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 2020. 4. 30. 20:38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1)



BWV 244 Matthäus-Passion/마태수난곡

No. 22 침묵하신 예수


마태수난곡 239~41

마태복음 26:60~63a

음악듣기 : https://youtu.be/m_grDwFhy40

39(33)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0.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하더니 후에 두 사람이 와서 61.이르되

60. Und wiewohl viel falsche Zeugen herzutraten, funden sie doch keins. Zuletzt traten herzu zween falsche Zeugen, und sprachen :

대사

두 증인

이중창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

61. Er hat gesagt: Ich kann den Tempel Gottes abbrechen und in dreien Tagen denselben bauen.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2.대제사장이 일어서서 예수께 묻되

62. Und der Hohepriester stand auf und sprach zu ihm:

대사

대제사장

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62. Antwortest du nichts zu dem, was diese wider dich zeugen?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63a.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63. Aber Jesus schwieg stille.

40(34)

코멘트

테너

레치타티보

나의 예수는 아무 말 없이

터무니없는 거짓에 침묵하고 계신다

그것은 그 깊은 자비하신 뜻으로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을 준비를 하심이며,

우리도 그와 같은 고난에 놓이게 될 때

그의 모습 본받아

어떠한 박해 속에서도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Mein Jesus schweigt

zu falschen Lügen stille,

Um uns damit zu zeigen,

Daß sein erbarmungsvoller Wille

Für uns zum Leiden sei geneigt,

Und daß wir in der gleichen Pein

Ihm sollen ähnlich sein,

Und in Verfolgung stille schweigen

41(35)

테너

아리아

참으리, 참으리!

거짓의 혀가 나를 쏘아댄다 할지라도

아무 잘못 없이 고난을 당하고

모욕과 조소를 당하더라도

! 사랑의 하나님이 아시고

내 마음의 결백을 보상해 주시리라.

Geduld, Geduld !

Wenn mich faIsche Zungen stechen

Leid ich wider meine Schuld

Schimpf und Spott,

Ei! so mag der liebe Gott

Meines Herzens Unschuld rächen

 

한 공간 두 장면

 

대 제사장의 집이라는 한 공간에서 두 장면이 대조적으로 펼쳐집니다. 성경에는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대제사장의 집 안에서는 예수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고,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는 베드로의 재판이 막을 올리고 있습니다. 매우 드라마틱한 대비입니다. 재판에 임하는 예수와 베드로의 모습 또한 완전히 상반됩니다.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의 집 안에서 아무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반면 대제사장의 집 뜰에 있는 베드로는 변명과, 거짓말과, 맹세와, 저주와, 예수에 대한 부인을 줄줄이 늘어놓습니다.

 

대제사장의 집은 대제사장의 집례 하에 희생의 제사가 드려지는 성막을 떠오르게 합니다.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따르면 성막 안쪽에 뜰이 있고 뜰에는 번제단과 물두멍 등이 있으며 그 안쪽에 성소와 지성소가 분리되어 있는데 지성소에는 법궤가 놓여 있습니다. 마태복음 2658절에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갔다고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은 번제단과 물두멍 등이 놓여 있어 각종 제사가 이루어지는 성막 뜰이라는 공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인간 구원을 위한 어린 양이신 예수께서는 제사장을 거치셔야 했고 지금 말 없는 희생 제물이 되어 성막 안쪽에 계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를 죽이려했을 뿐이지만 결국 자신의 의도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속제의 제사를 집례하고 있습니다. 악인들은 자신들의 간계를 부릴 뿐이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구원을 한 단계씩 온전히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베드로전서 1:18~19).

  

거짓말의 특징

 

예수를 모함하여 죽이기 위한 거짓증인들이 많이 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동원되었지만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다른 방법을 찾아 두 증인을 불러냈습니다. 그 방법은 말꼬리를 잡고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옳거니 하고 벌떡 일어섭니다.

 

저들의 모습은 거짓에 사로잡힌 자들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전에 두 사람이 말싸움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섣불리 개입할 수 없는 상황이라 듣고만 있었습니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제가 모르는 감정적 앙금이 있었기에 그런 상황에 이르렀겠고 제가 온전히 판단할 만한 처지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대화 내용으로만 볼 때 유독 한 분에게 문제가 있어 보였습니다. 심각한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의심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떤 상황 때문에 말싸움이 시작되었는데 그분은 그 상황에 관한 자신의 논리가 막힐 때 마다 과거에 있었던 다른 일들을 끄집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상대방의 말 꼬리를 잡고 계속 싸움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끊임없이 거짓증언을 내세우고 결국 말꼬리를 잡음으로 공격하는 대제사장 무리와 똑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거짓에 의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두 증인의 말은 음악적으로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지휘자에 따라 솔로 이중창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리히터는 바흐가 악보에 지시한 대로 알토와 테너의 합창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거짓 증언을 보시기 바랍니다. 알토가 먼저 말을 시작하면 테너가 바로 뒤에 앵무새처럼 따라하다가 함께 끝을 맺습니다. 청문회에서 자주 보셨듯이 거짓 증언을 하는 사람들은 짜낸 듯 똑 같은 말을 반복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거짓말의 특징이지요. 반면 진실은 그것을 전하는 방법 또한 솔직하고 자유롭습니다. 매번 다르게 이야기 하는 것 같아도 변함없는 한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네 개의 복음서가 저마다 다르고 서로 상충하는 진술도 있지만 결국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흐는 이 부분을 아주 잘 포착했습니다.

 

거짓은 긴장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이야기가 반복될 때 오히려 거짓을 의심할 수 있습니다. 거짓에는 박제된 진열품처럼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진실에는 생명이 있고 진실과 자유는 함께 거닙니다. 그래서 표현이 때마다 달라지지만 똑 같은 진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한편, 지휘자 칼 리히터는 합창단을 스타카토로 노래하게 함으로 거짓 증인들이 경직된 마음과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증언하는 것을 표현하게 합니다. 아마 제사장들이 입을 맞춰서 증인하라고 시켰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이 매우 경직되었을 것입니다. 그 스타카토는 마치 예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증인의 증언 후에 나오는 오르간과 콘티누오의 후주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요? ! 맞습니다! 마치 광대들이 광대놀음을 할 때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들립니다. 그들은 경직된 자세로 나름 열심히 거짓증언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거짓 증언이 진리 자체이신 예수 앞에서 얼마나 어이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를 그 후주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침묵하신 예수

 

이에 대제사장은 이거다 싶었는지 무릎을 치고 일어납니다. ‘Und der Hohepriester stand auf/대제사장이 일어서서라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에서 일어나다라는 의미의 독일어 동사는 ‘aufstehen’입니다. ‘위쪽으로라는 의미의 ‘auf’서다라는 의미의 ‘'stehen’이 결합되어 일어서다라는 새로운 동사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는 그 과거형인 ‘aufstand’가 쓰였습니다. 이런 동사를 분리 동사라 하는데 분리 동사는 문장에서 쓰일 때 앞부분이 분리되어 뒤쪽에 붙게 됩니다. ‘Und der Hohepriester stand auf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에서는 ‘auf’가 갑작스런 높은음으로 처리되고 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이 이거다싶은 마음에 무릎을 탁 치고 일어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가장 먼저 알아봐야 할 대 제사장이 오히려 그를 죽일 억지 명분을 찾고 좋아하는 모습이나, 예수의 길을 제시하고 그 길을 따라야 할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의 길을 외면하고 그 길을 더럽히고 있는 모습이나 참 어이없기 그지없습니다



39번곡의 마지막 부분. 두 번째 마디에서 증인들(A., T.)의 증언에 이어지는 후주의 16분 음표 군은 우스꽝스러운 거짓 증언을 표현하고 있으며 네 번째 마디 에반겔리스트(Ev.)의 내러티브에서 auf에 사용된 높은 음은 대제사장(P.)이 벌떡 일어나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마디는 예수의 침묵을 극대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어 대제사장은 기세등등하여 예수를 몰아세웁니다. “Antwortest du nichts zu dem, was diese wider dich zeugen?/아무 대답도 없느냐 이 사람들이 너를 치는 증거가 어떠하냐?/” 예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이사야 537절 말씀대로 희생의 어린양이 되는 길을 완전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이 부분에서 ‘Aber Jesus schwieg stille/그러나 예수는 말없이 침묵하셨다라고 하는 에반겔리스트의 노래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대사의 앞뒤로 상당히 긴 침묵이 자리하고 있는데 원래 악보에는 그만한 길이의 쉼표가 들어있지 않습니다. 또한 그러나 예수는 말없이 침묵하셨다라는 내러티브 역시 굉장히 느린 템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연주자들의 의도된 표현이지요. 이 음반에서 지휘자 리히터와 에반겔리스트 헤플리거는 단 두 마디 밖에 되지 않는 이 부분을 무려 ‘28!’라는 긴 시간 속에 담고 있습니다. 연주음악에서 이정도의 쉼표와 느린 템포는 느리다는 표현을 넘어 영원혹은 침묵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침묵으로 노래한다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침묵을 노래할 수 있는 음악가가 가장 실력 있는 음악가입니다. 어지간한 음악적 자신감과 고집 없이는 이렇게 느린 템포로 침묵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침묵을 듣는 것입니다. 소리가 없는 곳에 침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침묵이 있어야 할 곳에 침묵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다른 어떤 음악과 달리 마태수난곡에서의 침묵은 음악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이사야 53:7). 

 

이어지는 테너 레치타티보는 그 어떤 아리아보다도 아름답습니다. 느린 템포로 한 음 한 음 울리는 반주는 변호하고 항변하고 바로잡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는 침묵의 인내를 표현합니다. 이 코멘트는 예수께서 침묵하신 이유가 우리를 대신해 고난 받기 위함이며 우리도 고난 가운데서 침묵해야함을 몸소 모여주시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을 준비를 하심이며,

우리도 그와 같은 고난에 놓이게 될 때

그의 모습 본받아 어떠한 박해 속에서도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

 

Für uns zum Leiden sei geneigt,

Und daß wir in der gleichen Pein

Ihm sollen ähnlich sein,

Und in Verfolgung stille schweigen

 

이 가사의 독일어 표현이 의미 깊습니다. ‘Für uns zum Leiden sei geneigt/우리를 위해 고난을 받을 준비를 하신다라는 표현에서 관용적 표현 ‘geneigt sein, et. zu tun’무엇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는 의미입니다. 동사 ‘neigen’몸을 기울이다라는 뜻인데 우리가 무언가 시작하기 전에 몸을 그 방향으로 숙이고 무언가 관심이 가는 방향으로 몸이 쏠리듯 의도나 호감을 향한 지향성을 표현하기도합니다. , 예수는 이제 이 침묵을 시작으로 우리를 향한 사랑과 십자가의 고난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셨습니다. 더불어 우리도 예수를 따르는 과정에서 박해(die Verfolgung)를 당할 때, 베드로처럼 거짓말이나 변명을 하지 않고 어느 시점부터는 침묵해야 함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언제나 몸소 보여 주신 모범을 통해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Geduld/참으리!

 

이어지는 유명한 테너 아리아 ‘Geduld/참으리는 사랑의 하나님이 그 침묵의 인내를 보상해 주실 것을 믿고 노래합니다. 이 유명한 아리아의 반주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단 하나의 악기가 쓰이고 있습니다. 바흐의 악보에서는 콘티누오를 제외하고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의 솔로가 반주를 하고 있습니다. 현대연주에서는 첼로가 비올라 다 감바를 대신하기도 하는데 우리가 듣고 있는 리히터의 음반에서는 여러 대의 첼로와 콘트라베이스가 한 대의 악기처럼 함께 연주하면서 그 무게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반면 아르농쿠르, 가디너, 코프만, 헤레베헤, 스즈키와 같은 부류의 지휘자들이 추구하는 원전연주(Historically informed performance/HIP or period performance) 음반들은 한 대의 비올라 다 감바가 반주를 도맡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원전연주(HIP)를 선호합니다. 바흐 이후로 악기들은 끊임없이 진화했고 한 대의 비올라 다 감바로 반주를 도맡게 하는 것은 음향적으로 빈약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곡을 작곡했을 당시에 바흐가 상상했던 바로 그 사운드를 재현해 내는 것이 가장 좋은 음향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은 모두 작곡된 시대의 악기로 연주해야 최선의 결과를 낼 수 있다.”고 지휘자 아르농쿠르는 말했었지요.

   

세상의 모든 아침

 

비올라 다 감바는 바흐 당시에 첼로의 역할을 했습니다. ‘비올라는 찰현악기인 비올 족악기를 의미하며 다 감바는 다리 사이에 끼고 연주한다는 의미입니다. 첼로의 원래 이름은 ‘Violoncello(비올론첼로)’인데 비올족의 작은(cello)악기라는 의미로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올이라는 이름이 두 악기가 같은 혈통 안에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날에도 첼로의 약자는 ‘Vc.’로 표기됩니다.

 

비올라 다 감바는 첼로와 비슷한 모양이지만 활을 잡는 법도 다르고 현의 개수도 6개 혹은 7개입니다. 또한 첼로와 달리 운지를 위한 프랫(fret)이 있습니다. 현은 양의 창자를 꼬아서 만든 거트현을 사용하는데 첼로와 같이 고 장력 메탈 현이 내는 팽팽하고 섬세한 소리를 내지는 못하지만 반대로 부드러우면서도 거친 질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현 자체가 유연하기 때문에 비올라 다 감바의 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첼로 보다 역동적인 보잉(bowing, 활놀림)이 필요한데 이렇게 온 몸으로 연주하는 듯한 시각적인 퍼포먼스도 비올라 다 감바 만의 또 다른 매력입니다.

 

이 악기를 제대로 소개해 드리기 위해서는 영화 한 편을 소환해야 할 것 같습니다. 1991년 개봉한 프랑스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Tous Les Matins Du Monde)’은 바흐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프랑스의 비올라 다 감바의 두 거장 마랭 마레(Marin Marais)와 쌩뜨 꼴롱브( Sainte-Colombe)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영화에서의 실재 연주는 현존하는 비올의 거장 조르디 사발(Jordi Savall)이 담당하였습니다.

 

영화에는 마랭 마레가 스승 꼴롱브의 숲속 오두막을 찾아 몰래 그의 연주를 듣는 장면이 나옵니다. 꼴롱브는 활을 켤 때 내가 찢는 것은 살아 있는 내 작은 심장 조각이다라는 본인의 말 그대로 아무도 들어 주지 않는 그 곳에서 영, , 육을 쏟아 부으며 홀로 연주를 합니다.

 

바흐가 예수의 침묵에 관한 이 노래의 반주에 비올라 다 감바 단 한 대를 사용한 것은 바로 꼴롱브가 내고 있는 그 소리를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마랭 마레처럼 우리도 조용히 한 고집스런 음악가를 찾아 가면 어떨까요? 아침 안개처럼 모든 감성과 소리와 영성이 낮게 침잠해 있는 영화 속의 분위기를 기억하며 영화를 가득 메우고 있는 비올라 다 감바 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이 노래의 선율로 연결이 될 것입니다. Geduld의 전주 소리가 들리시나요? 이 감바 소리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1727년 겨울 라이프치히 토마스학교(Thomasschule) 건물 2층에 있는 바흐의 방에 다다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살며시 방문을 열면 램프의 불꽃이 흔들리는 추운 방에서 챔발로 앞에 앉은 바흐가 온전히 음악에 사로잡힌 채 흥얼거리며 악보에 거침없이 이 노래를 새겨놓고 있을 것입니다. 바흐의 자필악보를 보십시오. 제게는 어떤 위대한 그림 보다 더 아름다워 보입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그림을 첨부하지 않았습니다


     

마태수난곡 41번곡 ‘Geduld!’의 자필악보 부분. (ca.1736~1740)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정성을 다하며 꾹꾹 눌러 활을 긋는 비올라 다 감바의 투박한 연주는 꼴롱브의 표현 대로 예수의 심장을 찢는소리였습니다. 이 노래의 비올라 다 감바 소리는 예수께서 느꼈을 법한 홀로됨과, 침묵하기 위해 두려움과 억울함을 억누르며 소리 없이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침 바흐의 먼 후계자인 33대 토마스 칸토어(Thomaskantor)인 게오르크 크리스토프 빌러(Georg Christoph Biller)의 지휘로 비올라 다 감바의 함께 연주한 영상이 있어 여러분들께 깊은 마음으로 소개합니다. 예수의 침묵을 깊이 묵상함으로 오늘도 예수의 마음에 한 걸음 더 다가서는 시간이 되셨기를 소망합니다.

 

https://youtu.be/68ubLDhqwlw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이천중앙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며 중앙연회 사모합창단을 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