR Wo hat sich dein Freund hingewandt!
SOLO Ach! mein Lamm, in Tigerklauen! Ach! wo ist mein Jesus hin?
CHOR So wollen wir mit dir ihn suchen.
SOLO Ach ! was soll ich der Seele sagen, Wenn sie mich wird ängstlich fragen! Ach! wo ist mein Jesus hin! | 솔로 아, 지금 나의 예수는 사라져버렸네.
합창 도대체 당신의 친구는 어디로 갔는가? 오,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여!
솔로 정녕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합창 당신의 친구는 어디를 향하여 갔는가?
솔로 아아! 호랑이 발톱에 걸린 나의 어린 양이여. 아! 나의 예수는 어디로 갔는가?
합창 우리들도 그대와 함께 그를 찾아 나서리.
솔로 아! 나의 영혼이 걱정스레 묻고 있는데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아아! 나의 예수는 어디에? |
나의 예수는 어디로 갔는가?
마태수난곡의 2부가 시작합니다. TV 연속극에서 지난 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여주고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 내듯 마태수난곡의 2부 또한 예수께서 끌려가신 1부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끌어옵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제 겟세마네에 덩그러니 남겨진 자신과 예수의 빈자리를 발견합니다. 예수께서 끌려가신 그 길을 속절없이 바라보다가 그 슬픈 마음을 노래합니다. 공감과 모성적인 사랑을 상징하는 알토 솔로의 노래입니다.
‘Ach! nun ist mein Jesus hin! Ist es möglich, kann ich schauen/아, 나의 예수는 사라져버렸네. 정녕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슬픔을 토로하는 독일어 감탄사 ‘Ach/아!’가 무려 네 마디 넘게 지속됩니다. 슬픔의 깊은 탄식일 수도 있고 저 멀리 사라지고 있는 예수의 마지막 뒷모습을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간절한 시선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알토의 노래 사이사이에 합창이 등장합니다. 여인은 지금 장면 안에 있고 합창은 그 밖에서 여인의 슬픔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잡히신 예수’ 조르주 루오(1871-1958), 개인소장
가장 아름다운 여인
합창은 ‘Wo ist denn dein Freund hingegangen, O du Schönste unter den Weibern/도대체 당신의 친구는 어디로 갔는가? 오,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여!’라고 노래하며 예수를 잃어버린 그 마음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지금 울고 있는 여인을 향해 ‘여자 중에 가장 아름다운 이’라고 일컫는 것은 예수를 사랑하는 여인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 그렇게 생각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여인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요란하거나 일방적이거나 심지어 스토킹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랑이 아니라 베다니에서 한 마디 말없이 예수의 발을 씻기고 그 머리에 향유를 부음으로 사랑을 표현한 여인처럼, 모든 것이 두렵고 끝난 듯 했지만 부활의 날 새벽에 예수의 무덤을 가장 먼저 찾아간 여인들처럼, 그렇게 예수의 마음과 연결되어 그 마음을 헤아리며 사랑하는 여인들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반대로 가장 아름답지 못한 여인이 있다면 예수에 대한 무지와 자신의 욕망에 의한 것임에도 예수를 사랑한다고 공공연히 떠벌리는 여인일 것입니다. 혹시, 그런 여인들 보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여인이 더 아름답지 못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몰라서 사랑하지 못할 뿐, 예수를 알게 된다면 그를 사랑하지 않을 여인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가장 아름답지 못한 여인은 예수에 대한 무지와 자신의 욕망으로 예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며 떠벌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여인만이 아닙니다. 남성에게도 모성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성별을 불문하고 모성적 사랑으로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모성적인 사랑은 상대에 집중했을 뿐인데 상대로 인하여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비로소 깨닫는 사랑입니다. 나의 원함보다 사랑의 대상 자체가 더 중요합니다. 조건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뿐만 아니라 그 마음까지도 사랑하는 굉장히 섬세한 사랑이 모성적인 사랑입니다.
진정 예수를 사랑하나요?
쉽게 말하자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믿음과 관련된 것이나 고마움에 관한 감정이지 사랑한다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를 사랑한다면 이 여인처럼 그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립니다. 진정 예수를 사랑하면 십자가 구원에 관한 교리적 해석 이전에 십자가에서 그가 겪은 고통과 아픔과 외로움을 나의 아픔으로 함께 애달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수난에 대한 깊고 생생한 묵상이 한사람의 신앙성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말끝마다 ‘예수, 예수’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대단한 신앙 같지만 진정 예수를 사랑하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사랑하면 쉽게 그 이름을 부르지 못합니다. 그를 향한 사랑이 그 이름이 담지하고 있는 그의 존재 보다 더 크기 때문에 진짜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무언가 어색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이름 보다는 애칭으로 부르는 이유와 같습니다. 이름을 불러 준다는 것은 사랑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의 이름마저 의미 없어질 정도로 그를 향한 사랑 자체가 마음에 가득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를 사랑한 사람들이 ‘주님!’이라고 부르거나 부활 아침 예수의 무덤을 찾은 여인처럼 ‘랍오니!’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저 역시 마태수난곡을 통해 예수를 다시 만나게 되니 이 사랑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관한 제 설명이 왜 궤변처럼 들리는지 알려 드리겠습니다. 먼저 사랑은 말로 분석하고 해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한계를 뛰어 넘는 예수의 사랑에 인간의 언어를 통해 다가서려 하니 무력감을 느낍니다. 다음으로, 교회에서 믿음을 너무나 강조하다보니 사랑에 대한 오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강요나 반복이나 의지로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믿음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고 믿는다고 해서 사랑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서로 마음이 통해서 오고가는 가운데 더욱 깊어집니다. 진짜 사랑하면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머리와 의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의 마음과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가장 깊이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수난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 수난 이야기를 가장 드라마틱하고 섬세하고 전인적으로 그려내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이야 말로 우리 신앙에 있어서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바흐의 마태수난곡은 소재적인 기독교 예술이 아니라 기독교신앙을 가장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참 좋은 말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고귀한 단어가 교회에서 남발되는 가운데 사랑의 고귀함이 점점 옅어지고 사랑이 아닌 것이 사랑으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때때로 교회가 사랑의 이름으로 여전히 예수를 이용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사랑은 기독교 신앙을 진정 이해하기 위한 핵심입니다. 그러나 습관적으로 남발되는 사랑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해도 좋습니다.” 라고 말했는데 그는 진정 기독교신앙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예수와 모차르트
진짜 사랑할 때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사랑은 남발해서는 안 될 너무나 고귀한 단어입니다. 모차르트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유럽의 귀족들 앞에서 연주를 하러 다녔습니다. 어린 모차르트는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제가 앞서 설명 드린 그 사랑으로 음악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삶에는 굴곡이 많았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정말이지 그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 주신 천사였습니다. 나이가 어릴 때에는 아버지를 따라 어디서든지 즐겁게 연주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사람들이 자기처럼 음악을 사랑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신기한 구경거리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어린 모차르트는 연주를 하기 전에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Liebst du mich?/나를 사랑하시나요?"
아마,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모차르트를 사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음악을 듣기 위해 별 생각 없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모차르트는 자신의 사랑의 기준으로 그들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너무나 슬프게도 그렇게 살았던 그의 삶은 너무나 불행했습니다. 결국 그는 서른다섯 살의 나이에 지독한 가난과 병으로 인하여 사람들의 무관심 가운데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고 무덤을 파는 사람들만 지켜보는 가운데 여러 시신들과 뒤섞여 비엔나 외각의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나중에 어렵게 찾은 그의 무덤 자리에는 아기 천사가 얼굴을 감싸고 울고 있는 동상이 세워져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도 모차르트와 같은 마음이셨을 것 같습니다. 남발되는 거짓 사랑에 깊은 상처를 입으셨기에 당신을 진짜 사랑하는 것이 맞는지 정말 알고 싶으셨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 다시금 물으신다면 이제는 쉽게 대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를 정말 사랑하는지, 그의 마음과 연결 되어 있는지, 그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느끼는지, 예수라는 이름보다 더 큰 의미로서 그를 나의 ‘님’으로 모시고 있는지, 그를 사랑해서 그와 같은 삶을 살고자 애쓰고 있는지를 돌아본 뒤에 대답해야 할 것입니다. 아니, 차라리 대답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향유를 붓는 것과 같은 사랑과 희생의 행동으로, 두려움을 누르며 무덤가에 함께 있어 주는 머묾으로 그를 말없이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도 그를 찾아 나서리
알토의 슬픔이 계속 더해질수록 합창도 점점 더 적극적으로 그 마음을 위로합니다.
“Ist es möglich, kann ich schauen?/정녕 그를 다시 볼 수 있을까?”
“Wo hat sich dein Freund hingewandt!/당신의 친구는 어디를 향하여 갔는가?”
끝내 솔로가 “Ach! mein Lamm, in Tigerklauen! Ach! wo ist mein Jesus hin?/아아! 호랑이 발톱에 걸린 나의 어린 양이여. 아! 나의 예수는 어디로 갔는가?”라고 깊은 슬픔을 토로하자 합창은 “So wollen wir mit dir ihn suchen/우리들도 그대와 함께 그를 찾아 나서리”라고 노래하며 함께 함을 약속합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제자들이 함께 해 주기를 원하셨듯이 ‘사랑은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성경의 아가 6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아가 6:1
예수를 향한 사랑을 아가의 연인의 사랑에 비교하여 표현한 것이지요. 바흐의 교회음악을 듣다 보면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먼저 대본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생소한 아가서의 한 구절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연결시킬 수 있다는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나 깊이 있고 폭 넓게 이해하고 있었는지 보여 줍니다.
또한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에 대해서 경건하고 절제되고 엄숙할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예수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는 매우 인격적이며 진실하고 아름답게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승천 오라토리오(BWV11)에서 예수의 승천을 사랑하는 예수와의 이별로 표현하리라고는 오늘날의 신앙인이라면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 시대의 신앙으로 부터 진정 배워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 성경에 대한 사랑과 예수에 대한 인격적이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모성적 사랑일 것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