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즐겁게 불편을 택하라
한종호
2021. 6. 25. 07:00
“내 당신의 곁에 가기만 해도
내 자신이 이미 아니리만큼 당신 위대하십니다.
당신은 너무도 어두우시와, 내 하찮은 밝음조차
당신의 가장자리에선 의미도 없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 시선>, 구기성 역, 을유문화사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무탈하신지요? 워낙 예기치 않은 일들이 많이 벌어지는 세상이기에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도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교우들 가운데는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십니다. 건강의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느닷없는 중병 선고는 우리 삶의 기반을 사정없이 흔들기도 합니다. 함께 기도를 드리고, 별일 없이 잘 극복하실 거라고 격려하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혼돈과 두려움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네가 물 가운데로 건너갈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하고, 네가 강을 건널 때에도 물이 너를 침몰시키지 못할 것이다. 네가 불 속을 걸어가도, 그을리지 않을 것이며, 불꽃이 너를 태우지 못할 것이다.”(사 43:2) 이사야가 들려주는 이 약속을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지난 주일에 교회에 오신 교우들을 보며 ‘이제는 예배당이 외롭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정물인 공간이 무슨 감정이 있겠습니까? 빈 공간을 눈길로 더듬곤 했던 제 마음의 풍경이 공간의 외로움으로 느껴졌던 것이겠지요. 주일을 준비하며 묘한 설렘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길들인다’는 말의 의미를 묻는 어린왕자에게 여우는 길들인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고,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어린왕자가 자기를 길들이면 일어날 일도 들려줍니다.
“난 보통 발소리하고 다른 발소리를 알게 될 거야. 보통 발자국 소리가 나면 나는 굴 속으로 숨지만 네 발자국 소리는 음악 소리처럼 나를 굴 밖으로 불러낼 거야. 그리고 저기 밀밭이 보이지? 난 빵을 안 먹으니까 밀은 나한테는 소용이 없구, 밀밭을 보아도 내 머리에는 떠오르는 게 없어. 그게 참 안타깝단 말이야. 그런데 너는 금발이잖니. 그러니까 네가 나를 길들여 놓으면 정말 기막힐 거란 말이야. 금빛깔이 도는 밀밭을 보면 네 생각이 날 테니까. 그리고 나는 밀밭을 스치는 바람 소리까지도 좋아질 거야."
어쩌면 우리 신앙생활의 한 부분은 서로를 길들이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우는 아니지만 한 분 두 분 교우들이 교회 마당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바라보면서 묘한 설렘이 일었습니다. 감상적이라고 웃으셔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속에는 스스로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그 공허함은 한 길을 가는 벗들의 우정으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꽤 많은 이들이 온라인 예배의 유용함과 편리함을 이야기합니다. 오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어 좋다고도 말합니다. 그렇게 생긴 여유 시간을 즐길 수 있다니 다행이긴 합니다. 그래도 저는 가급적이면 즐겁게 불편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일찍 일어나고, 옷을 갖춰 입고, 먼 길을 나서는 것은 번거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런 번거로운 과정이야말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비끌어매는 일이 아닐까요?
레위기의 제사법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세요? 제물을 바치는 과정이 참 번거롭구나 싶지요? 제사를 바치는 사람은 성전에서 스스로 제물을 잡아야 했습니다. 제물의 피를 받아 제단 둘레에 뿌리는 것은 제사장들의 일이었지만,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 저미고, 내장과 다리를 물로 씻는 것은 봉헌자의 몫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의 숨을 거둔다는 것처럼 긴장되고 꺼림칙한 일이 또 있을까요?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봉헌자는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곡식 제물을 바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운 밀가루를 바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가 필요했을까요? 요즘처럼 방앗간에서 빻아주는 것도 아니니, 아마도 절구에 밀을 넣고 공이로 찧고 또 찧었을 겁니다. 그리고 체질을 통해 거친 것들을 골라내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소금을 치고 향을 얹어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과정을 통해 곱게 빻아지는 것은 봉헌자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