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김기석의 새로봄
평범한 행복의 꿈을 내려놓고
한종호
2021. 4. 2. 06:33
“내적 자유와 진정성에 대한 물음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 땅에서 구현되는 하나님의 통치를 부인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잡으십시오.”-브루더호프 공동체 설립자 하인리히 아놀드
그리스도의 자비와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어느덧 우리는 사순절 순례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늦추위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우여곡절을 겪으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어느새 벚꽃이 만개하여 잿빛 거리를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계절의 흐름은 이렇게 유장하건만 사람 홀로 유정하여 희망과 절망 사이를 분주하게 오갑니다. 가만히 꽃 앞에 멈추어 서면 우리 속에서 들끓던 소리가 비로소 잠잠해지고 결삭은 마음에 따뜻한 기운이 스며듭니다.
지난 40일 동안 늘 책상머리에 두었던 사순절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실천한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위 아래 두 줄로 되어 있는 실천 과제 가운데 밑에 기술된 것들은 아주 구체적인 실천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장바구니 사용하기’, ‘냉장고에 빈 자리 만들기’, ‘컴퓨터 시간 줄이기, ‘텀블러 가지고 다니기’ 등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위에 기술된 내용을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나의 목마름 살피기’, ‘희생의 사람’, ‘무관심 버리기’ ‘비교하는 마음 버리기’, ‘조급함 버리기’, ‘무책임한 태도 버리기’, ‘어리석음 깨닫기’, ‘편견 벗어나기’ 등의 내용은 깊은 자기 성찰을 요구했습니다. 차분하게 자기를 돌아볼 수 있어 좋았지만,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이 생각보다 뿌리가 깊다는 사실을 절감하던 시간이었습니다. 방학 내내 놀다가 개학을 앞두고 벼락치기 숙제를 하는 아이의 심정이 되어 고난주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렇게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거울이 있어 다행이다 싶습니다.
느긋하고 한갓진 평화를 누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현실은 늘 우리를 극한의 긴장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서 있는 자리에 따라 세상 풍경은 사뭇 달라 보입니다. 미얀마에서는 군경에 의해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학살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 범죄와 폭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히스테리가 세상을 뒤덮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삶에 대한 불안감이 커가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삶의 조건이 점점 악화될 때 문화적 다양성은 위협으로 다가오게 마련입니다. 불안과 두려움이 타자들에 대한 배제와 폭력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그러니 인종 범죄를 인정하자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상황 속에서 평화를 선택할 용기를 발휘하자는 말입니다. 푸접없는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고향이 되어 주는 것보다 더 보람찬 일이 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