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김기석의 새로봄
정신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사람들
한종호
2021. 3. 12. 04:44
“주님, 내가 미끄러진다고 생각할 때에는, 주님의 사랑이 나를 붙듭니다. 내 마음이 번거로울 때에는, 주님의 위로가 나를 달래 줍니다.”(시 94:18-19)
주님의 은총과 평강을 기원합니다.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매화꽃은 벌써 만개했고, 산수유도 한창입니다. 공원에는 노란색 히어리가 조금씩 피어나고 있습니다. 히어리의 꽃말은 ‘봄의 노래’라지요? 미처 떨구지 못한 겨울눈 껍질이 마치 모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춘화도 막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수선화, 히아신스, 크로커스를 보는 즐거움이 큽니다. 바야흐로 꽃 시절의 시작입니다. 2020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루이스 글뤽은 눈풀꽃(snowdrop)이라는 시에서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을 맞은 눈풀꽃의 은밀한 기쁨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전략)
나 자신이 살아남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었다,
대지가 나를 내리눌렀기에.
내가 다시 깨어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축축한 흙 속에서 내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끼리라고는.
그토록 긴 시간이 흐른 후
가장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 내면서.
(후략)”
축축한 흙 속에서 자기 몸이 다시 반응하는 걸 느낀다는 것, 그래서 다시 자신을 여는 법을 기억해낸다는 것,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요? 눈풀꽃을 설강화(雪降花)라고도 하더군요. 눈 내린 땅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일 겁니다. 이 놀라운 시를 읽고 있으면 왠지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지 않나요? 어려운 시절을 견디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도 봄볕이 스며들어 새로운 삶의 용기를 일깨웠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에 저는 아주 반가운 손님들을 맞이했습니다. 제가 잠시 머물렀던 학교의 졸업생들이었습니다. 졸업한 지 벌써 31년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커피를 마시려고 마스크를 벗자 여고시절의 얼굴들이 고스란히 드러났습니다. 시간이 스쳐간 흔적이야 숨길 수 없지만 익숙한 얼굴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저를 찾아온 까닭은 한 친구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교목실에 찾아와 제게 조언을 구하기도 하고, 사뭇 진지하게 생의 의미를 탐색하던 친구여서 특별히 기억에 남은 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독신으로 지내면서 커리어 우먼으로 열심히 일하던 중 몇 년 전 암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그는 영상을 통해 내가 전하는 메시지를 꾸준히 들어왔습니다.
그렇게도 회복되기를 바랐지만 병이 점점 악화되어, 결국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면회조차 할 수 없기에 친구들의 안타까움이 더 커졌습니다. 그들은 친구의 생명 불꽃이 다 스러지기 전에 나의 메시지를 담은 영상을 만들어 그에게 전하고 싶어서 찾아왔던 것입니다. 문득 그가 내게 보냈던 편지의 한 대목이 떠올랐습니다. 저마다 치열하게 공부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던 3학년 2학기 끝자락이었을 겁니다. 어느 날 교목실에 들어서니 책상 위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학생이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의 학교생활을 돌이켜 보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기에 공부에 대한 후회는 없다면서도 이상한 헛헛함이 자기를 괴롭히고 있다면서 편지를 이렇게 이어갔습니다. “3년만 참으라고, 3년만 앞만 보고 달리라고 모두가 말하기에 그래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외로운 생각에 질주를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니 제 곁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는 이 문장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문장은 학교 교육에 대한 일종의 고발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진지하게 자기를 성찰하며 살던 한 사람의 생명 불꽃이 가물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친구가 없다더니 이렇게 좋은 친구들이 있으니 인생을 실패한 것은 아닌 것 같다’고 희떠운 소리를 한마디 한 후에, 더듬더듬 몇 마디 말을 건넸습니다만 이런 때일수록 말의 부질없음을 더욱 절감하게 됩니다. 며칠 후 의식이 깨어난 그 친구는 제 메시지를 듣고 아주 행복해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이른 봄의 차가운 빛 속에서 자기를 여는 법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