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의 눈물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24)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24 베드로의 눈물
마태수난곡 2부 45~46번 마태복음 26:69~73 | |||
음악듣기 : https://youtu.be/YAD8bJc5SPw | |||
45(38)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69.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 69. Petrus aber saß draußen im Palast; und es trat zu ihm eine Magd, und sprach: |
대사 | 여종1 |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 Und du warest auch mit dem Jesu aus GaIilaa.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 70. Er leugnete aber vor ihnen allen, und sprach: |
대사 | 베드로 |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 Ich weiß nicht, was du sagest.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71.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 71. Als er aber zur Tür hinausging, sahe ihn eine andere, und sprach zu denen, die da waren: |
대사 | 여종2 |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 Dieser war auch mit dem Jesu von Nazareth.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72.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 72. Und er leugnete abermal und schwur dazu: |
대사 | 베드로 |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 Ich kenne des Menschen nicht.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73.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 73. Und über eine kleine Weile traten hinzu, die da stunden, und sprachen zu Petro : |
46 대사 | 곁에 섰던 사람들 (합창) |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 Wahrlich, du bist auch einer von denen, denn deine Sprache verrät dich. |
코멘트 | 에반겔리스트 |
74.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 74. Da hub er an sich zu verfluchen und schwören: |
대사 | 베드로 |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 Ich kenne des Menschen nicht.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Und alsbald krähete der Hahn. 75. Da dachte Petrus an die Worte Jesu, da er zu ihm sagte: ehe der Hahn krähen wird, wirst du mich dreimal verleugnen. Und ging heraus, und weinete bitterlich. |
에반겔리스트의 숨 고르기
장면이 바깥뜰로 바뀝니다. 오페라와 달리 오라토리오나 수난곡은 무대배경이나 분장이 없습니다. 하지만 수난곡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장면 변화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귀가 민감하신 분들은 오늘의 부분에서부터 에반겔리스트가 잠시 텀을 둔 후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나 힘을 빼고 가볍게 노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노련한 에반겔리스트인 에른스트 헤플리거는 여기서부터 이전보다 매우 차분한 어조로 노래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씀 드린 장면의 변화를 암시하기 위함입니다.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멀리뛰기 선수가 출발 전에 힘을 빼듯 가장 중요한 도약을 앞두고 숨고르기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태수난곡 전체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부인하고 심이 통곡하는 장면을 그는 그렇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종들과 아랫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바깥 뜰 중앙에는 불이 피워져 있는데 불 주변으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금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 틈바구니 속에 오늘 장면의 주인공 베드로가 앉아 있습니다.
디테일의 장인, 누가복음
네 개의 복음서 모두 이 장면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누가복음의 문학적 묘사가 놀랍기만 합니다. 누가복음 22장 55절과 56절입니다.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누가복음은 단 하나의 문장을 가지고 이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의 제자임을 숨기기 위해 몸을 최대한 움츠리면서도 너무 튀어 보이지 않도록 사람들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면서 무리 속에 섞여서 불을 쬐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생각과 감각의 촉수는 건물 안의 상황과 그들 앞에 홀로 서 있는 한 사람, 예수와 연결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그 찰나의 빈틈을 알아챈 눈치 빠른 여인이 하나 있었습니다.
누가 물어본 것도 아닌데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가 쌀쌀한 새벽공기 때문이라고 말하듯 베드로는 불 앞에서 연신 손을 비벼가며 움츠리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일행의 말에 때때로 반응하며 간간히 대화에 참여하고 있는데 메인 콘셉트는 원래 ‘별 생각 없는 아랫사람’입니다. 뜰 안쪽에서 돌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이 새벽에 주인을 모시고 나온 상황이 짜증스럽고 피곤하기만한 아랫사람인 척을 하는 게 더 편하고 위험부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있다 보니 정말로 피곤이 밀려옵니다. 힘든 하루였습니다. 배도 고픕니다. 스승 예수와의 마지막 저녁식사가 벌써 오랜 옛일처럼 느껴집니다. 예수께서 여러 번 깨우시는 바람에 겟세마네에서도 숙면을 하지 못했고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과 칼을 들고 대치하느라 몸도 천근만근입니다. 따스한 모닥불 앞에서 몸이 노곤해지니 이내 잠이 몰려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요? 타다닥! 장작이 무너지며 불꽃이 타오릅니다. 꿈을 꾸었던 건지 갑작스레 타오르는 모닥불 빛이 화들짝 놀라 깨어난 베드로의 원래의 얼굴을 스칩니다. 순간, 불빛을 사이에 두고 베드로 건너편에 있던 한 여종의 표정이 갑자기 멈춥니다.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눅 22:56’
갈릴리 사람의 낯익은 얼굴과 불안한 눈동자가 그 여종의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온 사람은 어떻게 자신을 꾸미거나 숨겨도 서울사람의 눈에 시골사람으로 보이는 법이지요. 베드로가 방심한 것도 있지만 중요한 사람들이 오가고 온갖 정치적인 모략이 일어나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의 종답게 그 여인의 눈썰미도 대단했습니다.
베드로와 우리들
여종의 말은 영어의 ‘And’와 같은 접속사 ‘Und’로 시작합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모닥불 주변의 사람들이 그 때 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하나님의 인류 구원 역사 가운데 가장 중요했던 그 순간에도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이런 저런 말과 생각으로 그 흐름에 동참하며 그 일부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마음과 영혼은 한 가닥의 가녀린 줄로 예수를 붙들고 망망대해 위에서 흔들리는 부표처럼 위태롭게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 그가 홀로 떠 있는 세상은 그 흐름이 너무나 거칠고 빠르며 그 깊이의 어두움도 까마득해 보이는 상황입니다. 그 와중에서도 베드로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아무 일 없는 척, 그들 중의 하나인 척 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은 그를 더 깊은 자괴감으로 이끌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고맙게도 그 이름 없는 여종이 베드로를 그 막막함 가운데서 깨워 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베드로는 얼른 그 자리에서 도망치기로 합니다.
70.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앞문까지 나아가니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종종 세상 속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합니다. 태연한 척 무리들에 섞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별생각 없는 아랫사람’처럼 살기도 하지만 내면은 외롭고 불안하기만합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베드로와 같은 상황을 겪어 보고 받아들이고 이겨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도 우리로 하여금 그와 같은 상황을 대면하고 이겨 내도록 이 수난의 길을 담대히 마주하고 계십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그 과정을 건너 뛴 신앙생활을 하고 싶어 합니다. 현대의 신앙인들이 크고 번듯한 교회를 선호하는 이유는 신앙생활에서의 안정감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속에서는 최대한 세상 사람처럼 살면 되고 교회에서는 그 나름대로 버젓한 건물 속에서 수많은 비슷한 사람들의 틈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안정감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대형화는 현대인의 신앙에 특화 된 현상일 뿐 결코 교회의 성숙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신앙의 필수인 것처럼 모든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세상 속에 홀로 서 있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 특히 한국교회에서 교회가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중요한 것인 맞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모든 그리스도인은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의 단독자로 서야 하며, 예수와의 일대 일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나누어야합니다. 또한 어떤 모양으로든지 자기만의 성령의 은사를 받아 세상 속에서 외로이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 나가야 합니다.
신천지나 북한 등 이단성이 강한 집단일수록 많은 사람이 모이는 행사를 자주 여는 특성이 있습니다. 2008년에는 한국에서 유명한 큰 목사님의 생일파티가 잠실 주경기장에서 열리기도 했었지요. 십자가와 부활의 예수를 진정 만나지 못함으로 진정한 영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그로 인해 존재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로 머물러 있기 때문에 때마다 그런 일들을 도모해서 안정감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의 길을 따르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뜰 안쪽 공간에서 완전히 홀로 서 있는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예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당당히 서 있는 그를 만나야합니다. 그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 예수의 길을 따르고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또한 뜰 바깥쪽의 베드로가 되어 봐야 합니다.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망망대해 가운데 세상속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존재적 불안을 견뎌 내고, 예수의 사랑을 붙들지 않고는 도무지 이 신앙을 지켜 낼 수 없음을 아는 것, 때때로 예수를 부인하고 배신하는 나약한 자신을 발견하며 통곡할 때 비로소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목소리, 막스 프룁스틀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가 듣고 있는 리히터 58년 음반에서는 한 명의 성악가가 예수와 아리아를 제외한 모든 남성 역할(유다, 베드로, 빌라도, 대제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막스 프룁스틀(Max Proebstl)이라는 성악가입니다. 그 많은 역할 중에서 그의 목소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특히 오늘의 장면에서 그는 당황한 갈릴리 시골 어부, 겉모습은 거칠지만 속은 여리고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성질 급한 베드로를 잘 그려 내고 있습니다.
막스 프룁스틀(Max Proebstl)이 역할을 맡은 베드로의 음성은 매우 사실적이고 극적입니다. 녹음 당시 프룁스틀의 나이는 45세였는데 이미 결혼한 베드로의 나이와도 잘 맞는 목소리입니다(마 8:14). 그의 대사는 투박한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가 당황하여 변명하는 모습이 그대로 표현됩니다. 그가 세 번 부인한 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70.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 70. Ich weiß nicht, was du sagest. |
72.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 72. Ich kenne des Menschen nicht. |
74.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 74. Ich kenne des Menschen nicht. |
한 여종이 모닥불 건너편에서 그를 알아보고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말하자 당황한 베드로는 우선 그 질문 자체에 대해 모른 척을 합니다. “Ich weiß nicht, was du sagest/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이 말을 하고 얼른 자리를 피하려 나가려는데 다른 여종이 또다시 그를 알아봅니다. 처음 대답이 매끄럽지 못했음을 반성했는지 이번에는 훨씬 더 강한 어조로 화를 내듯 ‘Ich kenne des Menschen nicht/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두 번째 부인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들이 더 추궁하자 그는 세 번째 예수를 부인합니다.
이 세 번째 대사를 유심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Ich kenne des Menschen nicht!” 두 번째 부인할 때와 같은 대사지만 막스 프룁스틀은 끝까지 부인을 하기는 하는데 내면적으로 자포자기하는 마음과 스스로에게 절망하는 듯한 표현까지 섞어 넣으며 이 대사를 완벽하게 구현해냅니다. 작은 역할이지만 그는 이 음반이 명반으로 길이 남는데 큰 기여를 합니다.
바로 이 세 번째 대사를 하는 도중에 닭이 우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다른 작곡가라면 어떤 식으로든 이 장면에 닭이 우는 소리를 집어넣었을 것이지만 바흐는 역시 대가였습니다. 닭소리가 들어가는 순간 전체 작품은 싸구려 뮤지컬이 되었을 것입니다. 바흐는 그가 의도한 바로 그 순간에 닭이 우는 소리가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울릴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역사상 최고의 에벤겔리스트, 에른스트 헤플리거
베드로의 세 번째 부인 후에 이어지는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74절 마지막 부분과 75절의 에반겔리스트의 내러티브를 듣고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 이야기에 빠져들어 있는 모습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에른스트 헤플리거는 이 부분에서 전무후무한 노래를 들려줍니다. 이 부분은 바흐의 마태수난곡 중에서 가장 극적인 부분이기도합니다.
곧 닭이 울더라 75.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 Und alsbald krähete der Hahn. 75. Da dachte Petrus an die Worte Jesu, da er zu ihm sagte: ehe der Hahn krähen wird, wirst du mich dreimal verleugnen. Und ging heraus, und weinete bitterlich. |
특히 마지막 분분, ‘Und ging heraus, und weinete bitterlich/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라고 노래하는 부분은 세상의 모든 극음악의 역사에서 최고 수준의 집중도를 보여 주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알고 들으시면 더 경탄하시게 될 것입니다. 헤플리거는 바로 이 부분을 노래하기 위해서 숨고르기를 하고 힘을 빼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분은 그 유명한 아리아 ‘Erbarme dich, Mein Gott/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하나님이여’를 앞두고 우리의 마음을 눈물이 터져버리기 일보 직전까지 끌고 가 줍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의 음악 듣기는 다음 곡의 도입부분까지 연결해 보았습니다. 아리아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워낙 아름다운 곡이기에 독창회에서 이 곡만 따로 발췌하여 부르기도 하고 바이올린이나 첼로나 피아노 솔로를 위한 곡으로 편곡되어 연주되기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원곡 전체의 흐름 가운데에서 듣는 것이 가장 감동적입니다. 마태수난곡의 일부로서 베드로의 눈물 장면에 이어지는 ‘기도’로서 들을 때 이 노래를 가장 깊이 있게 만날 수 있습니다.
엘 그레코 ‘성 베드로의 눈물’ (c.1587~1596)
멕시코시티 소우마야 미술관 소장
엘 그레코의 ‘베드로의 눈물’
엘 그레코(1541년경~1614년)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그의 다른 작품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 크레타섬 출신이라 ‘그레코’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는 그만의 독특한 신비적인 종교화들을 남겼습니다. 인물을 세로로 길게 표현하고 과감한 구도를 사용한 그의 그림은 삼 백 년 뒤에서야 등장하는 모딜리아니나 피카소를 연상케 할 정도로 파격적이고 강렬합니다. 종교개혁의 소용돌이가 전 유럽을 뒤 감고 있을 때, 스페인 톨레도에서 활동했던 그는 스페인으로 넘어오기 전에 머물렀던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던 당대의 매너리즘(Mannerism)화풍과 맥을 같이 하면서도 그리스 출신이라는 독특한 배경을 핑계 삼아 그만의 개성을 고집스레 표현했고 르네상스의 변방이었던 스페인에 아직 남아있던 중세적 신비의 영성을 그만의 화폭에 담았습니다. 당시 스페인은 반종교개혁 진영에 속한 국가로서 종교개혁의 흐름에 저항하며 가톨릭교회 수호를 위한 작품 의뢰가 많았고 개인적이고 신비적인 신앙과 종교적 거룩함을 강조했는데 이러한 풍토가 엘 그레코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어우러져 많은 대작을 남겼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세로형 인물구도가 ‘디자인적인 미와 작가만의 의도적 차별성’을 지향하고 있다면 엘그레코의 세로형 인물구도는 그만의 영성의 자연스러운 발로로서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느껴집니다. 사람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저는 ‘영적이다’라는 의미를 ‘육체적 감각을 포함하여 전존재로서 하나님을 인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시공간인 하늘과 영원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버티컬적인 연결!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는 인간이 하늘과 영원을 향해 영적으로 연결된 존재로서 세로로 왜곡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엘 그레코의 그림 속의 인물들은 영적인 불꽃처럼 보입니다. 불꽃이기에 경계가 불분명하고 질감도 매우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엘그레코는 그 표현을 하기 위해 소위 ‘잘 그린 그림’이기를 포기 했습니다. 톨레도에 정착한 얼마 뒤 그의 실력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린 ‘모피를 걸친 여인의 초상화’나 베네치아에 머물던 시절에 그린 그림을 보면 그가 결코 그림을 못 그리는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티치아노나 틴토레토와 같은 동시대 베네치아의 천재들과 같은 매끄러운 그림이 아니었기에 사람들의 인기와 부와 명예를 누리진 못했지만 20세기 이후 그의 그림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고 지금까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특하고 강렬한 작품을 남긴 화가로서 평가 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지금도 스페인 중부의 고도인 톨레도를 방문하면 여기저기에서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원작자의 모사품
엘 그레코의 작품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성 베드로의 눈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톨레도 대성당이나 타베라 미술관(Hospital de Tavera)에 있는 작품만을 알고 있는데 같은 이름의 동일한 작품이 톨레도에만 세 점이 전시되어 있고 미국 워싱턴의 필립스 컬렉션, 영국 버나드 캐슬의 보우즈 뮤지엄, 노르웨이 오슬로의 국립미술관에도 같은 그림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한 작가의 같은 작품이 이렇게 많으니 처음에는 당황스러웠습니다. 한 점 외에는 모사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보았지만 세계적인 미술관들이 모사품을 버젓이 전시할 이유는 없을 것이고 만일 모사품이라면 최대한 진품과 똑같이 그리려고 했을 텐데 저마다의 작품들이 제각각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토록 과감한 모사품을 그릴 수 있는 것은 원작자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엘 그레코의 일반적인 종교화에 비해서 그렇게 큰 크기가 아니고 작품 자체가 뛰어났기에 이 작품을 본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그림을 주문했고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했던 화가는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르게 여러 점의 그림을 그렸던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 관점으로 볼 때 그 중에서 가장 걸작은 멕시코시티 소우마야 미술관에 전시된 것입니다. 대서양을 건너고 그 오랜 시간을 견뎌내는 가운데 그 그림 주변에 어떤 일들이 있었고 어떤 사람들이 머물렀던 것일까 궁금해집니다. 소우마야 미술관의 그림을 가장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그림의 제목대로 ‘베드로의 눈물’ 때문입니다. 어떤 그림 보다 소우마야 미술관 그림속의 눈물이 가장 아름답게 글썽이고 있습니다.
그림 속의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시점에 있는 베드로가 아니라 그로부터 시간이 꽤 흐른 노년의 베드로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그 사건 이후로 닭이 울 때 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눈물은 더 이상 그날 밤 가야바의 집에서 뛰쳐나와서 흘린 그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림 속 베드로의 눈가를 적시고 있는 눈물 속에는 십자가의 예수, 부활의 예수께서 보여 주신 용서와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들이 맺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만나 주었던 한 사람, 갈릴리 예수를 향한 그리움이 맺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