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 2020. 12. 11. 07:55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엡 2:21-22, 개역성경)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시는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교우 여러분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고 있습니다. 불안함이 우리 마음을 시시각각 괴롭히기에 우리의 방패이신 주님의 도움을 청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걸어온 한 해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또 새로운 한 해를 기획해야 하는 당회조차 비대면으로 진행해야 하는 상황이 비감스럽기만 합니다. 이것도 우리가 처한 현실이니 감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지에 흩어져서 선교 사역을 감당하던 초기 감리교도들은 모일 때마다 그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기며 찬송을 함께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애썼다고, 고맙다고 등을 토닥여 주며 격려하고 격려받고 싶습니다. 찰스 웨슬리가 쓴 찬송시가 지금도 가슴 절절하게 와닿습니다.


1절. 생전에 우리가 또 다시 모였네 예수의 보호하심을 다 찬송하리라

2절. 주 예수 은혜 힘입어 살 동안 싸움터 같은 세상에 두려움 없었네

3절. 주 예수 변찮는 큰 사랑 베푸사 이때껏 인도하셨고 늘 인도하시리

4절. 구주의 권능을 힘입고 살았네 그 은혜 찬송하려고 이곳에 모였네


통일찬송가에 들어있던 이 곡이 지금 찬송가에 빠져 있어 유감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곡조는 찬221장(주 믿는 형제들)과 동일합니다. 위의 가사를 음미하면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저는 감사의 심정에 사로잡힙니다. 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가 한 몸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고, 우리가 한 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참 고맙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 신앙생활에 큰 도전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이 마치 신앙의 중심이 해체된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배드리는 습관이 무뎌진 것은 아닌지, 교회 출석을 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많습니다. 실제로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우리 믿음은 흐릿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교우들께서 ‘언제나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우리 교회의 표어대로 살고 계심을 알기에 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동안 우리 신앙의 진실함은 일상생활 속에서 입증되어야 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이 말은 일상의 자리가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드러내는 자리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 가지 우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가 방역당국의 지침보다 선제적으로 대처해왔던 것은 교우들에 대한 깊은 신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온라인 예배 혹은 성경공부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평생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오신 분들이 느끼는 격절감과 소외감이 참 큽니다. 어떤 형태로든 접속을 유지하려고 애썼지만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주중에 가끔 본당에 올라가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있습니다. 문득 그 자리에 앉으시곤 하던 교우들의 얼굴이 떠오르면 함께 지냈던 시간을 반추하는 동시에 그분들을 위해 기도를 올리곤 했습니다. 교우들이 식탁 친교를 나누던 친교실도 거의 일 년째 쓸쓸한 고요만을 품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떠들썩한 소리가 잦아든 교육관이 무척 스산합니다. 그나마 교회학교 학생들에게 배포할 영상 자료를 만들거나 꾸러미를 싸기 위해 교사들이 찾아올 때면 공간에 활기가 넘쳤습니다.


금년 한 해 동안 속회와 선교회 모임을 거의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 소모임을 통해 경험하던 따뜻한 우애와 연대의 끈이 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합니다. 어떤 선교회 혹은 부서들은 SNS를 통해 서로 소통하고 신앙적 경험을 나누기도 하고, 성경 읽기 모임을 꾸려가기도 했습니다. 새해에는 여건이 어렵더라도 선교회와 속회가 어떤 형태로든 모임을 이어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비대면 상황에서 양질의 영상 콘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방송 미디어부원들이 보여준 사랑의 섬김과 헌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매주 자체 평가를 해가면서 개선 방향을 논의하는 과정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기 위해 노력해준 찬양대원들에게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노력을 귀히 보셨을 것입니다.


한 해가 흘러가는 동안 교우들 가운데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옮겨간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감염병에 대한 우려로 가족 중심으로 슬픔의 시간을 견뎌야 했던 이들에게 주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다른 한편 새롭게 태어나는 아기들도 많았습니다. 어려운 시기에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지속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처럼 여겨지기에 우리는 그 아기들을 하늘에서 온 메신저로 여기며 환영해야 합니다. 태어난 아기들이 부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아름다운 존재로 클 수 있기를 빕니다. 올해에도 많은 새로운 신앙의 길벗들이 우리의 순례 여정에 동행이 되었습니다. 온라인 세상은 공간적 거리를 뛰어넘는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새로운 길벗들과 함께 걸으며 우리의 경험을 함께 나눌 때 우리의 구원 이야기는 더욱더 풍성하게 변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아픈 데 신앙인이라고 하여 무탈할 수만은 없습니다. 백척간두 끝에 선 듯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는 분들도 계십니다. 미래의 전망조차 불투명하기에 더욱 절망의 어둠 속으로 내몰리는 분들도 계십니다. 혼돈과 공허에 포획되려는 순간 위로부터 오는 빛을 받아 삶의 용기를 되찾았다는 증언을 들었을 때 그저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도 촉수를 내밀어 물기를 찾는 실뿌리처럼 희망은 그렇게 조금씩 만들어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어려움에 처한 미자립교회들의 설 땅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면 됩니다. 올해도 기존의 지출 이외에도 상당히 많은 예산을 그 일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작은 개체교회들이 겪는 어려움의 크기에 비하면 우리의 나눔은 너무 미약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하나의 교회에 속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출애굽 공동체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어 울부짖을 때 하나님은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축적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나누어야만 했습니다. 성경은 그 나눔의 신비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오멜로 되어 보면,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그들은 제각기 먹을 만큼씩 거두어들인 것이다”(출 16:18). 


우리 교회가 출애굽 공동체가 그랬던 것처럼 모든 것을 똑같이 다 나눌 수는 없다 해도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우리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참 많습니다만 기후 변화에 신앙적으로 응답하는 일은 정말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그런 커다란 과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해에는 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도 더욱더 친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일에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해 우리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가는 우리’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은사가 실로 다양합니다. 은사들은 다 달라도 목표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소속감과 정서적 연대입니다. 물론 그 연대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 중심에 연결될 때 우리 사이의 거리도 좁혀질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어져 그리스도의 몸을 이룰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다양한 모습으로 갈라져 있습니다. 갈라져 다투는 이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진영 간의 싸움이 시작되면 진실은 간데없고 맹목적 투쟁만 남습니다. 이런 시기이기에 교회는 더욱 생명과 평화의 징표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혐오와 배제와 분열의 많은 부분이 교회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기가 막힙니다. 새로운 교회 운동이 벌어져야 할 때입니다. 이러한 과제 앞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제게 함민복 시인의 ‘산’이라는 시는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줍니다.


“당신 품에 안겼다가 떠나갑니다

진달래꽃 술렁술렁 배웅합니다

앞서 흐르는 물소리로 길을 열며

사람들 마을로 돌아갑니다

살아가면서

늙어가면서

삶에 지치면 먼발치로 당신을 바라다보고

그래도 그리우면 당신 찾아가 품에 안겨보지요

그렇게 살다가 영, 당신을 볼 수 없게 되는 날

당신 품에 안겨 당신이 될 수 있겠지요”


이 시에서 ‘당신’은 물론 ‘산’이지만, 그 산은 ‘누군가의 품’일 수도 있고 ‘교회‘일 수도 있습니다. 품에 안겼다가 떠나가는 것들을 배웅하는 산, 봄이면 피었다 지는 진달래꽃도 순순하게 배웅하고, 계곡을 흐르는 물조차 붙잡지 않습니다. 시간 속을 흘러가다가 문득 그리우면 먼발치로 바라보고, 그리우면 찾아가 안길 수 있는 그런 산, 품, 교회가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고 우리 교회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느껴졌으면 좋겠습니다.


“선한 일을 여러분 가운데서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빌 1:6). 


저는 이 확신을 붙들고 나아가려 합니다. 이 아름다운 신앙의 여정에 함께 하는 이들이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우리가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줄 이들이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함께 걷는 그 길 위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배어들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모든 이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2020년 12월 11일

김기석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