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

환멸의 강을 사랑으로 넘을 때

한종호 2022. 9. 3. 10:38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출애굽기 4:13)

 

이 대목은 호렙산 떨기불꽃 앞에 선 모세가 하나님의 파견명령에 대하여 거듭거듭 따를 수 없음을 밝히는 장면이다. 그는 자신이 여러 가지로 능력이 없어서 맡기신 일을 수행할 수 없다고 하나님께 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이 소명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진정 그의 능력 부족에 대한 겸허함 때문일까? 그는 애굽으로 돌아가서도 그렇고, 이후 광야에서도 백성들의 불평과 반란, 그리고 배신을 수없이 겪게 된다. 이것은 그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아니었다. 바로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보낼 것을 요구하여 도리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역이 심해지면서 그 비난의 화살이 모두 모세에게로 집중되자, 모세는 하나님께 아니, 이럴 것을 뻔히 아셨으면서 왜 나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항변한다.

 

훨씬 이후에, 물 때문에 고생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능멸과 질타를 당하자, 하나님에게 지시받은 대로 바위에서 물을 내게 하면서 모세는 자신의 마음속에 그동안 엉켰던 부화를 있는 대로 다 터뜨린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인간에 대하여 깊은 환멸을 경험했던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애굽 감독관을 해치우고 동족을 구했다. 하지만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것도 다른 이가 아닌 동족의 밀고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런 지경에서 광야에서 수십 년의 기막힌 이방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내면에, 자신의 동족이 고난을 겪고 있다고 했을 때 무슨 마음이 들었을까? , 속히 달려가야지하였을까? 아니면, ‘그런 종자들은 고생을 더 해야 정신을 차려했을까? 혹여 고난의 자리에서 동족을 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하더라도 그가 인간에게 겪은 환멸의 상처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그는 자기종족으로부터 배신당했던 사람이다.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깊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무언가 의로운 일을 했다고 여겼지만 바로 그들로부터 배반당했다. 그로 말미암은 환멸의 상처로 울분을 삭이며 광야로 떠나야 했던 모세의 모습을 먼저 떠올리지 못한다면, 이 호렙산에서의 모세의 거절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도대체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가장 아끼고 사랑했다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배신당하고, 그로써 인간에 대한 환멸의 경험이 존재한다면 이 모세의 심사는 헤아리고도 남는다.

 

혹자는 이런 일을 겪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 신앙은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환멸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그 환멸의 강을 사랑으로 넘을 때 신앙은 우리 안에서 새롭게 성장할 수 있다. 무수한 신앙인들이 목회자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는가. 이 인간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했다가 예기치 않게 당하는 좌절과 고난, 그리고 상처는 이렇게 해서 새로운 성숙의 단계로 진입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다.

 

사실 따져보자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실로 얼마나 환멸스러운 존재인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용서에 용서를 거듭하시면서, 새로운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지금도 역사하심을 믿고 고백한다. 신앙인은 바로 그런 역사에 부름 받은 자들이다. 인간에 대한 환멸로 신앙의 의욕이 꺾이고, 주저앉고 싶을 때 호렙산의 모세가 지녔을 심사를 떠올리면서 그가 하나님의 끊임없는 격려와 능력주심으로 마침내 환멸의 골짜기를 건너 하나님의 사람으로 섰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오늘날 교회의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을 새롭게 일으켜 세울 수 있지 않을까? 성서가 이렇게 읽혀질 때 우리는 성서에서 한없는 용기와 지혜, 그리고 생명의 꺾을 수 없는 소생력을 피와 살로 얻게 되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