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이루는 장엄한 세계
소리가 이루는 장엄한 세계
어제 모임을 마친 후 잘 들어가셨는지요? 모처럼의 만남이 참 반가웠습니다. 더 깊은 대화의 자리에 동참하지 못한 것이 영 아쉬웠습니다. 요즘 저를 사로잡고 있는 통증 때문에 잠을 자꾸 설치다 보니 몸에 면역력이 떨어져서인지 컨디션 조절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찬 바람에 연신 옷깃을 여미면서도 젊은 시절을 반추하는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대학원 시절에 만났으니 벌써 30년도 더 되었네요. 생각해보면 미숙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우리는 나름대로 참 치열했습니다. 진실의 옷자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은 열망과 시대가 빚어내는 우울이 미묘하게 뒤섞여 우리는 비틀거리곤 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사는 모습도 자리도 달라졌지만, 그래도 우리는 같은 중심을 향해 걷고 있는 거지요? 가슴 가득 이상한 안도감이 몰려왔습니다.
쌀 붇는 소리에 대해 말씀하셨지요? 쌀을 불릴 때 나는 소리라 하셨는데 저는 그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내에게 물었더니 그 미세한 소리 흉내를 내더군요. 그 소리는 쌀알 속에 있는 무수히 많은 틈이 벌어지는 소리이겠지요? 세상에, 그런 소리를 들으려면 얼마나 고요해야 하는 것일까요? 일전에 어느 수목원에 갔을 때 직원이 청진기를 가져오더니 나무에 물 오르는 소리를 들어보라 하더군요. 나무 밑둥께에 청진기를 대고 귀를 기울여봤지만 저는 그 소리를 분간해내지 못했습니다. 노자는 다섯 가지 소리가 우리 귀를 어둡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나도 다섯 가지 소리에 중독이 된 모양입니다.
이른 새벽, 홀로 잠에서 깨어나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았습니다. 바람이 창문을 흔드는 소리, 째깍째깍 울리는 시계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좀 황량하지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유년시절 나의 심성과 정서를 형성했을 소리가 무엇인지 떠올려보기로 한 것입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아랫목에서 막걸리가 익어가며 내던 소리입니다. ‘보글보글.’ 밀주 단속이 이뤄지던 시대였지만 농민들은 몰래 집안에서 막걸리를 담그곤 했지요. 그 시큼하고 달착지근한 냄새가 나는 듯합니다. 단속반이 떴다는 소식이 다급하게 전해지면 술 단지를 들고 산으로 뛰어올라가던 어른들의 모습도 오련하게 떠오릅니다. 아궁이에서 솔가리가 탈 때 나는 소리, ‘자작자작.’ 밀짚을 태울 때 나는 소리, ‘타닥타닥.’ 군불에 묻어두었던 밤 껍질이 터지는 소리, ‘탁탁.’ 댓닢을 스쳐온 바람소리, ‘사르륵사르륵.’ 솔숲을 거쳐 온 바람소리, ‘솨아솨아.’ 비가 그친 후 혹은 볕이 나 지붕 위에 있던 눈이 녹아 내려 섬돌 위에 떨어지는 소리, ‘똑똑똑.’
황소의 울음소리도 들려오는 듯합니다. 정지용은 소 울음소리를 ‘금빛 게으른 울음’이라 했지요? ‘음머’ 하는 소리에 담긴 그 울림과 빛깔과 정서를 어쩌면 이리도 적확하게 표현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10여 마리의 새끼들이 젖이 돌게 만들려고 어미 돼지의 가슴을 일제히 들이받을 때 ‘꿀꿀꿀꿀’ 신음하던 돼지의 울음소리도 들려오는 듯합니다. 닭이 홰치는 소리, 솔개 그림자가 마당귀를 스치면 ‘구구구구’ 소리를 내며 새끼들을 불러 품에 안던 암탉 소리,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린 동녘 하늘을 향해 ‘꼬끼오’ 하고 울어 새벽을 깨우던 수탉의 울음소리, 한낮의 무료함을 깨뜨리려는 듯 혼자 ‘컹컹’ 짖는 누렁이 소리. 그 다양한 소리가 어울려 한 세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 각종 새 소리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참새, 직박구리, 꾀꼬리, 뻐꾸기, 꿩, 멧비둘기, 뜸부기, 부엉이, 소쩍새 울음소리도 제 귀에 들려오는 듯합니다.
어머니의 다듬이질 소리, 기억나시지요? 나무 방망이와 다듬잇돌과 피륙이 이루어내는 리드미컬한 소리는 정말 멋스러웠습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다듬이질을 할 때는 어쩌면 그렇게 박자를 잘 맞추는지 경이롭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집에서 난타 공연을 본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이불 호청이나 큰 빨래를 둘이 마주잡고 ‘쫙쫙’ 펴는 소리, 다림질 하기 위해 입에 머금은 물을 ‘푸푸’ 옷에 뿌리는 소리도 그립습니다.
한 여름, 비가 내리면 함석 차양을 한 이웃집으로 달려가 빗방울이 함석을 두둘기는 소리를 듣기도 했습니다. 초가집에 사는 이들은 들을 수 없었던 세련된 소리였지요. 가을이면 들판에서 참새를 쫓느라 어른들과 아이들이 어울려 내는 ‘훠어이 훠어이’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옵니다. 밤이면 벽간에서 울려나던 귀뚜라미 소리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타작마당에서 탈곡기가 돌아가며 내던 소리, ‘와릉와릉.’ 알밤이나 도토리가 가랑잎 위로 떨어지는 소리, ‘후두둑.’ 건넌방에서 아버지가 가마니를 짜는 소리, ‘탁탁.’ 추운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었던 방죽의 얼음장이 갈라지는 소리, ‘쩡!’ 바람 들어오지 말라고 여닫이 문에 발라놓은 문풍지가 우는 소리, ‘부르르르.’ 동장군의 위엄이 사뭇 느껴지곤 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들으며 살았다는 사실이 마치 신화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원형적인 삶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그 소리들이 환기시키는 것은 산업화 이전 농촌 마을의 적요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큰 욕심 없이 살던 사람들, 그래서 살풋한 정을 나누며 살던 사람들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기억의 갈피에 남아 있는 그 소리들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완강한 경계를 넘어 자연과 우리 존재를 안팎없이 연결시켜주는 매개였고, 소소한 일상에 색채감을 더하는 계기였습니다.
그 소리들은 또한 무상함 속에 깃든 영원의 편린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그 소리를 따라 무람없이 걷다 보면 어느새 숨결이 가지런해지겠지요? 고요하고 담담한 시어로 삶의 진경을 드러냈던 당나라 시인 왕유는 고요함을 익히는 것(習靜)이야말로 온후한 성품을 닦는 길이라 했습니다. 벌써 일 년 넘게 시편의 세계를 노닐고 있습니다만 볼 때마다 제 마음을 조용히 흔드는 것은 시편 19편입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편 19:1-4a).
시인은 소리 없는 소리가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씀이 마치 화선지에 배어드는 먹물처럼 세상 끝까지 번져간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어쩌면 생성과 소멸 너머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이런 소리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고요해져야 하는 것일까요? 그 고요함이 없어 우리의 일상은 비루해진 것 같습니다. 유년 시절에 듣던 소리들이 폭력적으로 제거된 후 우리 심성 또한 거칠어졌습니다. 공동 주택에 사는 이들은 층간 소음 문제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고, 관리사무소가 스피커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들의 안온한 삶을 단절시키곤 합니다. 거리를 질주하는 성마른 운전자들은 마구 경적을 울려 도시를 잿빛으로 만들고, 버스 기사가 틀어놓는 라디오 소리는 우리 의사와 무관하게 우리 귓전을 파고듭니다. 가까운 공장에서는 무시로 자르고 두드리고 갈아대는 소리가 넘어옵니다. 가히 소리의 폭력 속에 산다 할 수 있겠습니다.
정치가들의 호언장담, 계율화된 언어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종교인들의 큰 소리, 어딜 가나 안하무인격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소란합니다. 끝없이 고독한 자리를 소망했던 토마스 머튼의 심정을 알 것 같습니다. 당분간 이 복잡한 도시를 떠나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폭력적으로 추방당한 작은 소리들에 의도적으로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물론 광야에서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과 같은 이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겠지요.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일이 될테니까요. 지금도 저 창 밖에서 ‘우우’ 불고 있는 바람소리는 어쩌면 봄을 깨우는 소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봄 되어 나무에 연둣빛 물이 오를 즈음, 그리움을 안고 찾아가겠습니다. 오늘도 들길을 걸으며 돋아나는 잡초들과 이야기를 나누시겠네요. 봄빛으로 오시는 주님과 더불어 마음 넉넉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