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 2022. 10. 29. 14:02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27)

No. 27 그에게 맡기라!

마태 수난곡 252~53
마태복음 27:7~14
음악듣기 https://youtu.be/SjaCWcDxxjc
52(43)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11.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7. Sie hielten aber einen Rat, und kauften einen Töpfersacker darum, zum Begräbnis der Pilger. 8. Daher ist derselbige Acker genennet der Blutacker, bis auf den heutigen Tag. 9. Da ist erfüllet, das gesagt ist durch den Propheten Jeremias, da er spricht: Sie haben genommen dreißig Silberlinge, damit bezahlet ward der Verkaufte, welchen sie kauften von den Kindern Israel; 10. und haben sie gegeben um einen Töpfersacker, als mir der Herr befohlen hat. 11. Jesus aber stund vor dem Landpfleger, und der Landpfleger fragte ihn, und sprach
대사 빌라도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Bist du der Juden König?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Jesus aber sprach zu ihm
대사 예수 네 말이 옳도다. Du sagst's.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2.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12. Und da er verklagt ward von den Hohenpriestern und Ältesten, antwortete er nichts. 13. Da sprach Pilatus zu ihm:
대사 빌라도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Hörest du nicht, wie hart sie dich verklagen?
내러티브 에반겔리스트 14.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14. Und er antwortete ihm nicht auf ein Wort, also, daß sich auch der Landpfleger sehr verwunderte.
53(44)
코멘트
코랄 당신의 나아갈 길과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진정한 보호자께 맡기라
그 분은 하늘을 주관하시고
구름과 공기와 바람까지도
움직이시는 분이시니
당신이 길을 찾게 하시고
그 길을 걸어갈 힘을 주시리.
Befiehl du deine Wege
Und was dein Herze kränkt
Der allertreusten Pflege
Des, der den Himmel lenkt,
Der Wolken, Luft und Winden
Gibt Wege, Lauf und Bahn,
Der wird auch Wege finden,
Da dein Fuß gehen kann.

 

 

정체를 숨긴 마성의 생존기

 

유다는 성소에 돈을 던져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유다가 성소에 던져 놓은 돈을 다시 거둡니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하였고 그 결과를 마주한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었을까요?

 

원하던 결과 대로 예수를 붙잡았습니다. 유다가 자살함으로 예수를 잡기 위해 사람을 매수했던 일의 핵심 인물이요 증인이었던 사람도 사라졌습니다. 그 우두머리와 제자 중 하나가 사라졌으니 그들의 영역을 위협했던, 그토록 경계했던 예수의 도당도 와해 될 것입니다. 게다가 그 일을 위해 썼던 은 삼십이라는 적지 않은 돈도 그대로 회수했으니 그들 입장으로는 남는 장사였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성과가 있었으니 그것은 모든 잘못을 가룟 유다에게 뒤집어씌워 그들의 이름은 역사의 그늘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습니다.

 

사실 대제사장과 그들의 부역자들이야말로 가룟 유다보다 더한 마귀의 하수인들이었습니다. 마귀는 거짓의 화신이요 정체를 숨기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주인을 잘 닮았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살아있고,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있어서는 가룟 유다의 이름 뒤에 그들의 이름을 숨기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그들조차 마귀의 하수인으로 쓰임 받고 있었다는 그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기득권, 아니 그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정치적인 고급 기술을 발휘했을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도덕과 양심을 고려하던 사람들이 공동의 정치적 이득을 추구할 때 보다 쉽고, 보다 너그럽게 악이 발동합니다. 거짓과 속임이 난무하였고 사람이 죽었지만, 계획이 성공하고 돈이 회수되자 그들은 자신의 책략에 감탄하며 승리감에 도취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와 정치판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대제사장들은 예수와 가장 먼 대척점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길, 예수의 꿈을 거스르고 훼손하는 이들은 정작 교회 안에 있지요. 예상치 못했던 유다의 자살이 조금 꺼림칙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얻은 성과를 생각하자니 그 정도의 변수는 리스크의 오차 범위 안에 있었고 오히려 그의 자살로 인해 계획이 뒤탈 없이 잘 마무리되었노라고 스스로 다독였습니다. 거사를 치르는 데 있어 한 사람의 목숨 정도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방식은 달랐습니다. 그는 늘 한 사람의 영혼에 집중했습니다. 그와 함께 있을 때에는 모든 사람이 예수께서 그 순간만큼은 오롯이 그에게만 집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치유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만나 그의 마음과 영혼을 들여다보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옷자락이라도 만져서 고침을 받고자 했던 여인을 끝내 찾아내셔서 만나 주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큰일을 도모하지도 않았거니와 빠른 길을 찾거나 서둘러 재촉하지도 않았고, 어떤 일을 치르기 위해 거짓을 사용하거나 한 영혼을 희생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별다른 계획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큰 강물처럼 그때그때의 상황을 맞이하면서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움직였습니다.

 

언젠가부터 유다는 그러한 그의 방식이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더 지혜롭게, 조금만 더 조직적으로 움직이면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가뜩이나 무식한 제자들 틈에서 자신의 똑똑함에 대한 확신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결국 다른 제자들이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떠올립니다.

 

유다가 그의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을 때 이미 예수는 잡혀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매질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면서도 그는 무기력하게 순응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가장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가장 미련한 일을 벌였음을 유다는 그때에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노원구에 삽니다. 동서로 산이 있고 큰 개울이 흐르는 이 동네를 좋아합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노원구에 살면서 가장 의미 있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고 노회찬 의원의 정치적 희망이 꽃피웠던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겠지만 우리 사회에 다시 나오기 힘든 특별한 정치인이었다는 것에는 많은 분이 동의할 것입니다. 사람의 얼굴에는 많은 진실이 담겨있습니다. 정치인답지 않은 그 환한 미소가, 노동운동가답지 않은 싱글벙글한 얼굴과 그의 유머가 좋았습니다. 그러한 여유는 진실함에서 나옵니다. 그런 그였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잠시 진실함을 잃어버렸던 자신의 모습에 절망했던 것이지요.

 

일전에 어떤 유명한 정치인이 노 의원을 일컬어 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저녁 언론인 손석희가 뉴스 말미에 노회찬 의원에 대해 평가한 말이 있습니다. 마지막 멘트를 하면서 20초가량 감정을 추스르며 끝내 눈물을 참아내는 그의 침묵은 언론인으로써 중립을 지키고자 하는 그의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런 그가 그날만큼은 무언가 작정을 한 듯 말을 해나갑니다.

 

“... 노회찬은돈 받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아니라 적어도 돈 받은 사실이 끝내 부끄러워 목숨마저 버린 사람이라는 것.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비리를 지닌 사람들의 행태를 떠올린다면 우리는 세상을 등진 그의 행위를 미화할 수는 없지만, 그가 가졌던 부끄러움은 존중해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그에 대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빼버린 그 차디찬 일갈을 듣고 난 뒤 마침내 도달하게 된 저의 결론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의 동갑내기 노회찬에게이제야 비로소 작별을 고하려 합니다.”

 

우리가 유다에게만 집중하며 그에게 돌을 던지면 던질수록 그 뒤에 숨어 있는 더 강한 마성은 더 깊이 숨어들어 숨을 죽이고 미소짓습니다. 그 마성을 빛 가운데로 끌어내려면 어떻게 할까요? 먼저 우리는 우리 안의 가룟 유다를 발견해야 합니다.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의 방식을 거부하고 알량한 똑똑함으로 실용적인 것과 부가가치의 극대화만을 추구하는 모습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큰 비리를 지닌 사람들’,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실행했음에도 정체를 숨기고 지금까지도 가룟 유다 뒤에 숨어 있는 마성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죄악을 감추려 하기보다는 사람들이 분노를 쏟아부을 수 있는 대상, 언제라도 돌을 던질 수 있는 가룟 유다를 앞에 내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다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우리 안의 유다를 먼저 발견하고 조금이라도 그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뒤에 있는 더 악한 것의 정체를 직시하는 가운데 유다에게보다 더 큰 거룩한 분노를 그들에게 쏟아 놓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핏값으로 산 나그네의 묘지

 

한편 대제사장 무리는 유다가 던져 놓은 은 삼십을 가지고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습니다. 그들 말대로 그 은 삼십은 예수의 핏값이었습니다. 예수의 핏값으로 객사한 나그네들이 안식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흐의 모테트 ‘O Jesu Christ, meins Lebens Licht / , 예수 그리스도, 내 생명의 빛이여(BWV 118)’의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O Jesu Christ, meins Lebens Licht

Mein Hort, mein Trost, mein Zuversicht,

Auf Erden bin ich nur ein Gast

Und drückt mich sehr der Sünden Last.

 

오 예수 그리스도 내 생명의 빛이시여!

나의 피난처, 나의 위안, 나의 확신이시여!

이 땅 위에서 나는 단지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리고 죄의 짐이 나를 심히 짓누릅니다.

 

음악듣기 https://youtu.be/jUZ1eZ85WvQ

이 곡은 제가 참으로 좋아하는 바흐의 음악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바흐의 삶과 같은 음악이라고 느낍니다. 바흐는 위대한 작곡가 이전에 위대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대한 작품들을 남기고 나그네(ein Gast)처럼 사라졌습니다. 바흐 또한 나그네와 같은 자신을 위해 목숨을 다하여 참된 안식을 주신 예수를 사랑했었기에 평생 그를 위해 음악을 통해 헌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음악은 원래 장례 예배를 위해 작곡되었습니다. 그 위대한 인물의 장례식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는 정말 나그네처럼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상상해 보기를 바흐의 장례식에서도 이 음악이 울려 퍼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는 교회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직무를 당연히 여겼고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기보다는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자기 작품의 곳곳에 ‘S.D,G'(Soli Gloria Deo,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사인을 남겼습니다. 겸손이랄 것도 없었습니다. 그의 신앙 안에서 그런 삶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그가 떠나고 100여 년이 지나도록, 멘델스존에 의해서 마태수난곡이 다시 연주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먼지처럼 사라져 버린 J.S.바흐의 이름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나그네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세기 47:9)

 

 

야곱은 우리가 익히 아는 그의 파란만장한 삶을 나그네라는 한마디로 정리합니다. ‘험악한 세월이라는 말이 주는 무게가 야곱의 삶이 그려진 창세기 절반의 무게와도 맞먹는 것 같습니다. 야곱이 그토록 얻고자 했던 장자권, 아내, 소유, 가족, 모두 종착점 앞에 선 나그네 뒤의 흙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이 땅에서 저마다의 험악한 세월을 거처 먼지처럼 사라져 가야 할 나그네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무죄한 핏값으로 온 세상 모든 나그네들을 위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현실의 아픔과 미래의 희망을 그에게 맡기라!

 

마태 수난곡을 대표하는 코랄 선율이 다시 등장합니다. 바로 찬송가 145오 거룩하신 주님의 멜로디입니다. 이 코랄의 가사는 파울 게르하르트의 시입니다. 작곡가 바흐와 대본작가 피칸더가 이 장면에서 이 코랄을 떠올려 삽입한 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의 단어가 마태복음 27장의 이 장면과 파울 게르하르트의 시를 연결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돌보는 자’, ‘보호자라는 의미의 'Pfleger/플레거'라는 단어입니다.

 

14절에서 총독 빌라도는 예수를 추궁합니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예수를 바라보았습니다. 저들의 고발 내용도 허무맹랑했거니와 예수를 보니 죄가 없었고 아내의 꿈 이야기도 있었기에 어떻게든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유리한 증언을 끌어내기 위해 예수께 이것저것을 물어보았습니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답답한 빌라도는 끝내 마지막 질문을 합니다.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고난을 피할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께서도 총독 빌라도를 의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도 당연히 그가 스스로 변호하고 자기에게 도움을 요청할 줄 알았나 봅니다. 그래서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심에 크게 놀라워 한 것이지요.

 

독일어로 총독지역을 돌보는 관리라는 의미의 ‘Landpfleger/란트플레거'입니다. 그리고 파울 게르하르트의 코랄의 당신의 길과 아픔을 가장 신실한 보호자께 맡기라라는 가사에서 보호자에 해당하는 단어도 ‘Pflege(r)’입니다. , 예수는 그의 나아갈 길과 아픔을 눈앞에 있는 인간의 힘을 상징하는 ‘Landpfleger'에게 맡기지 않고 진정한 ‘Pfleger’이신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이 코랄은 이 장면에 정확히 들어맞았고 바흐와 피칸더도 이 기막힌 연결에 스스로 경탄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 코랄의 다른 가사는 오 거룩하신 주님/O Haupt voll Blut und Wunden’으로 곧 만나게 될 십자가의 장면과도 연결이 되어 이 작품의 정점이 되고 있습니다. 위대한 작품에는 이처럼 운명과 같은 만남이 있나 봅니다.

 

Befiehl du deine Wege

Und was dein Herze kränkt

Der allertreusten Pflege

Des, der den Himmel lenkt,

Der Wolken, Luft und Winden

Gibt Wege, Lauf und Bahn,

Der wird auch Wege finden,

Da dein Fuß gehen kann.

 

당신의 나아갈 길과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진정한 보호자께 맡기라

그는 하늘을 주관하시고

구름과 공기와 바람까지도

움직이시는 분이시니

당신이 길을 찾게 하시고

그 길을 걸어갈 힘을 주시리.

 

당신의 나아갈 길을 진정한 보호자께 맡기라... 그 분은 당신이 길을 찾게 하시고 그 길을 걸어갈 힘을 주시리.”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진정한 보호자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세상의 힘을 있는 대로 다 의지하고 덤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길을 찾게 하시고 열어주심으로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우리가 길을 정하고 그 길을 지날 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를, 그 길을 찾게 해 주시기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고 이미 그 길을 찾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힘과 방법을 상징하는 빌라도를 의지할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것입니다.

 

부디, 우리 말로 부르기 쉽게 번역한 악보로 이 코랄을 함께 부르면서, 여러분이 겪는 현실의 아픔과 미래의 길을, 인간의 힘이 아닌, 가장 신실한 보호자께 맡기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분의 능력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보호할 때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부모조차 자신의 핏줄이기에 자녀들을 보호해 줍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의 무죄한 핏값으로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신 진정한 보호자이십니다. 진정, 그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전농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