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김기석의 새로봄
자기답게 산다는 것
한종호
2021. 2. 26. 10:23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시 122:1-2)
한 주간 잘 지내셨는지요? 하루하루 기적 같은 날들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벌써 2월의 마지막 주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무심히 눈을 들어 바라본 달력 위에서 날들은 가지런하지만 그 행간 속에 깃든 삶의 무게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때를 분별하며 사는 것이 지혜라는 지혜자들의 말을 실감하는 나날입니다. 나아가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 심을 때와 거둘 때, 찾아나설 때와 포기할 때만 잘 분별해도 삶은 한결 쉬워질 것 같습니다.
목회실에서 이번 주 찬양을 맡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간단하지만 전통적인 곡을 선정해 녹음을 했습니다. 교우들에게 교회의 여러 장소를 보여드리고 싶다는 제안에 따라 다양한 장소에서 녹화도 진행했습니다. 그 일이 꽤 의미 있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비대면 예배는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기억의 장소들을 소거하고 있습니다. 장소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이야기가 깃든 곳입니다. 텅 빈 예배당에 올라갈 때마다 외롭지 않은 것은 그곳에 스며있는 교우들의 삶의 이야기와 기도 그리고 찬양 소리가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제 사무실에 처음 방문하시는 분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대부분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살핍니다. 책들이 켜켜이 쌓인 책무더기를 보며 어떤 분들은 “이 책 다 읽으셨어요?” 하고 질문합니다. 그러면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를 내는 법’이라는 책을 썼던 움베르토 에코의 말을 빌려 대답합니다. “내일부터 읽을 책이에요.” 그러면 더는 묻지 않고 웃고 맙니다. 또 어떤 이들은 “영상을 통해 많이 봤던 곳이라 낯설지 않아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낯선 곳도 아는 누군가가 머물던 장소임을 알면 돌연 친숙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비대면 예배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가는 기억이 약화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번 주에 화면에 비쳐지는 공간들을 보며 그리움을 달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사순절 달력을 잘 활용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사실 저도 달력의 지시사항을 다 지키지는 못합니다. 전구 한 개를 빼지도 못했고, 계단을 자주 이용하지도 못했습니다. 별로 이동할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답게 살기’와 ‘자유의 힘 회복하기’라는 실천 사항을 두고는 많은 생각을 해야 했습니다. 자기답게 산다는 게 어떤 것일까요? ‘~답다’라는 접미사는 체언에 붙어서 체언의 성격이나 특징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문제는 ‘자기’입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명확히 한정할 수 있어야 ‘자기다운’ 삶이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참 어렵지요? ‘자기’라는 말 속에는 타자와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자의식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체적인 존재로 살고 싶어하지만 늘 다른 이들을 의식하며 삽니다. 다른 이들의 칭찬과 인정을 바랍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을 받지 못하면 실망하기도 합니다. 행여 다른 이들과 나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삽니다. 앞서가는 이들과의 격차를 줄이고, 뒤따라오는 이들과의 격차를 벌리고 싶어합니다. 그러니 늘 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답게 살라’는 말이 제게는 그런 삶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라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참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성적, 사회적 지위, 재산, 외모’ 등이 우리의 인간적 가치를 재는 척도처럼 변했기 때문입니다. 경쟁을 내면화하고 살다 보니 나보다 나은 이들에 대한 질투와 선망의 감정에 시달리고, 나보다 못한 이들은 낮춰보는 버릇이 들기도 합니다. ‘타인은 나에게 있어 지옥’이라고 말했던 사르트르의 마음이 이런 건가 싶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자기답게 살 수는 없을까요? 18세기 유대교 하시딤 지도자인 주시아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제자들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는 세상에서는 어째서 너는 모세가 되지 못했느냐?고 묻지 않고, 어째서 주시아가 되지 못했느냐?고 물을 것이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하는 마음만 버려도 삶은 한결 가벼워지리라 생각합니다. 순간순간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성실하게, 기쁘게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자유의 힘 회복하기’라는 주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타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한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치열한 경쟁을 하며 사는 동안 우리 마음에는 온갖 쓰레기들이 켜켜이 쌓였습니다. 미움, 질투, 원한 감정, 복수심, 밑도 끝도 없는 분노, 심술궂음, 절망...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삶의 부산물들입니다. 그것을 제때에 분리하고 처리할 수만 있다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해와 바람과 흙의 도움으로 그것을 분해하여 흙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어리석어서 그것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사라지지 않도록 꼭 붙들려 하고, 오히려 남들이 볼 수 있는 장소에 전시하기도 합니다. 자기를 생의 부산물에 묶어 두기에 우리 삶은 자유롭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처리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