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한종호
2023. 5. 1. 08:05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31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마태수난곡 2부 59번 마태복음 27:23b~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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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듣기 : https://youtu.be/1jIyjhg6Q08 | |||
59(50)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23. 그들이 더욱 소리질러 이르되: | 23. Sie schrieen aber noch mehr, und sprachen: |
대사 | 무리들 | 23.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 23. Laß ihn kreuzigen.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24.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 24. Da aber Pilatus sahe, daß er nichts schaffete, sondern daß ein viel größer Getümmel ward, nahm er Wasser, und wusch die Hände vor dem Volk, und sprach: |
대사 | 빌라도 | 24.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 24. Ich bin unschuldig an dem Blut dieses Gerechten, sehet ihr zu.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 25. Da antwortete das ganze Volk, und sprach: |
대사 | 무리들 | 25.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 25. Sein Blut komme über uns und unsre Kinder.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26.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 26. Da gab er ihnen Barabbam los; aber Jesum ließ er geißeln, und überantwortete ihn, daß er gekreuziget würde. |
마태수난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노래하는 ‘Aus Liebe’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을 때 에반겔리스트가 다시금 십자가 고난의 현실로 우리를 깨웁니다. “Sie schrieen aber noch mehr, und sprachen/그들이 더욱 소리질러 이르되”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그 깊고도 아름다운 사랑에 잠겨 있던 우리의 마음을 깨운 것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Laß ihn kreuzigen’고 소리 지르는 무리들의 광기 어린 외침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사랑을 노래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 다음에 ‘세상에서 가장 추악한 혐오의 소리’가 대비됩니다.
십자가의 동사형
십자가는 독일어로 ‘Kreuz/크로이츠’인데 그 명사가 동사화되면 ‘kreuzigen/크로이치겐’이 됩니다. 그런데 ‘kreuzigen/크로이치겐’이라는 동사의 의미는 ‘십자가를 지다’ 혹은 ‘십자가에 달리다’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다’입니다. 반면 ‘십자가를 지다’라는 표현을 위해서는 ‘tragen’이나 ‘nehmen’같은 동사가 따로 필요하며 ‘십자가에 못 박히다’는 26절의 표현대로 수동의 의미를 지닌 과거 분사 ‘gekreuzigt’가 사용됩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우리 인간이 십자가를 지는 것보다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고 누군가를 십자가에 못 박는데 더 익숙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Laß ihn kreuzigen’라는 무리들의 음성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kreuzigen’이라는 가사에 해당하는 리듬을 당김음으로 표현하여 강한 악센트를 입히고 4도 음정씩 도약시킴으로 십자가에 못 박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한 바흐의 의도가 충분히 읽힙니다. 또한 서라운드 음향처럼 양쪽에 자리한 두 개의 합창단의 네 파트가 시차를 두고 노래함으로 여기저기서 들려 오는 군중의 음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흐를 통해 발견한 종교개혁 신앙의 유산
지난 29번째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무리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라고 노래할 때, 높은 음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플롯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바흐와 그 시대의 사람들은 그러한 표현으로 저들의 악마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전 예술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를 만납니다. 이는 고전 예술을 만나는 즐거움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흐의 교회 음악은 종교개혁의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회복을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연구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그 시대 말입니다.
1. 예수를 향한 사랑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종교개혁 신앙의 영적 유산은 무엇일까요? 먼저 예수를 향한 진심 어린 사랑입니다. 바흐의 교회 음악의 가사와 선율을 보노라면 그 시대의 신앙인들이 마치 최고의 연인을 사랑하듯 예수를 사랑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수난곡에서 등장하는 대부분의 소프라노 아리아는 그와 같은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장 좋은 예는 승천 칸타타 ‘Lobet Gott in seinen Reichen/온 나라여 하나님을 찬양하라(BWV 11)’에 있습니다. 칸타타 11번에서 바흐와 그 시대의 신앙인들은 예수의 승천을 그와의 이별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했고 그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승천은 그들과의 이별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오늘날의 우리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을까 반성해봅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예수의 승천에서 이별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와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기보다는 그가 주시는 것에만 관심을 둔 피상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대형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강사님을 모시고 기도를 주제로 한 여섯 번의 집회가 열렸습니다. 강사 목사님은 자신이 그 교회의 담임자가 된 과정과 시무하고 있는 교회 사역의 예를 들어 기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매우 열정적으로 전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집회가 다 끝날 무렵 저는 제 마음 어딘가에서 허전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여섯 번에 걸친 강의 내내 예수의 이름을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도라는 특별한 주제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요즘 목회자들이 점점 자기 자신과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를 불편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알고 예수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의 성품을 닮아 진정으로 겸손하고 낮아지기 때문입니다.
부흥회 마지막 시간, 원래 준비된 찬양을 변경했습니다. 부흥회 때 자주 부르는 빠르고 힘찬 곡 대신 ‘기도’라는 노래를 마지막 찬양으로 정해서 성도들과 함께 불렸습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 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만 섬기며 따르기로 한 나
세상이 준 이 모든 괴롬 버리고
예수님처럼 기도하기를 원해요
예수님처럼 기도하기 원해요
기도가 부흥회의 주제라고 해서 예수가 배제될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도를 배울 수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바흐와 같은 루터교 신자였습니다. 진실한 신앙인이었고 위대한 신학자였던 그는 기도에 관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기도의 토대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 드리는 모든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한 경청과 응답을 얻는다.”
이처럼 종교개혁의 신앙인들은 예수를 진정 사랑했고 예수를 그들의 신앙과 삶의 중심에 모셨습니다. 그 점이야말로 오늘날의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회복해야 할 종교개혁 신앙의 유산입니다.
2. 십자가를 향한 사랑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종교개혁 신앙의 두 번째 영적 유산은 그들의 신앙이 철저하게 십자가로 인한, 십자가를 통한, 십자가를 향한, 십자가의 신앙이었다는 점입니다. 바흐의 음악에서 풍겨 나오는 멜랑콜리는 바로크 음악 특유의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 때문입니다. 귀족적이고 세련되고 화려하며 유행을 민감하게 따른 음악을 남긴 헨델이 바흐와 정확히 동시대 사람임을 생각한다면 제 말에 더욱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거의 모든 것이 바흐의 교회음악에 실려 있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바흐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에서 십자가는 점점 더 외면당하고 있으며 점점 더 불편한 것으로 취급받고 있습니다. 바흐 음악과의 만남, 종교개혁 신앙의 회복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3. 예배를 향한 사랑
마지막으로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종교개혁 신앙의 영적 유산은 예배를 향한 그들의 열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심이란 우리가 생각하듯 예배를 드리고 안 드리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 예배는 이미 삶의 일부였습니다. 예배를 향한 종교개혁 신앙인들의 열심이란 예배를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드리느냐의 열심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매우 엄숙하고 형식적이고 경직된 신앙생활을 했을 거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엄숙함보다는 경건함이었고 형식적이고 경직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성서적인 짜임새 속에서 저마다 마음을 다해 예배와 전례에 참여했습니다. 교회 칸타타와 수난곡, 마니피캇 등 바흐의 교회음악은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라 치밀하게 준비되었고 카톨릭 전통의 음악처럼 사제들이나 특별하게 훈련된 사람들에게 맞춰진 음악이 아니라 회중 찬송가인 코랄을 중심으로 하여 모든 성도들이 참여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바흐가 그렇게 작곡을 했으니 그 시간을 들여 마태수난곡을 연주하고 감상하는 것이지 과연 오늘날 어떤 교회가 연주 시간만 세 시간에 가까운 대곡을, 그것도 화려한 부활의 노래도 아닌 예수의 고난과 십자가에 관한 곡을 직접 작곡하고 연습하여 세 개의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동원하여 그들이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정성으로 분주한 부활절을 앞둔 성 금요일에 올릴 수 있을까요? 청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순절, 40일간의 절제의 시간을 보내는 와중에 토마스 교회의 그 딱딱한 나무 의자에 모여 앉아 설교를 포함하여 거의 네 시간에 육박하는 음악 예배를 정성스럽게 드린 그들의 예수를 향한 사랑, 십자가를 향한 사랑, 예배를 향한 사랑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처럼 바흐 교회음악의 정점에 있는 마태수난곡은 종교개혁 신앙의 살아있는 화석이 되어 우리에게 그들의 신앙 유산을 전달해 줍니다.
빌라도와 십자가의 주변인들
지난번 빌라도에 관해 말씀드린 대로 빌라도는 권력과 능력과 세련된 상식을 지닌 성공한 인생으로서 세속적 현대인을 대표합니다. 그들에게 빌라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무죄하다’라고 말하며 손을 씻습니다. 하지만 하늘 아래 그 누구도 스스로를 죄가 없다고 할 수 없을뿐더러 물로 손을 씻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영혼을 정결케 해야 죄로부터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예수 곁에 있었지만 빌라도는 한참 잘못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오늘날까지 예수를 못 박은 주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빌라도뿐만이 아닙니다. 베드로, 유다, 바라바, 시몬, 제사장 무리와 군중 등 마태수난곡은 예수 십자가 사건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그들을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해 줍니다. 혹자는 마태수난곡을 일컬어 ‘없던 신앙도 생기게 해 주는 음악’이라고 말했다지요. 제가 이 글을 써나가는 이유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십자가를 장식품 정도로 여기며 세련되게 살기 원하는 기독교인들과 진리를 향한 이끌림을 거부하고 세상의 힘과 세속적 지식에만 촉각을 세우며 사는 사람들에게 십자가 사건의 곁에 있던 사람들의 적나라한 모습과 그와 대비를 이루고 있는 참사람 예수그리스도를 보여줌으로 그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마주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당하라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 주고 싶었지만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보란 듯이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Ich bin unschuldig an dem Blut dieses Gerechten, sehet ihr zu.” 마태복음 다른 사본에는 ‘이 사람’이 ‘이 의로운 사람’으로 되어 있는데 마태수난곡에 쓰인 루터 성경도 그와 같이 ‘이 의로의 사람의 피에/an dem Blut dieses Gerechten’라고 읽고 있습니다.
한편 '너희가 당하라'를 그리스어 원문으로 직역하면 ‘너희가 볼 것이다’입니다. ‘보다’라는 표현에는 ‘경험하다’라는 의미도 있지요. 혹은 우리말 ‘두고 보다’라는 표현처럼 ‘어떤 결과가 될지 너희가 책임지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원어 성경에 능통했던 루터 또한 ‘sehet ihr zu/너희가 볼 것이다’라고 원어 그대로를 독일어로 번역했는데 이 역시 그 뜻은 ‘너희가 당하라’로 읽힙니다.
그런데 이 표현, 어딘가 낯익지 않으신지요? 바로 마태복음 27장 4절에서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유다에게 한 말입니다(26번째 글 ‘나의 예수를 돌려다오’中).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siehe du zu) 하거늘’ 2인칭 단수를 향한 명령형이 2인칭 복수를 향한 것으로 바뀌었을 뿐, 정확히 같은 문장입니다. 27장 4절에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유다의 돈을 거절하면서 잔인한 말로 “네가 당하라(siehe du zu)”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빌라도는 그들이 유다에게 한 말을 그대로 그들에게 돌려줍니다. “너희가 당하라(sehet ihr zu)”
이에 대한 백성들의 대답은 경악스러움 그 자체입니다. 빌라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들은 그 말을 그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손에게까지 돌립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백성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려는 광기에 휩싸여 그들이 내뱉은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재판이 끝났습니다. 에반겔리스트는 그 재판의 결과를 공포하듯 진술합니다. ‘Da gab er ihnen Barabbam los; aber Jesum ließ er geißeln, und überantwortete ihn, daß er gekreuziget würde./이에 바라바는 저희에게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
이제, 그 말도 안 되는 판결이 집행될 시간입니다.
조진호/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성악과를 졸업하고 바흐음악을 전문으로 하는 솔리스트로 활동하였다. 감신대 신학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현재 전농교회 부목사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