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단순한 삶으로의 초대
한종호
2021. 7. 15. 12:50
“나는 잠시 동안이나마 당신 옆에 앉을 은총을 구합니다. 지금 하던 일은 뒷날 마치겠습니다. (중략) 지금은 말없이 당신과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이 조용하며 넘치는 안일 속에서 생명의 헌사를 노래할 시간입니다.”(타고르, <기탄잘리>, 김병익 옮김, 민음사, p.18)
긴장된 시간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지뢰밭 위를 걷는 것처럼 조마조마합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을 보아도 긴장된 표정이 역력합니다.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보면 불편합니다. 함부로 지적했다가 시비에 휘말릴 것 같아 얼굴만 찌푸리고 재빨리 지나칩니다. 스스로 괜찮다고 생각할 순 있지만 마주 선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 일을 삼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한계를 모르는 자유는 위험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 한 밤중에 등불을 밝혀 들고 길을 걸어가는 것을 보고, 어떤 이가 비웃듯이 물었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분별하지 못하는 당신이 등불을 들고 가는 까닭이 뭐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등불을 밝혀든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앞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것이 배려의 마음일 겁니다. 배려는 우리 일상에서 꼭 드러나야 할 사람됨의 드레입니다.
교회 예배도 다시 비대면으로 돌아갔습니다. 겨우 석 주 대면 예배를 드리고 다시 비대면으로 돌아가자니 속이 쓰렸습니다. 허탈한 느낌도 들었구요. 학교나 유치원, 어린이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난감해 합니다. 비상한 상황에서 비상한 대책을 강구할 수밖에 없지만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된다면 좀 견디기 어려울 수도 있겠습니다. 소상공인들과 자영업자들 역시 벼랑 끝에 내몰린듯 위태로운 나날입니다.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크지만, 심리적인 압박감 역시 큽니다. 다들 어떻게들 지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친밀한 이들과 어울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면 긴장도 좀 풀어지고,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도 좀 덜어지련만 그럴 수도 없는 형편입니다.
이 무더위 한복판을 통과하며 겨울을 떠올리는 게 조금 이상하기는 하지만, 가끔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칼바람을 피하며 겨울을 견디는 로제트 식물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민들레, 질경이, 냉이, 꽃다지, 달맞이꽃, 개망초 등이 여기에 속한다지요? 로제트 식물은 아니지만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잘 자란다는 인동덩굴도 떠오릅니다. 가끔은 식물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곧잘 비애에 빠지는 것은 고통을 피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고통을 피하려는 것은 모든 인간의 본능이지만, 고통은 피하려고 할수록 고통의 장악력은 점점 커집니다.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힘들지?’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인생은 본디 고달픈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은 가지런하게 전개되지 않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우리 앞길을 가로막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인생을 풀어야 할 과제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생은 살아내야 하는 과정일 뿐입니다. 지향이 분명하다면 명백한 답을 찾지 못했다 해도 낙심할 것 없습니다. 순간순간 성실하게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한 걸음만 나아가도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먼 미래를 그려볼 것 없이 지금 당장 절실한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지금은 은퇴했지만 박지성은 세계적인 축구 선수였습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그도 슬럼프로 위기를 겪었던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플레이가 좋지 않으니 홈 관중들도 그가 공을 잡기만 하면 야유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라운드에 들어가는 것이 마치 도살장에 들어가는 느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슬럼프에서 벗어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습니다. 공을 받고 그 공을 다시 동료에게 패스하는 것은 축구 선수의 기본 중의 기본입니다. 그는 패스를 연결시킬 때마다 자기 스스로를 칭찬했다고 말했습니다. ‘잘했어.’ 어처구니없는 행동처럼 보이지만, 그런 자기 긍정이야말로 남들의 평가나 시선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집중할 수 있는 태도였던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일수록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자기를 향할 때는 ‘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라는 자기 비하로 귀결되고, 타자를 향할 때는 ‘선망’이나 ‘원망’을 낳습니다. 어느 것도 건강한 감정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루 중에 몇 번이라도 자기 마음을 살피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자기 마음을 살피노라면 별 것도 아닌 일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음을 자각하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합니다.
‘향심기도’(centering prayer)라고 들어보셨지요? 흐트러지기 쉬운 우리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가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이런저런 말로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 안에 오롯이 머무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은 이들은 마음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금방 다른 생각이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맙니다. 그것을 일러 분심이라 합니다. 나뉜 마음이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떠돌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다시 마음을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가야 합니다.
기도에 몰입하기 전에 단어 하나를 선택하고, 분심을 알아차릴 때마다 그 단어를 조용히 떠올림으로 마음을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평화, 자유, 하나님, 고요…’ 등 어떤 단어라도 괜찮습니다. 그 단어를 일러 ‘거룩한 단어’(sacred word)라 합니다. 흙탕물을 가만히 놔두면 흙이 가라앉듯 우리 마음도 고요함 속에 머물 때 가지런해집니다. 마음이 가지런해졌다는 말은 단순함에 이르렀다는 뜻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