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 2020. 12. 17. 18:56

어둠을 찢는 사람들

 

“천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야,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눅 1:28)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참 힘겨운 시간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오후에 있었던 당회는 zoom이라는 툴(tool)을 통해 진행했습니다. 모일 수 없었기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었던 최선이었습니다. 낯선 소통의 창구였지만 많은 분이 동참해주셨습니다. 이렇게라도 할 수 있음이 다행스럽다 하겠습니다. 모처럼 보이는 얼굴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습니다. 특별한 결정 사항은 없었지만,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얼굴을 맞대고 만날 시간이 자꾸 미뤄지는 것 같아 속상합니다.

 

새벽 기도회조차 할 수 없기에 새벽 묵상 영상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애초의 계획은 대림절에 한시적으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분이 그 영상을 보며 하루를 힘차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반응을 보여주셔서, 아침 묵상 자료를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꿨습니다. 보다 많은 이가 동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짧은 묵상의 시간 끝에 교회와 성도들을 위한 기도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매일 아침 열 시면 중대본이 발표하는 확진자 현황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지만 여전히 심각한 상황입니다. 어지간하면 외출조차 삼간 채 지내고 있지만, 마치 불길한 안개가 스멀스멀 마을을 휘감듯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은밀한 적이 어디에서든 출몰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불안감이 깊어갑니다. 최근 한 두 주 사이에 교회발 확진자 수가 500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모두가 조심하는 이 시기에 몇 주 연속으로 부흥회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하니 참 할 말이 없습니다. 시민적 상식을 가뿐히 뛰어넘는 그들의 오도된 열정으로 인해 교회는 또 다시 질타를 당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 전래 초기에 교회는 민족사의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면서 민중들의 삶에 파고들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일반 시민 사회의 상식과 자꾸 동떨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절망의 노래만 부를 수는 없습니다. 정진규 시인은 ‘다시 별’이라는 시에서 “누가 어둠을 조금씩 찢어내고 있다/빛이 샌다/내가 찢은 어둠,/어둠도 몇 개는 될 터인데/그것들도 별이 되었을까 빛이 되었을까” 스스로 물었습니다. 어둠을 조금씩 찢어내는 사람들, 그래서 별들을 탄생시키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나찌 시대를 겪은 후에 ‘탄생성 natal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죽음과 절망의 심연에서조차 희망을 향해 고개를 드는 인간의 끈질긴 희망을 나타내고 싶었기 때문일 겁니다. 그는 이 세계를 위한 희망을 가져도 된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웅장하고 간결한 표현을 복음서에서 찾습니다. “한 아이가 우리에게 태어났도다.” 성탄절을 내다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청년이 되어서야 처음 교회에 나간 제게는 성탄절의 추억이 많지 않습니다. 목회실 식구들에게 성탄절 추억을 들려달라고 부탁했더니, ‘문학의 밤‘을 준비하던 기억과 새벽송을 돌던 기억을 떠올리더군요. 마음에 두고 있던 사람과 짝이 되기를 소망하던 그 애틋하고 순수한 기억 또한 새로운 듯 보였습니다. 이맘때면 잊을 수 없는 것이 찬양대의 칸타타 연습일 겁니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고단한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와서 김밥이나 호빵 같은 것으로 요기를 하고 밤늦도록 찬양을 하던 그 모습이 그립습니다. 아이들의 귀여운 노래와 율동 또한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무대 가까이까지 몰려와 카메라를 들고 자기 아이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던 젊은 부모들의 모습 또한 새록새록 다가옵니다. 올해는 보기 어려운 광경입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 때문일까요? 문득 독일의 순교자인 디트리히 본회퍼가 떠올랐습니다. 대림절과 성탄 무렵에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부분을 차분하게 읽었습니다.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혀 지내면서도 성탄절은 꼭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기에 그는 아쉬움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냅니다. 약혼자에게 보낸 편지는 애틋하지만 부모님께 보낸 편지는 의연한 태도를 보입니다. 1943년 12월 17일 자로 아버지 칼과 어머니 파울라 본회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디트리히는 아들이 의기소침해질까봐 염려하실 부모님의 마음을 다독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성탄절을 맞이할 아들 생각으로 인해 부모님의 시간에 그림자가 드리워질까 걱정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아름다운 성탄절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세심하게 준비하곤 하시던 두 분의 그 웅숭깊은 마음을 감사함으로 회상합니다. 그 따뜻하고 행복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과도기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면 성탄절을 감옥에서 맞이하는 것이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단지 이 축제의 이름만을 가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의미 있고 참된 성탄절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고난, 고통, 빈곤, 고독, 곤궁, 죄책 등이 인간의 판단과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통상 고개를 돌리곤 하는 곳을 바라보고 계시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때 달리 계실 곳이 없었기 때문에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는 것, ─ 이러한 사실들을 감옥에 있는 사람들은 밖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랍니다. 이러한 사실을 믿는 사람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들을 뛰어넘어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편입되며, 감옥의 벽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저항과 복종>, 손규태·정지련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p.315-6)

 

격절된 장소에 있기에 성탄절의 의미를 더 오롯이 새길 수 있다는 말이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됩니다. 이 말을 달리 이해하자면 우리가 성탄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분들 곁에 다가서야 한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25장은 배고픈 사람을 먹이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히고, 병자를 돌보고, 나그네를 맞아들이고, 감옥에 갇힌 이들을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참으로 영접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올해 우리 교회의 성탄 헌금은 그런 분들을 위해 사용하려 합니다.

 

불편하고 불쾌한 일들이 많은 나날이지만 우리는 그 척박한 현실 속에 기쁨과 희망을 파종하라고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형편이 어떠하든 주위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장 어려운 선택의 시간 앞에 서 있는 마리아에게 천사는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천사가 말하는 기쁨은 하늘에 접속된 자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기쁨은 멀리 서서 관망하는 이들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기 운명을 내던진 이들만 맛볼 수 있습니다. 어둠이 점점 깊어가고 있지만 그만큼 빛이 도래하는 시간 또한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이 희망을 꼭 붙잡고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 누리시기를 빕니다. 주님의 평안이 우리 모두 가운데 함께하시길 빕니다. 안녕히 계세요.

 

2020년 12월 17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