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한종호
2021. 8. 12. 11:26
“노력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고, 절망에서 출발하지 않고도 성공에 이를 수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 해도, 퇴보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해도, 일이 애초에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돌아간다 해도, 다시 기운을 내고 용기를 내야 한다.”(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 영혼의 편지>, 신성림 옮김, 예담, p.8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입추가 지나면서 아침저녁으로 바람결이 달라졌습니다. 새벽이면 홑이불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그렇게 보아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뭇잎도 그 무성하던 초록이 조금 풀이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매미소리도 조금 애잔해졌습니다. 참매미, 말매미, 쓰름매미, 유지매미 소리가 뒤섞여 숲을 가득 채우더니 이제는 제풀에 꺾인 듯 소리 크기가 줄어들었습니다. 계절은 이렇게 어김없이 순환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러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손수 만드신 것이 어찌 이리도 많습니까? 이 모든 것을 주님께서 지혜로 만드셨으니, 땅에는 주님이 지으신 것으로 가득합니다.”(시 104:24) 볼 눈과 들을 귀가 있으면 세상은 온통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난 주일 예배 전에 소개한 척 로퍼의 ‘자연이 들려주는 말’을 다시 소개하고 싶습니다.
나무가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우뚝서서 세상에 몸을 내맡겨라.
너그럽고 굽힐 줄 알아라.
하늘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열어라. 경계와 담장을 허물어라.
그리고 날아올라라.
태양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을 돌보아라.
너의 따뜻함을 다른 사람이 느끼도록 하라.
냇물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느긋하게 흐름을 따르라.
쉬지 말고 움직여라. 머뭇거리거나 두려워 말라.
작은 풀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겸손하라. 단순하라.
작은 것들의 아름다움을 존중하라.
(<아일랜드 축복 기도>, 로사 신현림 엮음, 사과꽃, p.25)
자연 역시 우리에게는 ‘텍스트’입니다. 고요함에 머물면서 겸허하게 들으려 할 때 자연은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연의 소리를 듣거나 배우려 하기보다는, 자연을 닦달하여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얻으려 합니다. 이때 자연은 자원이 됩니다. 한동안 자연은 자기를 착취하는 인간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지만, 그 착취가 정도를 넘게 될 때 자연의 보복이 시작됩니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빙하 속에 갇혀 있던 이산화탄소가 대기 중에 방출되고, 그 때문에 지구의 온난화가 가속화되고, 지구의 한쪽에서는 물난리로 야단이고, 다른 쪽에서는 거대한 산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터키의 산불은 어지간히 잡혔다고 하지만, 그리스의 휴양지인 에비아섬은 산불로 인해 오렌지빛 불길과 잿빛 연기로 뒤덮였다고 합니다. 외신이 전하는 사진 한 장이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공포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평생을 살아온 자기 집에 불길이 닿는 것을 바라보며 뒤돌아선 81세 할머니는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계셨습니다. 죄송스러운 표현입니다만 뭉크의 그림 ‘절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기후 위기는 지금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풍요의 신화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습니다.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가석방을 두고 어떤 이들은 환영한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분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경제 논리가 법적 공정을 해쳤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 등장하는 소피스트 트라시마코스는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정의를 부정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들으십시오! 저로서는 올바른 것(to dikaion)이란 ‘더 강한 자(ho kreittõn)의 편익(이득: to sympheron)’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플라톤, <국가>, 박종현 역주, 서광사, p.82)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도 같은 진실을 보여줍니다. 힘이 곧 정의인 세상은 암울한 세상입니다.
성경은 공의와 정의가 세상의 토대라고 말합니다. 공의는 미슈팟(mishpat)을 번역한 말인데, 재판관이 법에 따라 엄정하게 판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규범, 법령이라는 뜻도 내포합니다. 히브리인들은 가난한 사람의 송사라 하여 치우쳐 두둔해서도 안 되고, 유력한 사람이라 하여 법을 임의로 적용해도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신뢰 사회의 기초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사법적 정의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정의는 쩨다카(tsedaqah)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것은 억압받는 사람에 대한 애타는 동정과 연결되는 개념입니다. 율법은 가난한 자에게 담보물을 잡았을 때는 해가 지기 전에 그것을 돌려주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입니다”(신 24:13b). 이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정의는, 그것이 아무리 정확하게 행사된다 하더라도 비인간화될 때 죽고 만다. 정의는 그것 자체만이 신격화될 때 죽는다. 모든 정의 너머에 하느님의 동정이 초월해 있기 때문이다. 정의의 논리는 비인격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정의를 향한 관심은 사랑의 행위다.”(아브라함 J. 헤셸, <예언자들>, 이현주 옮김, 삼인, p.323)
정의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하지만, 사랑을 명분으로 정의를 훼손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