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오는 동안 길이 막힐 때마다 시편을 붙들고 살았다는 저자는 시편의 구절들이 거친 바다를 비추는 등대 구실을 해줄 때가 많았다고 고백한다. 시편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일상의 무게에 짓눌려 보지 못했던 삶의 다른 층위를 바라보는 일이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욕망 사이에서 바장인다.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확신과 회의, 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 정의와 불의, 사랑과 미움이 시도 때도 없이 갈마들며 삶의 무늬를 만든다.
이 책은 그런 인간의 삶이 빚어낸 다채로운 무늬로 가득 차 있는 시편의 세계를 보여준다. 기쁨의 찬가가 있는가 하면 깊은 탄식이 있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감사가 넘치는가 하면 아무리 불러도 응답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있다. 가없는 용서의 마음을 드러내는 시도 있지만 악인이나 원수들의 불행을 기원하는 시도 있다. 시편을 읽다가 가끔 그 적나라한 감정 표현에 놀라는 당혹스러운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시편 속에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온갖 경험이 녹아들어 있다. 마음을 다해 시편을 읽거나 낭송하는 일은 우리 속에 들끓고 있는 소리를 잠재우는 일이고, 다른 차원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현실이 어둡다고 탄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피조물들의 신음 소리가높아가고 있는 이 때에 하나님의 꿈을 품고 사는 이들은 세상의 흐름을 거스를 용기를 내야 한다.아직도 경제 논리가 생명의 논리를 압도하는 게 우리현실이다.야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 또한 우상숭배자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믿음의 사람들은 육체의 욕망,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한일서 2:16)에서 자꾸 멀어져야 한다.그래야 자유로워진다.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욕망에 저항할 생각조차 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싸움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는세상에 길들여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영혼의 발신음> 중에서
*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용사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일어날지라도,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려네”(시편 27:3). 하나님의 은총에 자기를 온전히 맡긴 사람의 고백이다. 하나님의 부력을 경험해 본 사람의 고백이다. 길들인 독수리와 함께 패러글라이딩(paragliding)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날개를 편 채 유영하는 독수리와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사람이 똑같은 바람을 타고 날았다. 그 모습이 경이로웠다. 신앙인이란 어쩌면 하나님의 바람에 몸을 맡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뜻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여 세상일을 도외시하고 산다는 것은 아니다. 그 바람은 때로는 지친 나그네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산들바람일 때도 있지만, 앞에 있는 장애물을 다 날려버리는 회오리바람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일깨우는 봄바람일 때도 있지만, 불의한 세상과 권력을 날려버리는 태풍일 때도 있다. 가깝게 느끼는 몇 분의 목사님들은 평소에는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하고 겸손하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불의를 질타할 때는 사자로 변한다. 두 모습 다 하나님의 사람다운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