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의 '종횡서해'

말씀에 빛을 뿌리는 묵상과 메시지

한종호 2015. 3. 8. 15:30

꽃자리의 종횡서해(7)

말씀에 빛을 뿌리는 묵상과 메시지

-김기석 목사의 《말씀의 빛 속을 거닐다》 서평 -

 

1.

김기석 목사의 글을 읽는 것은 큰 즐거움의 경험이다. 내 독서 경험의 반경에서 좀 과감하게 판단하자면 그는 이 땅의 목사들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목사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주업으로 삼는 목사에게 글을 잘 쓴다는 말은, 특히 이 땅에서 말씀이 유통되는 지형을 감안할 때, 단순한 칭찬 이상의 함의를 띤다. 그가 매우 섬세하게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하나님 말씀을 공들여 조탁하는 세공술로 전이되어 글과 함께 독자가 한없이 깊어지고 넓어지는 감화의 세계를 펼쳐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고, 겉 폼을 잔뜩 잡고 온갖 화려한 수사를 늘어놓는다고 만들어지는 세계도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글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간명하고 투명해지고 있다. 뒤틀리기보다 안정된 글의 리듬은 삶을 대하는 그의 정제된 태도를 반영하거니와, 동시에 그의 영성이 하나님의 품에 깊이 안긴 채 유영하고 있는 신호 같기도 하다.

동서양의 고전과 영성가의 명언, 시인의 정제된 시구들이 풍성하게 인용되고 접속되지만 그 모든 인용과 참조의 글들조차 그의 글 속에 용해되면서 온전히 그의 말 가운데 성육되는 진경이 그의 글 가운데 펼쳐진다. 따라서 그처럼 특출하게 글을 조탁하는 솜씨는 타고난 잔재주가 아니라, 그가 성실하게 개척해나간 숱한 책읽기 경험과 삶의 공부, 신앙의 내성을 거쳐 일구어낸 통찰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글쓰기의 진경이 이번에 나온 이 책에서도 유감없이 펼쳐져 있다. 그가 이전에 펴낸 일반 에세이집과 다르게 이 책은 성경 본문을 화두로 삼아 전개되고 있다. 그 성경은 이 책에서 요한복음에 한정되어 있지만, 그렇다고 이 책을 요한복음 주해나 강해의 성격으로 국한시켜보기도 어렵다. 어쩌면 그는 한국교회 강단에 전혀 색다른 성서 강해나 주해의 실험을 이 책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만큼 이 책의 색깔은 김기석 목사 고유의 체취로 풍성하면서도 독창적인 요한복음 해석의 보화들로 넘실거린다.

이 책의 구성부터가 흥미롭다. 저자는 요한복음 본문을 중심으로 모두 9장의 설교 메시지를 깔면서 그 전후로 또 다른 9편의 성서 에세이를 배치하는 구도를 선보이고 있다. 전자가 경어체로 발견과 각성, 권면과 기원의 형식을 쫓아 요한복음의 행간을 헤집고 있다면, 후자는 평어체로 분석과 해석, 묵상과 성찰의 방식에 따라 본문을 촘촘히 조명하고 있다.

 

 

2.

당연한 지적이지만 그가 보기에도 성경은 그 전문가들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누구든 자신의 삶을 지극하게 살아내는 방식으로 성경을 공들여 묵상할 권리가 있다. 흔히 느끼듯, 성경의 묵상은 본문에 압도되어 그 문자적 논리를 따라가는 식물성의 궤적이 아니다. 그의 말대로 “성경이 말하는 묵상은 그렇게 식물적이지 않다. 묵상은 마치 사자가 먹을 것을 앞에 두고 그르렁거리면서 냄새를 맡기도 하고, 혀로 맛보기도 하고, 씹기도 하는 것처럼 텍스트와 오감으로 만나는 것이다.”(4-5쪽)

그러나 그렇게 전투적이고 도전적인 성경 묵상의 자세가 오감의 독법을 지나 그의 가지런한 글속에 정돈될 때 그의 말들은 조야한 묵상의 찌끼가 사라지고, 놀라워라, 한 송이 꽃처럼 부드러운 초청과 권유의 메시지로 거듭난다.

이처럼 그의 글쓰기는 묵상의 발톱과 이빨을 생짜배기로 드러내는 만용과 정반대편에서 치열한 도전과 투쟁의 몸짓을 겸손한 말의 품에 쟁여두는 부드러움의 해석학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 부드러움은 자기방어적인 변명을 위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설득과 권면을 위한 목회적인 부드러움에 가까운 것이다.

실제의 성경 해석에서 그는 그 말씀에 안주하기보다 모험하며 불편함을 감내하고서라도 자신을 내던지는 활공의 길을 택한다. 도저히 기존의 권위자들이 쳐놓은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현실 안주적인 성경 묵상에 도취한 세태를 비판하면서 그는 따끔하게 일갈한다.

“달콤한 말에는 밑줄을 긋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 불편하지도 위험하지도 않게 되었다. 빚을 탕감하고 가난한 자들을 돌보라는 명령은 현실적합성이 없다며 도외시하고, 사회 정의를 요구하는 예언자들의 음성은 모른 척 외면해 버린다.”(84쪽)

3.

그렇게 요한복음을 용감하게 읽고 부드럽게 드러낼 때 요한복음의 성육하신 예수는 이처럼 시적인 아우라를 걸치고 재조명된다.

“소란한 도심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그 존재는 마치 숲속의 빈 터처럼 고요하여 주위 사람들조차 고요함으로 물들이는 사람, 그와 잠시만 함께 앉아있어도 들끓어 오르던 욕정과 미움과 시새움의 파도가 절로 잠잠해지는 사람…”(16-17쪽)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외아들로 오셔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설파하며 ‘함’에 앞서 ‘있음’의 가치를 깨쳐 보여준 게 바로 요한복음의 핵심적 ‘복음’이자 메시지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바람과 같다고 했을 때 그 해당 구절은 바람의 이미지에 대한 풍요로운 상상과 함께 어우러져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점입가경을 이처럼 아름답게 제시한다.

“바람의 ‘있음’은 언제나 사물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드러난다. 바람과 만난 나뭇잎은 살랑거리며 설렘을 드러내고, 호수의 물은 바람의 부름에 물결로 응답하고, 바람을 탄 매는 높은 하늘을 유영하듯 난다. 성령으로 난 사람에게는 억지가 없다. 시끄럽지 않다.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사람들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거기 있어 생명을 일깨우는 사람, 그가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이란다.”(44쪽)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이미지를 상투적인 성령 충만의 경험으로 연계시켜 얼마든지 투박하게 평균치 교인 대중의 인식에 호응할 수도 있으련만, 그는 그 상투적인 투박함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이렇게 공교롭게 그 이미지의 실재를 조탁하여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함을 감추고 사는 그저 그런 사람마저도 신령한 작품의 가능성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런 기발한 상상에 의지할 때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귀찮은 선악과 이야기도 새로운 해석의 돌파구를 연다. 요한복음의 존재론적인 숭고함의 신학적인 기틀 위에서 그가 재조명하는 바, “성경의 이야기꾼들이 선악과 이야기를 통해 들려주려는 것은 도덕적 분별력의 확장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을 척도로 삼는 일의 위험성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옳다는 전제하에 타자를 바라본다. 그런 바라봄 혹은 판단이야말로 모든 폭력의 뿌리이다. 예수의 시선은 전복적이다. 가장 거룩한 척 하는 이들에게서 위선을 보고, 가장 천하다고 여기는 이들에게서 거룩함을 본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눈에서 ‘티끌’을 볼 때 예수는 그들의 가슴에 있는 ‘눈물’을 본다.”(47쪽)

사소한 듯 여겨지는 지극히 작은 생명 속에서 거룩함과 눈물을 보는 예수의 시선은 곧 이 땅에 일그러진 종교, 특히 기독교의 얼굴에서 위선을 못 견뎌 그것을 뒤집고자 열망하는 저자 김기석 목사의 시선과 잇닿아 있다.

이와 같이 그의 종횡무진 요한복음 독법은 이른바 ‘영해’와 ‘알레고리’의 늪에 빠지기 쉬운 본문들에 신선한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 메시지의 신선함은 또 신산한 세상살이를 온 몸으로 감내하며 뚫고 가는 이 땅의 대다수 생활인들에게 말씀이 육체로 현전하는 사건을 일상 가운데 온전히 경험하도록 도와준다.

요한복음의 진리는 따라서 형이상학적 초월의 저편에서나 맛볼 수 있는 영적인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다. ‘영적’이라는 관형어 역시 이 땅에서 땀 냄새 나는 하루하루 삶과 동떨어진 내세의 낙원에나 어울릴 법한 그런 묘연한 영혼의 장식품이 아니다. 가령, 예배를 영과 진리 가운데 드려야 한다는 말씀과 관련하여 저자의 해석은 또 다른 파격적 전복의 명징한 실례이다.

“영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 아픔을 함께 느끼고, 하나님의 기쁨을 함께 기뻐한다. 오늘 우리 현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이 근심하고 있는데도 우리 마음이 아프지 않다면 우리는 영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이다. 영으로 예배하는 이들은 악마적 세력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면서도 낙심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 진리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이다. 나를 살리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바치는 것이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57쪽)

이와 같은 도저한 헌신의 제자도를 강조하며 이 세상의 악마적 세력과 부대껴 싸우는 투쟁의 의욕을 고취시킨다고 해서 그가 공동체 집단의 제반 운동에 개인의 자율성과 단독성을 저당 잡히는 운동권 이념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고독을 사랑하는 목사이다. 겉멋으로 고독의 폼을 잡는 게 아니라, 그 고독의 영성적 가치에 절절이 눈뜨고 그것을 그의 목회 현장, 일상의 현장에서 살아내고자 몸부림치는 흔적이 뚜렷하다. 그래서 군중을 떠나 홀로 독처하고자 움직인 예수의 동선을 서술한 짧은 한 구절에서도 그는 ‘예수 정신’을 본다.

“예수 정신은 이 ‘혼자서’라는 말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신앙은 독립, 곧 홀로 섬이다. 홀로 섬이 허락되지 않는 ‘더불어’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폭력이 될 수도 있다. 홀로 있는 시간이야말로 ‘더불어 삶’을 제대로 이루기 위한 밑절미이다.”(102쪽)

이렇게 ‘홀로 섬’과 ‘더불어 삶’을 오가며 그는 요한복음의 내밀한 빗장을 열고 독자들을 초청하며 권한다. 이제 이 땅에서 뱅뱅이질만 하지 말고 제발 도약하여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억압을 초월해보라고. 동시에 그는 이렇게 권하는 듯도 하다. 그 구질구질한 현실의 한 가운데가 바로 구원이 샘솟는 자리이니 먼 데로 한눈팔지 말고 그 일상의 세속에서 예수의 영을 살아내며 눈물 그렁그렁한 이웃들과 더불어 극진해지라고.

4.

이 책을 통해 김기석 목사는 말씀의 빛 속에 넉넉한 포즈로 행복하게 거닐어온 묵상과 성찰의 발자취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당시 신학과 종교의 지도에 길이 없는 갈릴리의 대지를 걸어 다니며 개척한 하나님 나라의 꿈이 그의 부활과 함께 ‘그 길’이 되고 ‘생명’과 ‘진리’로 꽃피어났듯, 영지주의자, 초월적 신비주의자, 심지어 얼치기 성령주의자 등에 의해 혼돈의 늪 속에 허우적대던 요한복음이 이제 이 책의 생산과 함께 희한하면서도 심오한 진경의 오솔길 하나를 얻게 된 셈이다.

보수적인 독자는 새것에 반응이 굼뜨고, 진보적인 독자는 그 새것에 퉁을 놓고 트집을 잡으며 아무것도 아닌 듯 능청을 떨기 쉽다. 김 목사의 글이 너무 순정하고 명징하여 때로 흙탕물 한 바가지를 붓고 싶은 충동이 생기고, 그 리듬이 너무 안정되어 좀 비틀고 헝클어트리고 싶은 심술이 더러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 혼탁한 정신의 망령을 벗고 겸손하게, 천천히 그의 글을 읽다보면 독자로서 나는 제 고깃덩어리 육신의 삶을 넘어서는 숭고한 존재의 의미가 내 안과 밖에 풍요롭게 꿈틀거리고 있음을 순식간 깨치게 된다.

지금도 이 책을 앞에 두고 괜스레 공손한 자세를 가다듬게 되고 사뭇 경건해진다. 그의 공들인 글 속에서 풍겨오는 삶의 무게가 뻐근하게 전달된다. 내가 걸어온 지난 30년 설교의 이력 속에 한 번도 우려내지 못한 메시지가 이 책을 매개로 상상의 진공을 울리며 파고드는 기미만은 뚜렷하게 감각된다. 정녕, 놀랍지 않은가. 우리가 한 번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요한복음의 메시지가 이 책의 행간에서 마구마구 피어나며 말씀의 향연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차정식/한일장신대 신약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