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
사랑 때문에
한종호
2023. 3. 24. 06:59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30 사랑 때문에
마태수난곡 2부 58번 | |||
음악듣기 : https://youtu.be/J3cMlrpVOyc | |||
58(49) 코멘트 |
소프라노 아리아 |
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 나의 구주는 죽으려 하시네 단 하나의 죄도 알지 못하시는 그가 영원한 파멸과 심판의 형벌을 내 영혼에서 떨쳐버리시기 위해, |
Aus Liebe, Aus Liebe will mein Heiland sterben, Von einer Sünde weiß er nichts, Daß das ewige Verderben Und die Strafe des Gerichts Nicht auf meiner Seele bliebe. |
지난 시간에는 빌라도의 질문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에 대한 응답, 소프라노의 레치타티보 코멘트를 들었습니다. 소프라노의 코멘트는 빌라도의 질문에 구구절절 항변하지 않고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가운데 그분이 행하신 선한 일들을 나열한 후, ‘그 외에, 나의 예수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라고 단정하게 진술을 마무리합니다.
바흐의 아리아
드디어, 레치타티보에 이어서 소프라노의 아리아가 시작합니다. ‘Aus Liebe/사랑 때문에’입니다. 가사의 내용으로 볼 때, 이 아리아는 ‘기도’가 아닌 ‘코멘트’에 해당합니다. 마태수난곡에서 ‘코멘트’는 예수의 수난 이야기를 접한 신가자 마음속으로 품었을 법한 내적 정서나 신앙적 반응을 표현한 것이고 ‘기도’는 이를 응축시켜서 하나님을 향한 회개, 간구, 다짐 등 고백과 결단으로 승화시킨 것입니다. 가장 유명한 47번 알토 아리아 ‘Erbarme dich Mein Gott/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와 같이 마태수난곡에서 대부분의 아리아는 ‘기도’의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12번 곡 소프라노 아리아 ‘Blute nur, du liebes Herz!/피투성이가 되었구나, 사랑 가득한 주님의 마음이여’와 같은 곡들은 ‘기도’가 아닌 ‘심화된 코멘트’ 역할을 합니다. 이 곡 또한 ‘코멘트’로서 앞선 레치타티보보다 깊은 정서적, 신앙적 표현을 담고 있습니다.
아리아는 서양 극음악 전통에서 기악 반주가 있는 솔로 성악곡을 일컫습니다. 아리아는 주로 레치타티보에 이어지는데 레치타티보와 아리아의 가장 큰 차이는 레치타티보가 말소리에 가깝다면 아리아는 노래에 가깝다는 점입니다. 또한 레치타티보에는 최소한의 기악 파트가 반주로 참여하지만 아리아에는 보다 많은 악기들이 동원됩니다. 내용적으로 볼 때 레치타티보가 극의 흐름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한다면, 아리아는 극의 흐름을 잠시 멈추고 독창자 내면의 개인적이고 서정적인 표현을 들려줍니다. 마지막으로 아리아는 레치타티보 보다 음악적인 선율을 중시하여 독창자의 가창력과 화려한 기교를 최대한 발휘하게끔 합니다.
아리아는 1600년경 발생하여 이탈리아의 오페라와 쳄버 칸타타에서 주로 쓰였고 독일 교회에는 그로부터 약 100년 후에 루터교 목회자이며 교회음악 대본 작가인 에르트만 노이마이스터(Erdmann Neumeister, 1671~1756)에 의해 소개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시기는 바로 바흐가 교회음악가로서 다듬어지는 시기였습니다. 그런 연유로 바흐가 그의 초기, 뮐하우젠(Mühlhausen)에서 활동하던 시기(1707~1708)에 작곡한 교회 칸타타에는 레치타티보-아리아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바이마르 시기(1708~1717)에 이르러 만나게 된 노이마이스터의 칸타타 대본의 영향으로 바흐는 그의 교회음악에 레치타티보-아리아의 이탈리아 오페라 형식을 받아들여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의 곡 ‘Aus Liebe’와 같은 절정의 명곡에 이르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아리아의 특징들은 바흐의 교회음악 성악곡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바흐의 교회음악에서도 아리아를 듣는 이들은 기쁨, 슬픔, 분노와 같이 주어진 상황 가운데 느껴지는 특정한 감정적 상태를 공감하게 됩니다.
앞선 레치타티보에서 예수께서 펼쳐 주신 온갖 선한 일들을 회상한 화자는 단 하나의 죄도 알지 못하는 선한 분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위해 온갖 선한 일을 베푸셨음에도 예수는 이제 십자가 죽음의 길로 나아가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알고 있는 화자는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는 그의 발걸음에 기어이 눈물을 흘리고 맙니다. 그리고 그 눈물방울은 풀잎 위의 이슬방울처럼 파르르 흔들리다가 이 노래 속에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과 만나 하나가 됩니다.
소프라노는 레치타티보에서 꾹꾹 참아냈던 그 마음을 이제 풀어내려 합니다. 엄청난 에너지의 카타르시스가 펼쳐집니다. 아련한 그에 대한 기억과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옴을 알고 있는 그의 십자가, 단 하나의 죄도 알지 못하는 그와 그런 이를 죽음으로 이끈 자신의 죄에 대한 회한이 한데 뒤섞여 노래하는 이의 마음은 복잡하게 타오릅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예수를 바라볼 때 그 마음은 정제되고 응축되어 하나로 모여집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온전히 드러난 예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를 하염없이 바라보다 보면 저는 종종 그 십자가의 모양이 공간 속의 돋을새김이 아니라 그 너머의 공간을 향해 열린 틈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녹여내는 힘이 있지만, 그 자체로도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특정 종교의 시작이나 특정 교리의 종착점이 아니라 존재적인 모순과 삶의 부조리 가운데 살아야만 하는 인간을 위한 해방의 통로, 인간 존재의 본질적이고 참된 것만이 남도록 응결되는 정화의 통로입니다.
무리요의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
저는 지난 2월 제 생일에 아들로부터 뜻깊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번 원고를 쓰면서 마음을 빼앗겼던 그림 한 점이 있었는데 때마침 생일이라 아들로부터 선물로 받으면 더욱 의미 있을 것 같아 먼저 요청했습니다. 그렇게 잘 알려진 그림이 아니고, 동일한 화가의 비슷한 그림이 여러 점 남아 있음에도 딱 제가 원하는 그림이 캔버스에 프린트되어 국내 한 업체에서 판매되고 있었습니다. 그 그림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é Esteban Murillo, 1617~1682)의 ‘십자가의 그리스도(The Crucifixion)’로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된 1675년경 작품입니다.
무리요가 그린 다른 작품을 바라보면 일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으로 따스하고 깊으며 이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으로 진실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 어떤 화가 보다 사실적이면서도 영적인, 마음에 푸근하게 와닿는 성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생일날 저녁에 받은 그 그림을 저는 교회사무실 제 책상 뒤에 있는 옷장 문에 걸어두었습니다. 오늘도 여러 번, 한참 동안 그림을 바라보았습니다. 비록 모조품이긴 하지만 이번 사순절은 물론이고 오랫동안 저의 신앙 여정과 함께할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십자가 그림은 너무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묵상에 방해가 되곤 하는데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면서도 시대를 초월하여 사실주의 화풍을 보이는 그의 이 그림은 그런 면에 매우 균형 잡혀 있습니다. 성회 수요일의 재를 연상케 하는 짙은 배경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눈길인 듯 십자가의 주님의 몸을 감싼 따스한 빛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예루살렘의 실루엣을 넘어 저 멀리 부활 아침을 상징하는 먼동의 빛으로 연결됩니다. 거친 붓 터치로 흘려 그렸지만 그 선하신 얼굴에 어린 고통과 외로움은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우리 신앙의 중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교인 중 한 분이 그림을 보시고는 무섭다고 하셨습니다. 신기한 일입니다. 옛날 같으면 저도 그렇게 생각했었을 테니까요. 누군가에게는 어둡고 잔혹해 보일 수 있겠지만 이제 제게는 이 그림이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그림입니다. 십자가와 관련된 말씀 한 구절이어도 좋고 음악이나 그림, 작은 십자가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사랑을 기억할 수 있는 상징들이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 있을 때 우리는 더 깊은 신앙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사랑 때문에
좋은 음식일수록 그에 어울리는 좋은 분위기와 에피타이저, 그와 잘 어울리는 와인 등을 함께 고민하는 법입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야기는 이제 등장할 한 곡의 노래를 위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음악가로서 종종 받는 어려운 질문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말해 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태수난곡을 제대로 만나게 된 후로부터는 주저 없이 오늘의 아리아 ‘Aus Liebe/사랑 때문에’를 소개합니다. 아름다운 가사와 선율, 드라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예수의 사랑이 여기에 모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수난곡이 한 편의 위대한 십자가의 설교라면 그 설교의 핵심주제는 바로 이 노래 'Aus Liebe will mein Heiland sterben/사랑 때문에 나의 구주는 죽으려 하시네'가 될 것입니다. 마태수난곡의 전체적인 구조를 기승전결로 파악해 본다면 그 절정이 자리하고 있는 위치에 바로 이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는 플루트의 선율과 소프라노의 노래가 함께 주선율을 맡고 있습니다. 수난으로 인하여 흔들리면서도 이 모든 가운데 오롯이 빛나고 있는 예수의 사랑, 그 아름다운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악기는 플루트밖에 없어 보입니다. 장면마다 그에 어울리는 악기를 사용하는 바흐의 오케스트레이션 감각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플루트의 가장 큰 특징은 리드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리드가 없다는 것은 마찰된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목소리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악기에는 마찰되어 떨리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겹리드의 원리와 같은 성대가 있고 바이올린, 오보에, 클라리넷, 금관악기 등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악기도 마찰을 통해 소리를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플루트는 마찰 된 소리 없이 관 속의 공기 기둥을 떨리게 함으로 소리를 냅니다. 그래서 그 소리가 부드럽고 연주자의 호흡 결이 그 어떤 악기보다 섬세하게 소리에 실립니다. 또한 마찰하는 순간이 없어서 그 음색이 마치 무언가가 공간 속을 날아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바흐는 그의 교회음악에서 악마성을 표현할 때 플루트의 옥타브 위 높은음과 매우 빠른 리듬을 접목시켜 사용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마귀를 날개를 달고 날카로운 소리를 내고 빠르게 날아다니며 사람들을 선동하거나 공격하는 이미지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마태수난곡에서 사람들이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Sein Blut komme über uns und unsre Kinder.”라고 광기 어린 외침을 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편안한 음역대에서 부드럽게 움직이는 플루트는 그와 반대되는 이미지, 부드럽고 우아하게 유영하는 가운데 파르르한 떨림을 가진 음색을 들려줍니다. 그런 면에서 생명의 호흡이 다하도록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계속되는 수난에 지쳐있음에도 그 사랑의 줄을 놓지 않고 있는 예수의 사랑, 세상 구원을 향한 가녀린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 그의 열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플루트만 한 악기가 없을 것입니다.
이 노래는 영적, 감성적 리트머스와 같은 곡입니다. 물론 그 누구에게도 눈물을 강요할 수 없지만, 이 장면의 의미와 이 노래의 가사를 이해한 상태에서 이 아름다운 플루트 선율과 소프라노의 아리아를 듣고도 눈물이 고이지 않는다면 자신의 신앙과 감성의 경직성과 예수를 향한 사랑을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 봐도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여러 고민이 많았던 10대 시절을 보냈습니다. 강원도 산골소년 시절, 그렇게 감수성이 깊고 눈물이 많았던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말에 대도시로 이사 온 후로는 10년여를 눈물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중학교 시절, 저를 손수 받아 주셨던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할머니의 시신을 눈앞에 두고도 눈물 한방을 나지 않는 저를 발견했을 때, 제가 뭔가 잘못된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려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대학생이 되고 한참 지나서야 예수를 나의 구주로 만나게 되었고 눈물샘이 다시 터졌습니다. 예수의 사랑으로 녹아내린 저의 마음은 세상의 모든 아픔과 고난과 연결된 마음의 물고를 터주였습니다. 아무리 슬픈 영화도 두어 번 보게 되면 감동이 덜해집니다. 하지만 마태수난곡은 그 음악을 수없이 들어왔고 무슨 내용이 나올지, 무슨 음악 소리가 들릴지 다 알면서도 언제나 다시금 저를 울컥하게 합니다. 위대한 예술의 힘, 그리고 나와 연관된 아직도 살이 있는 이야기, 예수의 고난, 예수의 사랑 때문이겠지요.
마태수난곡을 대표하는 알토 아리아 ‘Erbarme dich Mein Gott/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는 캐슬린 패리어의 1946년 녹음으로 들어야 한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태수난곡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아리아 ‘Aus Liebe/사랑 때문에’는 지휘자 헤레베레가 1984년에 녹음한 전곡 음반에 실린 바바라 슐릭(Barbara Schlick)의 노래로 들어야 합니다.
바바라 슐릭의 노래에는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아련함이 담겨 있습니다. 모든 음악가에게는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있는 법인데 그녀는 그러한 마음을 꾹꾹 누르며 한 발 뒤로 물러나 저 멀리 갈보리 언덕을 바라보며 예수의 사랑과 십자가의 아름다움만을 노래합니다.
바라라 슐릭의 노래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벨기에 출신의 지휘자 필립 헤레베헤(Philippe Herreweghe, 1947~ )의 곡 해석 능력 때문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그는 바흐 음악의 중심에 있는 깊은 신앙적 표현을 외면하고 지성적 탐미주의에 치우친 곡 해석을 보여 주기 때문에 저의 완전한 지지를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인류 유산으로서의 바흐 음악의 해석에 있어서는 오늘날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음악 듣기 : 바바라 슐릭(Barbara Schlick)이 노래하는 ‘Aus Liebe/사랑 때문에’
https://youtu.be/lRCkt-h_T4Y
이 아리아의 전주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헤레베헤의 해석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선 레치타티보에서 주된 역할을 했던 두 대의 ‘오보에 다 캇치아’가 이어지는 아리아에서는 겸손히 뒤로 한걸음 물러섭니다. 그러고는 매우 느린 템포의 스타카토로 함께 화음을 만들면서 정적이지만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는 깊은 울림을 만들어 냅니다. 마치 조용한 공간에서 울려 퍼지는 물방울 소리와도 같습니다. 하나하나 그 모든 울림 뒤에는 메아리처럼 정적이 들려옵니다. 이 소리와 정적을 표현하기 위해서 헤레베헤는 이 곡의 템포를 매우 느리게 가져갑니다. 같은 노래임에도 우리가 계속 듣고 있는 리히터의 음반은 4분 35초이고 헤레베헤의 녹음은 5분 25초입니다.
그 소리는 사랑 때문에 생명을 소진하여 죽음을 향해 가까이 가는 이의 맥박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십자가의 보혈 같기도 합니다. 사랑을 상징하는 플루트 선율이 마지막 힘을 다해 날갯짓을 할수 있도록 두 대의 오보에는 중간에 잠시 부점으로 꿈틀대긴 하지만 그 가녀린 날갯짓을 노심초사 지켜보듯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그 박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오보에 다 카치아와 플루트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전주가 끝나갈 무렵 저 멀리 십자가를 바라보는 소프라노의 노랫소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듯이 합류합니다.
Aus Liebe, Aus Liebe will mein Heiland sterben,
Von einer Sünde weiß er nichts,
사랑 때문에, 사랑 때문에 나의 구주는 죽으려하시네
단 하나의 죄도 알지 못하시는 그가...
‘Liebe’, 즉 ‘사랑’이라는 단어가 살짝 부풀러 올랐다가 가라앉으며 세 마디 동안 이어집니다. 너무나도 소중한 단어이기에 그토록 길게 음미하는 것이지요. 마치 그의 사랑을 아는 이가 심장 속에 가득 살아 있는 그와의 사랑의 기억들을 남김없이 쏟아내는 듯합니다. 그리고서는 한 음절 한 음절을 강조하듯 동일한 ‘높은 파’ 음으로 마태수난곡의 가장 중요한 가사를 노래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어 ‘sterben/죽다’에 있는 샾(#)과 꾸밈음이 참으로 애절하게 들립니다.
‘Aus Liebe will mein Heiland sterben/사랑 때문에 나의 구주는 죽으려 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