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 2021. 1. 22. 05:59

근심의 무게를 줄이는 법


“내가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보는 날이야말로 영적 각성의 날이다.“(막데부르크의 메히틸트)

 

주님이 주시는 평강이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대한大寒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겨울의 마지막 절기라지요? “설중雪中의 봉만峯巒(봉우리 모양을 한 산)들은 해 저문 빛이로다”.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는 산을 바라보면 마음이 차분해집니다. 땅의 현실이 팍팍하기 때문일까요? 설산은 마치 신비의 세계로 통하는 문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경이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우리는 하늘의 광채를 보게 됩니다. 괴테가 “모든 산봉우리에는 정적이 있다”고 말한 것도 같은 진실을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의 첫 번째 환자가 발생한 지 벌써 1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참 긴 세월이었습니다. 초창기만 하더라도 이 감염병이 이렇게 심각하게 우리 일상을 뒤흔들어 놓으리라고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몇 주 불편을 감수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질병은 이러한 우리의 낙관론을 무참하게 짓밟았으며, 우리 삶을 돌아볼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서 포스트-코로나 담론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편을 즐겁게 선택하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요즘 우리 교우들 가운데도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여럿 계십니다. 건강 문제로 입원하고 수술을 하거나 기다리는 분들도 계시고, 병이 재발하여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 분들도 계십니다. 화재로 작업장을 잃어버린 가족도 있습니다. 일자리를 잃어버려 몸에 익지도 않은 노동의 현장에 서신 분도 계시고, 전직(轉職)을 준비하는 분도 계십니다. 퇴직을 앞두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신 분도 계십니다. 모두 절박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떠합니까? “역병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절박함에 관심이 없다. 역병 그 자체의 운동 원리에 충실할 뿐이다.”(안재원, <아테네 팬데믹>, 이른비, p.7). 냉혹한 현실입니다. 이 어려운 현실에 직면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자각입니다. 교우들의 사랑과 관심 그리고 기도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인생의 가장 힘겨운 시간을 견디고 계신 모든 이들을 은총의 큰 손으로 감싸주시기를 하나님께 청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는 ‘살고 있는 땅’과 ‘난 곳’, ‘아버지의 집’을 떠났습니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고 하는 것은 위험 속으로 들어감을 뜻합니다. 보호의 울타리가 없는 곳에서 낯선 존재로 산다고 하는 것은 모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떠나지 않으면 더 큰 세계에 접속하지 못합니다. 새가 부화하려면 알을 깨고 나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깨지는 것은 아픔을 동반하지만 더 큰 세계로의 도약이기도 합니다. 부등깃이 자라 날개가 제법 펼쳐지면 새들은 허공으로 도약을 감행하며 날기를 연습합니다. 창공을 자유롭게 날 수 있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는 게 어쩌면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우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새로운 삶으로의 열림이 되기를 바랍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힘들지만 정서적인 긴장감이 더 견디기 어렵습니다. 지속적인 긴장 속에 머물 때 우리 속의 여백은 줄어들고 낯빛은 어두워집니다. 말이 퉁명스러워지고, 표정 또한 싸늘해지기 쉽습니다. 누군가를 원망하는 마음이 커지고, 분노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야 합니다. 몸의 자세가 바뀌면 생각도 바뀝니다. 제가 종종 산책을 즐기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스테판 츠바이크는 거리를 두면 모든 것이 변한다면서 몽테뉴의 경우를 예로 들었습니다.

 

“작은 장소에 묶여 있는 사람은 작은 근심에 빠진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몽테뉴는 언제나 거듭, 우리가 근심이라 부르는 것은 자체 무게를 지닌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키우거나 줄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모든 것은 그 자체의 무게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에 부여한 무게를 지닌다. 가까이 있는 것이 멀리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근심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작은 척도로 움직일수록 작은 것이 더 많은 근심을 만들어낸다.“(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 안인희 옮김, 유유, p.130-131)

 

어떤 일 혹은 사태에 대해 우리가 부여한 무게가 우리가 느끼는 무게라는 말이 참 크게 와닿습니다. 매사를 가볍게 대하라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진중하게 살면서도 언제나 그 더 큰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삶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 내 도움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에게서 온다”(시121:1-2). 이 시의 맥락에서 ‘산’은 ‘시온’을 가리키는 말인 동시에 하늘과 땅을 만드신 주님을 암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눈을 들어’라는 말입니다. 시선을 돌리는 것은 회피가 아닙니다. 현실을 제대로 보기 위한 일종의 거리 두기입니다. 현실은 우리를 한없이 몰아댑니다. 거기 휩쓸려서 전전긍긍하다 보면 우리는 방향을 잃고 헤매게 마련입니다.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던 어느 날 문득 길을 잃었다는 자각이 찾아들기도 합니다. 그때야말로 영원의 세계가 우리를 소환하는 순간입니다. 잠시 심호흡을 하며 숨을 가다듬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전도서 기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그 사람은 누구냐?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 그 사람은 또 누구냐? 네 혀로 악한 말을 하지 말며, 네 입술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라. 악한 일은 피하고, 선한 일만 하여라.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시 34:12-14)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자 하는 사람, 좋은 일을 보면서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말씀은 우리를 물음표 앞에 세웁니다.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도 누군가가 정색을 하고 물으면 낯설게 보입니다. 질문은 우리 삶의 환기창과 같습니다. 전도자의 이 질문은 우리 삶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 염세주의자가 아니라면 세상에 즐겁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으며, 좋은 일을 보며 오래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누구나 바라는 바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대답은 간명합니다. 거짓말을 하고, 악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은 자기의 부끄러움을 숨기거나 확대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고, 악한 말은 다른 이들을 밀어내거나 어려움에 빠뜨리기 위해 하는 말입니다. 자기 확장 욕망과 타자 부정이야말로 즐거운 삶의 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이 꼭 붙들어야 할 삶의 원리를 세 가지로 제시했습니다. ‘해를 끼치지 말라(do no harm)’, ‘선을 행하라(do good)’,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라(stay in love with God)’.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소극적 윤리라면 선을 행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할 윤리입니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고, 위험을 무릅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며칠 전 뉴스에서 눈이 펑펑 내리던 날 추위에 떨고 있던 사람에게 자기가 입었던 외투와 장갑을 벗어준 사람 이야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 길이 없지만 선을 행한 한 사람의 이야기가 냉랭한 세상의 얼음을 깨는 봄소식처럼 들려왔습니다. 그가 봄소식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속에 이미 봄이 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물 때 우리는 이웃들에게 따뜻함과 친절함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인생을 즐겁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꼭 명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평화를 찾기까지, 있는 힘을 다하여라.’ 평화는 기다린다고 하여 저절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척박한 땅에 나무를 심고 물을 주어 가꾸는 사람이 있어 광야가 푸르러지는 것처럼 평화로운 세상은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드러납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자기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중심이 되려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아픔과 비애가 서린 폭력의 세상에 오신 주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야 평화를 지향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 블루라는 가파른 언덕을 허위단심으로 넘느라 다 숨이 가쁘지만, 가끔은 멈춰 서서 하늘도 보고, 구름도 보고, 흘러가는 강물도 보고, 새들도 보고, 교우들의 얼굴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늘 바람이 우리를 감싸고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참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2021년 1월 21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