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숙의 글밭/하루에 한 걸음 한 마음
천인공노(천공)
한종호
2022. 4. 2. 07:30
내 인생의 스승을 찾기 위해서
한 권의 책도 함부러 선택하지 않았다.
중학생이 되고 신학기에 국어 담당이신 담임 선생님이 학급문고를 만들려고 하니, 집에 있는 책들 중에서 각자 두 권씩만 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당시 우리집에 있는 책이라곤
한 질의 백과사전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나보고 쓸데없는 책 읽지 말고 학교 공부만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정말로 교과서만 보았고, 백지 같은 머릿속에 입력된 건 교과서와 매 수업 시간마다 과목 선생님들의 재미난 수업 내용이 대부분인 중학생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중3 때는 시험지를 풀면서, 선생님이 여기서 장난을 치셨네, 하면서 함정은 피해갈 수 있었고, 정답을 찾을 수 있었다.
쉬는 시간에는 또래들이 돌려보던 '인어공주를 위하여'라는 그 흔한 만화책도 내 손은 피해서 지나갔다. 오죽했으면, 시험 기간이 끝나던 날 대여섯 명의 친구들을 따라서 처음으로 들어간 만화방에서도 만화라는 게 영 시시하게 다가왔고, 만화책을 읽느라 신난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조심스레 가방에 있던 교과서를 꺼내서 조용히 보았다. 그런 나를 친구들도 그냥 냅뒀다.
중학생이 되고부터 수업시간이면 매 과목마다 처음에 등장하는 의문 문장이 꼭 있었다. 한 단어에 대한 역사와 사회적인 '정의'와 '의미'였다. 내겐 '재미'보다 늘 '의미'가 문제였다. 잡히지 않는 물처럼 바람처럼 언제나 '의미'는 내게서 맴돌았다. 지금까지도 습관처럼 한 가지의 사안에 대하여서도, 나 혼자서는 역사적인 의미와 사회적인 의미가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져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곤 한다.
그런 중학생이 나였기에, 담임 선생님이 내주신 학급 문고 두 권이 마치 내게는 인생의 숙제로 다가왔다. 아무 것도 모를 때지만, 그렇다고 아무 책이나 그냥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대신동 영주터널 앞 사거리에서 동대신동 시장 방면으로 골목길을 돌면 모퉁이에 작은 서점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날 때면, 통 유리 사이로 책들이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나를 그 안으로 데려간 적이 없었고, 나 스스로도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한 적 없었던 작은 서점.
그날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서점이란 곳으로 들어간 일을 두고,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보석처럼 빛나는 순간으로 추억한다. 학급 문고라고 하지만 아무 책이나 손에 잡히는대로 선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심스레 서점 안으로 들어온 어린 중학생에게 서점 주인 아저씨는 찾는 책이 있느냐고 물어오셨고, 나는 "학급 문고 만드는 책이오." 그 이상 우리 사이에는 이어지던 물음도 없었고, 대답도 없었다. 침묵이 흘렀고 커다란 침묵이 흘렀다.
서점 안의 책들이 인생의 숙제처럼 무겁게 다가왔다. 길을 잃은 순간이었다. 내가 걸어가야 할 새로운 길이 어디에 있을지, 어떤 책이 '의미'가 있을지, 나는 찾아야만 했다. 그때 문득 한 가지 확실한 방책이 스쳤다. "다 읽자."
나는 서점 안에 있는 책들의 제목을 하나씩 읽어나가기 시작하였다. 마치 오랜 세월 정박해 있던 거대한 선박을 미세한 힘으로나마 움직이려는 듯한 묵직함으로 서서히 손끝부터 하나씩 하나씩 제목들을 읽어나가기 시작한 미련스런 일이었다. 매대에 누웠는 책, 책장에 꽂혀 있는 책의 제목을 일일이 다 읽으며, 내 가슴에 하나씩 대어 보았다. 마치 수학 시간처럼 일대 일로 대입해 보았다.
미련한 것 같지만, 그것 말고 내겐 다른 비약적인 방법이란 없었다. 자칫 한 톨의 진실 하나라도 놓칠 수 있는 여지를 둘 수는 없었기에, 어떠한 편법이나 비약적인 효과적인 방법 가령 누군가에게 대신 찾아달라거나, 이런 쉬운 방법을 적용하다가 허술하게도 진실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건 시험지 앞에서 올백을 맞기 위해서, 쉽게 푼 문제라도 시험 마치는 종이 치기 직전까지는 끝까지 시험지를 물고 늘어지던 습성이 그대로 적용된 탓이리라. 그러면서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나선 것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점 안에는 침묵의 강물만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아무도 나의 항해를 방해하는 이가 없었다. 지금 세월이 흘러 문득 생각하니, 말없이 기다려준 서점 주인 아저씨에게 고마운 마음이 든다. 나는 그렇게 누군가를 지루하리 만치 기다려준 적이 있었던가.
그리고 난생 처음 들어간 그 서점의 크기가 작아서 다행이었다. 요즘처럼 대형 서점이었다면, 헤매다가 중간에 지쳤을지도 모른다. 동네마다 그런 작은 서점들이 당산 나무처럼 서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정말로 어둔 밤 모래밭에서 두 개의 보석을 발견하고 말리라는 기세로 눈에 마음에 불을 밝혔던 시간이다.
누웠는 책들 중에서 <법정 스님의 인도 기행>,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 중에서 <도올 김용옥의 중고생을 위한 철학 강의>를 골랐다. 마음에 쏙 들었다. 책 표지에서 본 도올 선생의 눈빛과 모습이 문득 마음에 들었다. 지금의 말로 표현하자면, 진지한 구도자의 눈빛으로 다가왔다. 법정 스님의 인도 기행은 마음의 고향처럼 편안하게 다가왔다.
그때까지 나는 법정 스님과 도올 김용옥 선생을 알지 못했다.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던 그 두 명의 보석은 그렇게 나에게는 어둔 밤 어둔 세상에 빛나는 별처럼 저절로 드러나 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