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김기석의 새로봄
그런대로 따스하게 맞는 시간
한종호
2021. 2. 11. 07:58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 하고 싶은 것을 행하라(Ama! et quod vis fac)! 입을 다물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라.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하라. 남을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주라.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라. 그대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사랑의 뿌리가 드리우게 하라. 이 뿌리에서는 선 외에 무엇이 나올 수 없거니….”(아우구스티누스, 요한 서간 주해 7.8)
주님의 은총이 교우 여러분의 가정마다 넘치시기를 빕니다.
설 연휴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5인 이상 집합 금지 권고 때문에 조금은 쓸쓸하게 보낼 수밖에 없는 명절입니다. 저도 그냥 집에만 머물고 있을 예정입니다. 어느 댁은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들이 줌(zoom)으로 새해 인사를 나누기로 했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이들이 세배하는 영상을 찍어서 제게 보내준 분들도 계시네요. 덕담을 건넬 수도 없고, 세뱃돈을 줄 수도 없으니 그저 ‘허허’ 하고 웃고 말았습니다.
‘설’이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낯설다’라는 말에서 온 것이라는 견해에 고개를 끄덕이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새로운 시간은 사실 ‘낯선‘ 시간이지요. 낯섦 앞에 설 때 우리는 머뭇거리게 마련입니다. 머뭇거림 혹은 삼가는 것이 새로움을 대하는 자세입니다. 설을 신일(愼日)이라고도 하지요? 새로울 신(新)이 아니라 삼갈 신(愼) 자를 쓰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허겁지겁 살다가 잠시 멈춰서 마음을 가다듬는 시간이라니 얼마나 좋습니까?
연휴의 첫날인데도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집에 앉아 있자니, 어린 시절의 설날 풍경이 떠오릅니다. 지게에 쌀 부대와 함지를 짊어진 아버지의 뒤를 따라 방앗간에 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신명났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하얀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는 상상을 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집에 돌아와 어른들이 윗목에 가래떡을 가지런히 펼쳐 놓으면 굳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먹으려고 안달을 했습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와 누나들이 음식을 장만하느라 분주했습니다. 두부를 만들 때도 있었고, 엿을 고느라 밤새 불을 때기도 했습니다. 찹쌀가루로 반죽을 하고 말린 후 꿀이나 조청을 발라 기름에 튀겨낸 강정에 눈독을 들이다가 부지깽이로 맞기도 했습니다. 늦은 시간 설핏 잠이 들었다가 방구들이 너무 뜨거워 깨보면 아버지는 가래떡 써는 작두로 떡을 썰고 계셨습니다. 지금도 명절이면 음식을 정성스럽게 차리는 집도 있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예전만은 못한 것 같습니다.
작고한 김남주 시인은 ‘설날 아침에’라는 시에서 텅 비어 가는 농촌 마을의 스산한 설날 풍경을 조금은 쓸쓸하게 노래했습니다. 싸락눈이 밤새 내린 설날 아침 풍경을 시인은 아주 적막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무심코 내리는 싸락눈은 ‘뿌리 뽑혀 이제는 바짝 마른 댓잎’에도 내리고, ‘허물어진 장독대 금이 가고 이빨 빠진 옹기그릇’에도 내리고, ‘소 잃고 주저앉은 외양간’에도 내립니다. 다 떠나고 아무도 없는 그곳에도 설이라고 까치가 날아와 지저귑니다. 시인은 까치에게라도 말을 걸어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나 봅니다.
“까치야 까치야 뭣하러 왔냐
때때옷도 없고 색동저고리도 없는 이 마을에
이제 우리집에는 너를 반겨줄 고사리손도 없고
너를 맞아 재롱 피울 강아지도 없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