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붙잡고

한종호 2021. 9. 16. 11:09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십시오.”(롬 12:15)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백로와 추분 사이를 지나고 있습니다. 교우님들 가정마다 기쁨과 감사가 넘치시길 빕니다. 온 세상을 뒤흔들 듯 요란하던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들고, 이제는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올 때입니다. 도시의 소음 때문에 그 소리를 알아채기 쉽지 않지만, 이맘때가 되면 어릴 적에 벽 사이에서 들려오던 귀뚜라미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귀뚜라미와 나와/잔디밭에서 이야기했다”고 노래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말자고, 둘이서만 알자고 약속했다는 것입니다(‘귀뚜라미와 나와’ 중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 고요한 귀 기울임의 풍경이 떠올라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크고 새된 소리보다는 작고 여린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평안해집니다. 시냇물소리, 솔숲이나 대숲을 스쳐온 바람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소리는 얼마나 부드러운지요? 다시 윤동주의 시가 떠오릅니다. “나무가 춤을 추면/바람이 불고,/나무가 잠잠하면/바람도 자오”(‘나무’ 전문). 이것은 인과관계를 정확히 뒤집은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무가 춤을 추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아무도 시인에게 논리적 오류를 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춤추는 나무가 바람의 존재를 알려주기 때문일 겁니다.

어렵고 난감했던 세월을 살면서도 시인은 이처럼 아름다운 것들에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엄중한 현실을 외면했다고 탓하면 안 됩니다. 힘겨운 시절을 견디기 위해서는 우리 속의 아름다움을 한껏 끄집어내야 합니다. 인간의 숭고함은 평안한 시절에 발현되지 않습니다. 이탈리아의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젊은 시절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힌 채 절망의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일상적으로 자행되는 폭력 앞에서 그는 구타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야 했습니다. 폭격기의 굉음이 들려올 때에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 들판의 치커리와 카모마일을 꺾어 질겅거리기도 했습니다. 굶주림은 사람을 짐승처럼 만들기도 합니다. 빵 한 조각, 죽 한 모금이라도 더 먹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련의 시간을 지나면서도 그가 인간다움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로렌초라는 사람 덕분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도 어려움 속에 있으면서 늘 남을 배려하고 돌보아주려고 했습니다.

“나는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게 된 것이 로렌초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善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 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현경 옮김, 돌베개, p.187) 

선의 희미한 가능성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한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선의 희미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존재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치 성찬에서 사용하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의 일상적 삶이 저 높은 삶의 차원을 가리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코로나 상황이 길어지면서 많은 영세 상인들이 절망의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원룸의 보증금을 빼 직원들 밀린 월급을 주고 세상을 등진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쇠로 된 감방에 갇힌 듯 사방이 다 막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일 겁니다.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이런 일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며칠 전 집 근처인 공덕역을 지나는데, 환풍구 주변으로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었습니다. 그때는 무슨 일이 있었나보다 하고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며칠 후 그곳 환풍구에 놓인 꽃 몇 송이를 보고서야 그곳에서 어떤 사건이 벌어졌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검색을 통해 환풍구 공사를 하던 20대의 젊은이가 9미터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아버지가 공사 책임을 맡고 있던 자리에서 그렇게 속절없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비용 절감을 위해 안전 조치를 소홀히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여전히 생명을 비용의 문제로 본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자기 눈앞에서 추락하는 아들을 본 아버지는 남은 생을 어떻게 견디며 살아야 할까요?

 

 



‘피에타’는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의 몸을 무릎에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의 도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피에타는 자식을 잃고 애통하는 모든 부모들의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여러 해 전 팽목항에서 울부짖는 어머니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는 미켈란젤로의 ‘론다니니의 피에타’를 떠올렸습니다. 피에타 하면 흔히 바티칸에 있는 작품이 떠오르지만 론다니니의 피에타만큼 제게 깊은 울림을 준 작품은 없습니다. 

밀라노의 스포르체스코(Sforzesco) 성 박물관에 있는 이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죽기 며칠 전까지 손을 댔던 미완성의 작품입니다. 그 작품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에서 내려진 예수의 시신을 뒤에서 부축하고 있습니다. 중력에 이끌리듯 아래로 아래로 무너지는 아들을 부둥켜안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처연합니다. 그런데 그 작품을 전후좌우에서 살피다 보면 왠지 호흡이 멎은 예수가 오히려 살아있는 마리아를 업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업고 있는 것 같은 그 작품 속에서 나는 인류의 아픔을 온통 짊어지고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아픔을 당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들의 아픔 속에 화육하고 계십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우리는 마치 세상과의 연결이 다 끊어진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이런 말조차 부질없게 들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설 땅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당신의 몸으로 삼아 외로운 이들 곁에 다가서고 싶어 하십니다.

미국의 영성가이자 설교자인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의 책을 읽는 중에 꽤 공감이 되는 대목이 있었습니다. 그는 40명 쯤 되는 혼성그룹의 영성 모임을 이끈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그들이 다룬 주제는 ‘구체화된 경건’이었습니다. 그날 그들에게 주어진 말씀은 팔복이었고 일체 말은 하지 않고 몸짓으로만 그 말씀을 표현해보기로 했습니다. 대여섯 명이 한 조가 되어 제시된 말씀을 어떻게 표현할지 궁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다 난감해 했습니다. 패닉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인들은 토론하는 데는 익숙하지만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낯설어 합니다. 자의식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그 모임에 참여한 이들은 팔복을 거의 암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말씀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수십 번 이상 들었을 터였습니다. 멤버 중의 목사들은 슬그머니 바깥으로 나가버리고 싶어하는 눈치였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에 속한 한 사제가 시체 역할을 자청했습니다. 자리에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해도 됐기 때문입니다. 15분이 지나 모든 조가 중앙에 모였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이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만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말씀을 맡은 조는 시체 역할을 자청한 사람을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섰습니다. 두 번째 여성이 자리를 잡고 앉아 시체 역할을 하는 이의 머리를 무릎에 뉘였습니다. 다른 두 여성이 그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그들 위에 우뚝 섰습니다. 그러자 마치 그 죽은 여인의 몸 위로 고딕식 건물이 세워진 것 같은 형상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른 이의 몸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깊은 사랑과 슬픔 속에 잠겨 그렇게 멈춰 있었을 뿐입니다. 잠시 후 그들 속에서 숨죽인 흐느낌이 번져 나왔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깊은 당혹감 속에 빠졌습니다. 그 슬픈 흐느낌은 누구도 계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수도 없었습니다. 얼마 후 시체 역할을 하던 분의 몸이 흐느낌으로 흔들렸습니다. 그의 부드러운 흐느낌은 점점 커졌고 다른 사람이 따라 울기 시작했고, 울림소리도 터져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울음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가늠하기조차 어려웠습니다. 그 울음은 죽었던 여인이 몸을 일으킬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자리에 참여한 이들은 누구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온몸으로 경험했습니다.(Barbara Brown Taylor, , HarperOne, p.48-51 참조)

기쁨보다는 슬픔이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줄 때가 많습니다. 그것이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이든 깊은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슬픔 혹은 비애는 인간의 고유한 감정입니다. 슬픔의 강을 따라 흐르다보면 만나지 못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슬픔의 강은 국경, 이데올로기, 종교, 문화, 남녀노소, 빈부귀천 사이를 가로지르며 흐릅니다. 슬픔을 배제하는 문화는 천박합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세상에 주님과 무관한 고통이나 슬픔은 없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들이 주님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슬픔을 찬양할 생각은 없습니다. 슬픔은 극복되어야 할 삶의 부정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을 때 우리는 더 깊은 세계에 접속됩니다.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참 사람됨의 가능성으로부터 멀어지기 쉽습니다.

이번 주일부터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군요. 가족들이 마음 편히 모이기도 어려운 시대이긴 합니다만, 안전하고 즐거운 명절을 맞이하시길 빕니다.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예배를 소홀히 하지 않으시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빕니다. 평화.

2021년 9월 16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