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한종호 2021. 9. 30. 12:01



“어둠이 땅을 덮으며, 짙은 어둠이 민족들을 덮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너의 위에는 주님께서 아침 해처럼 떠오르시며, 그의 영광이 너의 위에 나타날 것이다.”(사 60:2)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빕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습니다. 집에서 교회로 걸어오는 동안 젖은 바짓단이 온 종일 축축합니다. 차양을 때리는 빗소리가 고즈넉합니다. 점심 식사 후에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었습니다. 이런 날에 듣는 첼로 소리는 더없이 깊은 울음으로 다가옵니다. 세상은 이런저런 일로 어지럽지만 가끔은 그런 분잡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서로 엇갈리는 말들이 빚어내는 소란스러움이 우리 영혼을 어지럽힙니다. 홍수 통에 마실 물 없다는 말처럼, 말이 넘치는 이 시대에 참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거짓이 진실의 옷을 입고 등장하고, 파렴치함이 정의의 옷을 입고 나타납니다. 그 소란 속에서 우리 영혼은 점점 파리해집니다. 넓고 큰 세계에 대한 비전을 잃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보다 사람들의 지식의 분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시대이지만, 영혼의 국량은 점점 협소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 겁니다.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고, 숲을 거쳐온 바람처럼 청량한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 1:8)는 말이 실감납니다. 뭔지 모를 결핍감이 우리 영혼을 잠식하고 있습니다.

노자의 말 가운데 제가 늘 명심하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족불욕知足不辱, 지지불태知止不殆, 가이장구可以長久’(도덕경 44장 중).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 오래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도 같은 교훈을 줍니다.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딤전 6:6) 누가 이 말을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자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돈이면 안 되는 게 없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돈을 우상으로 숭배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재물‘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마모나스mamonas’를 번역한 것인데 이 단어는 아람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물’ 혹은 ‘돈’이라는 단어를 두고 굳이 이 단어를 택하신 것은 ‘맘몬’은 신격화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돈은 우리의 가치 세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상입니다. 거라사의 광인 속에 머물고 있던 군대 귀신들은 돼지 떼 속으로 들어가 비탈을 내리달아 호수에 빠져 죽었습니다. 멈출 수 없음, 그것이 광기의 본질입니다.

족한 줄 모르고 ‘조금 더’ 차지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다가 결국은 망신을 자초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적당한 선에서 멈출 수 있으면 좋겠지만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탄 이들은 멈출 줄을 몰라 앞만 향해 질주하다가 결국 위태로움에 빠지곤 합니다. 만족함과 멈출 줄 앎이 지혜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부를 획득한 이들은 거기에 더해 명예까지 얻으려 하고, 더 나아가 권력까지 쥐고 싶어합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의무는 지키지 않은 채, 명예라는 폼 나는 지위까지 다 얻고 싶은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이 영리 추구와 양립할 수 없는 지위를 모두 차지하는 순간, 영리 추구와는 양자택일 관계였던 명예는 자본주의 승자의 전리품으로 변화한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승자독식 사회에서 명예는 승자가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 되고, 승리하지 못한 자에겐 명예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도 조건도 제공되지 않는다.“(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 사계절, p.133-134)

이것은 오늘의 현실만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주전 8세기의 예언자인 이사야는 자기 시대의 전도된 현실을 함축적인 말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너희가, 더 차지할 곳이 없을 때까지, 집에 집을 더하고, 밭에 밭을 늘려 나가, 땅 한가운데서 홀로 살려고 하였으니,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사 5:8) 권력자들은 탐나는 밭이나 집이 있으면 주인을 속여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흉년으로 인해 삶이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연대의 뜻으로 곡식을 빌려주는 대신 그들은 집이나 밭을 담보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지 못할 여러 가지 조건들을 만들어서 결국은 그 땅과 집을 포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올라탄 인간의 삶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땅과 집이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변질된 오늘의 상황에서 예언자의 경고는 참으로 섬뜩하게 다가옵니다. 서민들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경험하며 가까스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는데, 소위 사회의 지도층에 속한 이들은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얻은 정보를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재앙이 닥친다!“는 예언자의 소리가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이 말도 헛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지속적으로 욕망의 길을 따르다가는 영혼이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하니까, 어떤 분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욕망을 줄일 수 있어요?” 이 질문 속에는 욕망을 줄이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적 태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저는 일단 “그냥 해보세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의 싱거운 대답에 싱거운 웃음을 지었습니다. 소비자본주의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뭔가를 소비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이라고 말하며 우리를 길들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욕망이나 취미 더 나아가 생각까지 대중문화와 매체들에 의해 조정되고 있습니다. 광고는 끊임없이 우리의 허영심을 조장합니다. 소비하지 않음이 죄인 것처럼 우리를 몰아댑니다. 욕망은 발생하는 즉시 실현되어야 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가끔은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의 지혜가 필요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 포도는 셔서 못 먹어.” 정신 승리법처럼 보이지만 가끔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자유로워집니다. 먼저 질문에 대해 제가 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 하겠습니다.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일수록 자기 속에 결핍감이 큰 것 같습니다. 마음의 스산함을 가릴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족하는 사람은 다른 이들을 선망하거나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몫을 오롯이 누리려 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농어촌에 사시는 분들 가운데 이 시대의 지혜자처럼 여겨지는 분들이 많습니다. 얼마 전 제게 배송된 잡지 ‘전라도닷컴‘에서 읽은 이야기가 좋아서 제 수첩에 적어 놓았습니다.

“묵고 사는 것은 힘들어도 콩 하나라도 서로 나놔묵고 살고, 옛날에가 재밌었어. 백원 벌문 천 원 모탤라는 욕심있듯이 인자는 세상이 좀 각박해졌어. 돈에 눈이 떠진께 재미난 시상이 가불었어.“(안마도 어부 서용진씨)

“나는 바다가 젤로 재밌어. 그런께 이것 하제. 날마다 하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 젤로 행복한 사람이여.“(안마도 어부 김영식씨)

‘돈에 눈이 떠진께 재미난 시상이 가불었어‘라는 말은 우리 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마치 시 구절처럼 여겨집니다. ‘재미난 세상‘은 어쩌면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들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의무와 욕망 사이를 오가는 동안 재미는 사라지고 삶은 잿빛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삶의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어제 오전에 ‘웨슬리 설교 강의‘를 녹화했습니다. 44편의 설교 가운데 이제 42편을 함께 읽었습니다. 전달하는 저의 부족함을 감안하더라도 웨슬리의 설교는 참 심오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나 칼뱅처럼 많은 신학적 저술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설교 속에는 감리교 신학과 신앙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신학교 다닐 때 저의 선생님은 설교가 모든 신학을 종합하는 예술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 말에 가장 부합하는 분이 존 웨슬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론신학과 성서신학, 실천신학과 윤리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어제 읽은 설교 ‘자기 부인否認‘에서 웨슬리는 ‘십자가를 견디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을 구별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십자가를 견디는’ 일과는 좀 다른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온순하게 복종하는 마음으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참을 때, 그때는 적절하게 ‘십자가를 견딘다.‘고 말하게 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피할 수 있는 것을 자진하여 감수할 때, 자신의 뜻에 상반될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마음속에 품게 될 때, 또한 현명하고 은혜로우신 창조주의 뜻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일을 선택할 때, 우리가 적절하게 말해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됩니다.“(한국웨슬리학회 편, <웨슬리 설교전집 3>, 조종남·김홍기·임승안 외 공역, 대한기독교서회, p.255-6)

믿음으로 살려는 이들은 십자가를 견디기도 해야 하지만 능동적으로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순간은 마치 껍질이 깨지는 순간과 마찬가지입니다. 아픔과 충격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는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하게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그 길 위의 적당한 지점에 멈추어 선 채 앞으로 더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어중간한 신앙생활에 만족하는 것이지요. 잊지 않으셨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향해 길 떠난 순례자들입니다. 어렵더라도 그 길을 끝까지 가야 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늡늡한 마음으로 우리 인생의 경주를 계속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을 빕니다.

2021년 9월 30일
담임목사 김기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