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꽃을 먹는 새
한종호
2021. 9. 9. 13:36
한 아이가 쌀새에 대해 물었다.
“저 새는 어떻게 저렇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죠, 엄마? 혹시 꽃을 먹는 게 아닐까요?”(헨리 데이빗 소로우, <소로우의 노래>, 강은교 옮기고 엮음, 도서출판 이레, p.171)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모처럼 맑은 햇빛을 보니 참 좋습니다. 마치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 36:9)라고 노래했던 시인의 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 분들도 계시지요? 가끔 삶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의 언덕을 넘고 나면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또 다른 언덕이 우리를 기다리곤 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것이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꾼 꿈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압니다. 주님께서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는 층계 위에서 서서 들려주신 말씀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 네가 지금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둘째,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고, 땅 위의 모든 백성이 그들 덕분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셋째, 내가 너와 동행하면서 너를 지켜주고 반드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감동적인 약속입니다. 큰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 약속이 일상에서 직면해야 하는 크고 작은 고통과 시련을 면제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는 온 몸으로 시간 속을 기어가야 했습니다. 시련과 고통, 서러움과 두려움을 통과해야 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벌레 같은 이스라엘아’(사 41:14)라고 부르십니다. 그들의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처지를 빗대서 한 표현이겠지만 저는 이 속에 담긴 아픔을 읽습니다. 어린 시절, 비가 많이 내린 다음 날 시골 신작로를 타박타박 걷다 보면 곳곳에 물이 고여 있었습니다. 흙이 가라앉아 고운 바닥에 마치 들판에 난 외길처럼 긴 선이 그어진 것을 볼 때마다 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들여다보곤 했습니다. 그 외줄은 지렁이가 온 몸으로 기어간 자취였던 것입니다. 흙 위를 기어간 지렁이의 자취가 왜 그리 쓸쓸하고 처연해 보였는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심상 속에 또렷하게 각인된 그 이미지 탓인지,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는 구절을 볼 때마다 저는 역사의 밑바닥을 온 몸으로 기어가는 이들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세상에는 발레리나가 몸을 솟구치듯 가뿐하고 상큼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바닥에 닿지 않는 것처럼 허청거리며 걷는 이들도 있습니다. 무시당하고 짓밟히면서도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거미’라는 시에서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고 노래한 바 있습니다. 설움과 자주 입을 맞추었다는 표현은 시인이 겪어야 했던 신산스런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온 몸으로 뻘밭을 기어가는 것처럼 살면서도 긍지를 잃지 않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더 고귀하고 높은 가치를 지향한다는 것,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쓴다는 것, 그것이 시인의 드넓은 긍지일 겁니다. 시인뿐만이 아닙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는 이들은 다 나름대로 멋진 인생의 시인들입니다. 있음 그 자체로 세상을 정화하는 이들이 시인이 아니라면 누가 시인이겠습니까? 하나님은 그런 이들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믿음의 반대어는 불신이 아니라 숙명론입니다. 숙명론은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는 비관주의와 다르지 않습니다. 숙명론에 빠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사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주인에게 미움을 살까 무서워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죄 가운데 하나가 나태함입니다. 영어로 나태를 가리키는 단어는 sloth인데, 이 단어는 나무늘보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나무에 매달려 지내면서 아주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사는 동물입니다. 물론 나무늘보도 급할 때는 상당히 빠르게 움직입니다. 기독교 전통이 말하는 나태는 몸이 굼뜬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메말라 활력과 생기를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종의 무기력증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능성을 신뢰하며 자기 일을 성심껏 수행하는 것이 아닐까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의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의 일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산 제물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