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
악한 자들의 융성
한종호
2022. 6. 21. 11:30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그것과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거둘 때가 될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거둘 때에, 내가 일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마태복음 13:29-30)
종들은 야단이 났다. 주인이 분명 좋은 씨를 밭에 뿌렸는데, 어찌 된 셈인지 가라지가 생기고 만 것이다. 이것은 당장에 주인으로부터 추궁당할 일이었다. 보통의 경우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종들은 주인에게 보고하기 전에 자신들이 재빨리 가라지를 뽑아 버리고 그 책임을 면하고자 수를 쓰기 쉽다.
그러나 비유에 등장하는 이 주인은 그런 주인이 아니었다. 자신은 분명 옳게 투자했고 제대로 경영했는데 과정에서 이상이 발생하면, 밑에 사람들을 들들 볶아 책임을 묻고 스트레스를 받게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 주인이었기에 종들은 사태를 주인에게 정직하게 보고한다. 그러면서 종들은 원수가 그리했으면 지체하지 말고 가라지를 박멸해 버리는 것이 좋다고 말하지만, 주인은 이를 가볍게 제지한다.
제지하는 이유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첫째, 가라지 뽑는 일에 흥분해 버린 종들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것을 내다보았다. “아니, 이럴 수가.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하고 덤벼드는 사람은 사태 해결을 그르친다. 흥분해버린 탓에 가라지와 밀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공을 세우겠다는 욕심으로 밀까지 뽑아 가라지 뽑는 실적을 올리려 들 수 있다. 애꿎은 희생을 낳게 되는 것이다.
둘째, 그래서 주인은 가라지 뽑는 일보다 밀이 다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 가라지를 왕창 뽑아버릴 수 있다면 까짓 밀 하나둘쯤이야,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시키는 것은 받아들일 만하다라는 사고가 이 주인에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밀의 성장에 가라지는 도리어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시사가 담겨 있다. “둘 다 자라도록 내버려두어라.” 하신 것은 가라지의 도전 앞에서 밀이 훈련을 받고 성장하는 섭리를 지적하신 것이라고 하겠다. 가라지는 자신의 존재로 밀을 밀어낼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로써 밀은 더욱 강해진다. 가라지는 이걸 그만 착각하고 만 것이다.
셋째, 이것이 이 비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메시지가 이날까.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때가 오면, 가라지는 그 정체를 도저히 위장할 수 없게 되어 단으로 묶여 불에 태워진다는 것이다. 즉, 그렇게 제딴에는 열심히 자라났지만 아무 소용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밀과 가라지가 제대로 분별이 가지 않는 운명인 것 같고, 중도에는 가라지가 왕성하게 자라나 밀밭을 뒤덮을 기세로 자신의 세력을 내세우지만, 그런 것들이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시각이 반드시 오고야 만다는 것이다. 융성한다는 것이 선이자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악한 자들의 융성은 도리어 그들의 죄의 증거요, 멸망의 표지판이다. 그러나 세상은 이들 가라지의 융성을 자신의 삶의 모델로 삼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나랏일은 뒷전이고 대통령 놀이에 빠져 거들먹거리면서 선택적 '법과 원칙'을 들이대며,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그들의 권리를 짓밟는 법을 법이라는 이름으로 난도질 하고 신분에 따라 법 적용을 달리하는 법만능주의, 부와 권력을 쥐고 무언가를 이룬 성취, 이른바 성공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가치판단의 척도가 되어가는 출세주의, 무수한 노력과 시간과 정열과 재물을 쏟아부어 결국에는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허무한 종말을 향해 달리는 성장주의, 정작 내면은 가난해져 가면서 그럴싸한 외모로 출세를 도모하는 이른바 루키즘(lookism, 외모지상주의),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대의 가라지이다. 때가 오면 판명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