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

인생의 갈증, 그 해갈은 어디에

한종호 2022. 1. 6. 14:12

새로운 한해를 시작하면서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지만 며칠 못가서 어긋나곤 한다. 지난 해를 보내면서 세월의 흐름만큼 우리 자신이 성장했는지 묻게 된다. 우리는 이렇게 세월이 흐른 뒤에 그 시간의 파편을 주워 모아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가늠하게 마련인가 보다.

 

그런데, 인생을 살면서 신앙이라는 새로운 세계와 만나게 되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여러 가지 근본적인 질문들, 가령 나는 누구인가로부터 시작해서 어떤 삶을 목표로 삼아야 되는가등등 간단치 않은 주제들과의 씨름을 보다 용이하게 해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 아니면, 단 한마디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라고 설득하면 그로써 우리의 고뇌는 더 이상 의문의 여지없는 상태로 안정되는 것일까?

 

아무래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우리의 일상의 생활과 분리되어 따로 종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 그리고 일상의 자질구레한 또는 사사로운 문제와는 관련이 없이 보다 심오하고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들하고만 상대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 모두가 다 신앙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믿음이 없는 삶, 삶이 없는 믿음 모두가 다 허무하거나 혹은 껍질뿐인 앙상한 관념의 놀이에 그치기 십상이다. 신앙이란 삶 그 자체의 절박한 주제이고, 그 삶을 펼쳐나가는 방식이다. 그런 점에서 <성서>는 매우 솔직하고 구체적이다.

 

사실 신앙의 세계에 첫 발을 들여 놓거나 또는 그저 주변에서 맴도는 경우에도 성서를 읽게 되노라면 성서가 최상으로 경건한 책이라는 일종의 고정관념과도 같은 생각들이 들어맞지 않는 것을 발견하고 당혹하게 된다. 인간들의 일상의 고뇌를 비롯해서 전쟁, 파괴, 속임수, 간음, 질투, 투쟁, 사랑, 근친상간, 타락 등등 무수한 드라마가 그 안에 담겨 있어서 그렇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사와 그리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는 하나님의 존재도 그 속에 그려져 있다. 아니 때로는 더욱 잔혹하고 편협하며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요구를 인간에게 하는 그런 존재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정도이다.

 

그래서 혹자는 성서를 문학으로 이해하고, 혹자는 역사서로 이해하며 혹자는 이스라엘 민족종교의 경전정도로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그치기도 한다. 성서에 대한 이런 이해가 반드시 틀리지만은 않다. 성서는 그런 면모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우리는 성서가 보다 인간적인 차원에서 다가올 수 있는 길을 보게 된다. 오랜 세월 속에서 인간이 겪은 무수한 사건들을 삭이고 삭혀서 그 오랜 시간의 풍파(風波)에 마모되지 않은 평생의 고백들이 정수(精髓)처럼 하나로 묶여진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면서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그런 어려움들을 하나 하나 통과해오면서도 그 삶에 깊숙한 연륜과 지혜가 있는 어른들의 이야기에서 인생의 새로운 깨우침을 얻는다. 그 마음과 영혼이 온통 부서지는 듯한 고통을 겪고도 그 삶에 아름다운 품위가 있고, 경청할 만한 진리가 번뜩일 때에 우리는 그가 치른 고난이 도리어 보석이 되어 빛나는 것을 경험하고 감격해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와 관련이 있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살아온 삶의 이력과 그로써 얻은 진실에 대한 눈뜸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살면서 별로 고생도 해보지 않고, 인생 보는 눈이 가볍고 남의 고통에 대해서 민감하지 않은 이에게 우리는 인생의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차원에서 성서는 이런 온갖 고난의 골짜기를 힘겹게 통과한 연후, 자신의 영혼에 길러진 귀중한 생명의 진액을 인류에게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인생사의 갖가지 곡절과 시비 앞에서 성서는 그 모든 문제들을 종국적으로 풀어나가는 힘의 원천이 결국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인간의 본질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바로 이러한 마음과 고백을 만날 수 있는 현장이 성서 속에 있다는 점에서 그 어떤 선입관이나 편견 또는 종교적 교리든지 아니면 신학적 가르침에 좌우되지 말고 자신의 인생살이와 성서속의 세계가 하나로 만날 수 있는지를 물으면서 읽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사진/김승범

 

요한복음에는 나사렛 예수와 한 사마리아 여인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길을 가다가 목이 마른 예수께서 물을 길러 나온, 유대인들과는 서로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 그것도 아무도 없는 호젓한 우물가에서 여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종교지도자의 스캔들로 문제 삼을 만한 현장이었다. 물을 한잔 청하자, 여인은 별로 친절하지 않게 대꾸한다. 이에 예수는 자신이 누군가를 알았다면 거꾸로 예수에게 여인이 물을 달라고 청했을 것이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한다. 그러자 여인은 두레박도 없는 주제에 무슨 소리냐하면서 핀잔을 준다. 예수는 자신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물이라고 한다. 매일 물을 길러오는 고된 노동에 시달려 있던 여인은 귀가 번쩍 뜨인다. 팩팩 거리던 여인이 자신의 힘든 지경을 짚어나가는 예수 앞에서 마음이 한결 열린 것이다. 게다가 예수는 여인의 삶, 그 본질적인 고뇌 즉, 지금 살고 있는 남편도 진짜 남편이 아니며 이미 몇 사람의 남자를 거치면서 살아온 역경의 현실을 언급한다. 이렇게 저렇게 전전하면서 살아왔지만, 아직도 그 마음과 몸이 지쳐서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되어 있는 여인의 영혼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아픔을 어루만진 것이다.

 

그러자 여인의 삶은 전격적으로 예수를 향해 열린다. 그리고는 물을 긷기 위해 가져왔던 물동이를 우물가에 내버려두고 동네를 향해 달려간다. 예수를 알리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된다. 여인이 우물에 온 것은 물동이에 물을 담아 돌아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이 이 여인의 삶에 지금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그녀는 물동이를 버리고 간다. 홀연 정작 중요한 것이 깨달아 지는 순간, 지금껏 집착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신앙의 세계를 통해서 만나게 되는 예수는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을 주는 분이다. 우리의 삶, 그 처지를 바로 보고 짚어주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껏 매달려 있던 욕망이라든가 좌절감이라든가 또는 허망한 생각에서 단숨에 우리를 깨어나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 그 깊숙한 곳까지 부드럽게 육박해 들어오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 이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간 것이 아니라, 그 영혼에 생명의 힘을 길어 올릴 두레박을 얻은 여인이다. 바로 그런 얻음이 있었기에 물동이는 더 이상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영혼의 두레박’, 그것을 우리가 얻게 되면 우리는 인생의 갈증을 새롭게 축이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 무수히 방황하는 심령들은 모두 바로 이 두레박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올 한 해, 부디 그런 두레박을 얻어서 삶의 새 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종호/<꽃자리>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