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기
한종호
2021. 5. 28. 07:37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시 84:5-7)
주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5월 말인데도 며칠 선득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사무실에 장시간 앉아 있다가 몸이 차가워졌다 느끼면 화단에 나가 볕바라기를 합니다. 꽃들의 향연에 슬며시 끼어들어 벌들처럼 코를 벌름거리기도 합니다. 꽃은 싫은 내색조차 없이 자기 향기를 나눠줍니다. 나눠주고 나면 텅 비어 버릴까 걱정스럽지만, 향기 창고가 비는 법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따금씩 날아와 이 꽃 저 꽃 문을 두드리는 흰 나비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습니다.
지난 주일부터 우리는 오순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교회력으로 가장 긴 절기로 대림절까지 이어집니다. 오순절은 교회의 생일입니다. 성령은 만나기 어려웠던 이들이 만나 서로 소통하게 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여기던 이들이 만나 우정을 나누게 만듭니다. 새로운 인류의 탄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성령강림절 아침, 예루살렘에는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많이 머물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낯선 경험을 합니다. 성령에 충만해진 사도들이 골방 문을 열고 대중들 앞에 섰습니다. 놀랍게도 군중들은 사도들의 말을 자기들의 모어(母語)처럼 다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흔히 이것을 방언이라 말하지만, 사도들이 이상한 언어로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듣는 이들의 귀가 열린 것입니다. 마음이 통하면 언어는 크게 장벽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그러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도무지 소통할 줄 모릅니다. 생각과 지향, 정치적 입장, 신앙의 빛깔이 나와 다르다고 지레 판단해버린 이들이 하는 말은 우리에게 소음처럼 들립니다. 자기 확신에 찬 이들의 언어는 폭력적이기도 합니다. 차이는 용납되지 않습니다. 특히 종교적으로 근본주의적 성향을 보이는 이들일수록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세계를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각을 기준으로 삼아 세상을 재단합니다. 그 생각에 포섭되지 않는 이들은 배척하거나 혐오합니다. 마치 기관총을 발사하듯이 거친 말, 단정적인 말을 쏟아내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말이 닿는 곳에서 건강한 생명은 불구로 변하고, 단절의 벽은 점점 높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고 말했습니다. 히브리어로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위를 내포합니다. 다바르는 창조력입니다. 예언자들의 말도 다바르입니다. 아름다운 창조의 흐름이 불의와 부패와 폭력에 막혀 차단될 때 터져나오는 말이니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든 터져나올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이 누군가의 가슴에 희망의 싹을 틔울 수도 있고, 절망으로 이끄는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순절기를 지나면서 우리가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화해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사람들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고, 도무지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만나 사랑의 친교를 나누도록 해야 합니다. 나와 성향이 다르고 정치적 입장이 다른 사람과도 마음을 열고 접촉할 용기를 내야 합니다. 많은 점에서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운 이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 몰려서든, 아니면 의지적 결단이든 다른 사람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장벽의 저편에 있는 이들이 우리와는 상종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 부끄러워하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