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어둠을 밝히는 한 줄기 빛 되어
한종호
2021. 7. 8. 18:09
“참으로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곤경에 빠진 불쌍한 사람들의 요새이시며, 폭풍우를 피할 피난처이시며, 뙤약볕을 막는 그늘이십니다.”(사 25:4)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소서 절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전통적인 전례를 중시하는 교회는 지난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켰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탈출공동체가 땅에 파종하여 거둔 첫 번째 열매를 하나님께 바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여름에 수확하는 곡물이 보리라 하여 맥추절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이래저래 7월은 농부들에게 분주하고 힘든 달입니다. 보리, 밀, 귀리를 베어내고, 가을 농사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맘 때의 풍경을 이렇게 그립니다. “大雨도 時行하고 더위도 극심하다. 초목이 무성하니, 파리, 모기 모여들고, 평지에 물이 괴니 악머구리(참개구리) 소리로다.”
남부 지방에는 벌써 큰 비가 내려 많은 피해가 났다고 합니다. 망연자실 하늘만 바라볼 사람들의 마음을 떠올리니 가슴이 저려왔습니다. 서울에도 많은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습니다. 화단을 관리하는 권사님은 아끼는 백합꽃이 세찬 비에 스러질까봐 지지대에 우산을 묶어 꽃 위에 씌워 주었습니다. 우산을 쓰고 있는 백합화를 보며 저는 빙그레 웃기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최영철 시인의 ‘우짜노’라는 시가 떠올랐습니다.
“어, 비 오네/자꾸 비 오면/꽃들은 우째 숨쉬노/젖은 눈 말리지 못해/퉁퉁 부어오른 잎/자꾸 천둥 번개 치면/새들은 우째 날겠노/노점 무 당근 팔던 자리/흥건히 고인 흙탕물/몸 간지러운 햇빛/우째 기지개 펴겠노/공차기하던 아이들 숨고/골대만 꿋꿋이 선 운동장/바람은 저 빗줄기 뚫고/우째 먼길 가겠노”
시인의 오지랖이 넓습니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꽃과 잎들의 안부를 걱정하고, 새들이 젖은 깃으로 날 수 있을까 걱정합니다. 흙탕물을 슬쩍슬쩍 어루만지던 햇빛이 기지개를 펼 수 있을지 걱정하고, 먼 길 가야 하는 바람까지 염려합니다. 시인 반칠환은 이 시에 대한 감상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세상사람 모두가 저런 ‘우짜노’를 연발했으면 좋겠다. 창문 밖 장맛비를 내다보며 정치인이, 군인이, 장사꾼이, 도둑놈이, 시인이 모두 손을 놓고 꽃잎 걱정, 풀잎에 매달려 빗방울 뭇매를 맞을 왕아치, 풀무치, 때까사리, 소금쟁이 걱정을 하다가 제가 정치인인지 사기꾼인지 도둑놈인지 시인인지 몰라 잠시 멍청해지는 그런 시간이 많았으면 좋겠다. 덕분에 전쟁광이 좀 손해보고, 무기상이 셈하다 갸우뚱하고, 도둑놈 장물 수입이 줄고, 히히- 시인은 시 한 편 더 건지는 그런 시간이 많이많이 늘었으면 좋겠다.”(반칠환, ‘이 아침에 만나는 시’, 동아일보, 2003/08/22 자)
이악스러운 마음들이 빚어내는 살풍경 속에 살다보니 이 마음이 더 없이 소중하게 다가옵니다. 가끔 산책길에서 만나는 민달팽이나 지렁이를 풀 속으로 슬쩍 던져주는 것도 이 시가 떠올라서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습니다. 우산을 쓴 백합화 이야기의 후일담입니다. 하룻밤 지나고 나자 우산 하나가 없어졌습니다. 어느 취객이 우산이 필요했던지 화단의 꽃을 밟으며 기어코 그 우산을 뽑아 가져갔던 것입니다. 몇 해 전에는 활짝 핀 해바라기를 댕강 꺾어간 분도 있습니다. 화단에 심긴 화초를 뽑아가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 일을 겪을 때마다 사소해 보이는 그런 도둑질이 밉게 여겨집니다. 염치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들은 선의를 품고 사는 이들의 마음에 어두운 그늘을 만듭니다. 영혼의 빈곤은 물질의 빈곤보다 심각합니다. 물질의 빈곤은 채울 수 있지만 영혼의 빈곤은 치유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 낙심하거나 세상을 어둡게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은 좋은 마음으로 사는 이들이 더 많으니 말입니다. 그들은 마치 공기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눈에 띄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있음 그 자체로 우리 삶이 허무의 벼랑으로 곤두박질치지 않도록 지켜주는 이들입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누군가의 호의를 입을 때가 많습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부정적 기억일 수도 있지만 긍정적 기억일 때도 많습니다. 탄식시편의 시인들을 떠올려 보면 됩니다. 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세태에 멀미를 느낍니다.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 한가운데 누워 있어 보니, 그들의 이는 창끝과 같고, 화살촉과도 같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도 같았습니다.”(시 57:4)
“그런데 나를 비난하는 자가 바로 너라니! 나를 미워하는 자가 바로 내 동료, 내 친구, 내 가까운 벗이라니! … 그의 입은 엉긴 젖보다 더 부드러우나, 그의 마음은 다툼으로 가득 차 있구나. 그의 말은 기름보다 더 매끄러우나, 사실은 뽑아 든 비수로구나.”(시 55:13, 21)
이 시편 기자들의 마음을 실감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탄식이 절로 쏟아져 나올 때 우리 영혼은 황무지로 변하고 맙니다. 그러나 시인들은 자기들의 그런 마음을 속에 쌓아두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 정직하게 마음을 드러냅니다. 그 순간 그를 확고하게 사로잡고 있던 무거움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중첩된 어둠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그에게 한 줄기 빛이 비쳐듭니다. 그 빛은 기억을 통해 다가옵니다. 생의 고빗길에 처할 때마다, 곤경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허둥거릴 때마다, 우리를 찾아오셔서 힘이 되어주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떠올리는 순간 비애는 줄어들고,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설 힘이 스며듭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주 하나님(계 1:8)께 소망을 둔 사람은 생의 시련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시련에 압도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는 그런 근원적인 희망을 붙들고 사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