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밤은 밤에게 낮은 낮에게
한종호
2021. 8. 6. 09:14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시 19:1-4a)
주님의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한 주간 동안도 무탈하게 지내셨는지요? 우리 인생은 하루의 점철(點綴)이라지요? 점철이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수없이 많은 점을 찍어 형태를 드러내는 점묘법 화가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의 점 찍기는 일종의 수행이 아닐까요? 지루함의 악마와 싸우며 끝없이 반복되는 작업을 묵묵히 수행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사는 모습 속에 우리 인생 전체 모습이 반영된다고 합니다. 부분은 전체를 닮고 전체는 부분을 내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전에 산에 자주 다닐 때가 생각납니다. 숲 그늘 아래로 걸어갈 때도 있지만 그늘조차 없는 오르막길을 허위단심으로 올라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어지간히 지쳐있을 때면 그 길을 걷는 것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습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때마다 ‘이 길은 우리 인생을 닮았구나’ 하고 혼잣소리를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주 힘겹게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인생이 도전 아니던 순간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마음으로 사람들을 보면 괜스레 고맙고 정겹고 그렇습니다. 매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지금, 그저 상상 속에서라도 여러분들의 길에 동행이 되고 싶습니다.
매일 새벽, 아직 해가 떠오르기 전 저는 산책에 나섭니다. 걷는 순간은 오롯이 혼자입니다. 내 영혼의 풍경을 살피기도 하고, 산지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생각들을 붙잡아 가지런히 만들기도 하고, 어려움을 겪는 교우들을 생각하며 기도를 올리기도 합니다. 새벽 숲 사이를 걸으면 청량한 기운을 느끼게 마련입니다. 풀벌레와 매미 울음소리가 배경음이라면 그 소리를 단속적으로 뒤흔드는 소리가 새벽 공기를 흔듭니다. 까마귀의 ‘까악 깍’ 하는 탁성, 다소 신경질적으로 ‘깍깍깍깍’ 우짖는 까치 소리, 그리고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리는 멧비둘기의 구슬픈 소리…. 그 소리의 향연에 귀를 기울이노라면 행복감이 밀려옵니다. 시편 19편의 말씀이 저절로 실감납니다. 창조의 신비를 보고 누릴 수 있는 감각이 열린 사람은 행복합니다. 비록 아무 소리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진다는 그 말씀을 얼핏 감지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늘 다니는 산책로에서 만나는 풍경 또한 정겹습니다. 길 위에서 하루를 시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전철역 근처에서 자리를 잡고 김밥이나 떡 같은 먹을거리를 진설하고 손님을 기다리는 아주머니가 계십니다. 그분이 그 장소에 이르러 맨 먼저 하는 일은 간밤에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주워 주변을 말끔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제게는 묵묵히 수행하는 그 행위 자체가 경건함으로 보입니다. 트럭에 싣고 온 각종 건축자재들을 가게로 옮기는 건재상 아저씨도 보입니다. 늘 입고 계신 낡은 셔츠는 그분의 건강한 노동의 증거처럼 보입니다. 프랜차이즈 빵집 틈바구니에서 구멍가게와 다를 바 없는 빵집을 운영하시는 아저씨는 앞치마를 두르고 상을 닦는 일로 새벽을 깨웁니다. 사람들이 다니는 산책로 옆에 트럭을 세워놓고 생선이나 채소 등의 찬거리를 파는 모자도 있습니다. 새벽부터 생선 비린내를 풍기니 상쾌하진 않지만 그 트럭 주변에서 일고 있는 활기가 싫지는 않습니다. 맞은편에는 과일 트럭이 있는데,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슬쩍슬쩍 건너편을 바라보며 아저씨는 애꿎은 과일의 위치를 바꾸며 시간을 견딥니다. 그 모습이 늘 안쓰러워 보입니다. 아마도 손님이 모이는 시간대가 다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산균 음료를 파는 아주머니는 공원을 드나드는 분들과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눕니다. 특별할 것도 없는 일상의 풍경입니다.
공원 안에서도 다채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것은 기본이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변형된 춤으로 몸을 흔드는 분들도 계십니다. 목책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며 걷는 분, 커다란 나무를 등이나 손으로 두드리는 분, ‘헙헙’ 기합 소리를 내며 걷는 분, 자기만의 건강법인지 독특한 자세를 반복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습니다. 그만큼 진지합니다. 가끔 젊은이들이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들은 대개 커다란 헤드셋을 낀 채 몸에 딱 달라붙는 운동복을 입고 달립니다. 이른 새벽임에도 이미 벤치를 차지하고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는 분들도 보입니다.
저는 비교적 빠른 속도로 걷기 때문에 무리 지어 걷는 분들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핏 들려오는 소리가 귀를 스칠 때가 있습니다. 먹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간간이 몸 아픈 이야기들을 나누십니다. 소소한 그런 이야기들이 이제는 하찮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마음 따라 살지 말고 몸 따라 살라’는 말이 한때는 나약한 정신을 합리화하기 위한 말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말 속에 지혜가 있음을 압니다. 고생물학자이며 신부였던 테이야르 드 샤르댕은 어느 글에서 인간이 처한 가장 괴로운 정신적 딜레마는 음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가 그 말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