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석의 ‘하늘, 땅, 사람 이야기

옹송그리며 쓰는 반성문

한종호 2023. 6. 17. 06:33

옹송그리며 쓰는 반성문

 

 

평안하신지요? 집에서 사무실로 나오다 보니 숙대 뒤뜰에 있는 산딸나무가 희고 정갈한 꽃을 피워냈더군요. 몇 해 전에 고려대학교에 계신 어느 교수님이 네 갈래로 피어나는 꽃잎이 십자가를 닮았다며 교회 마당에 심어보라 일러주던 꽃이기에 반가움이 더 컸습니다. 이집 저집 담장을 흘낏거리며 걸었습니다. 탐스럽게 핀 장미꽃들이 싱그러웠습니다. 문득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했던 릴케가 떠올랐고, 곧 마음속에서 이미 상투어로 변해버린 그 문장을 떨치려고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루 살로메가 떠올랐고, 그 매혹적인 여인을 향한 릴케의 연정이 되짚어졌습니다.

 

“내 눈빛을 꺼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을 볼 수 있습니다.

내 귀를 막아 주소서, 그래도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기도시집》에 나오는 이 노래는 ‘기도’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에 사람들은 일쑤 ‘당신’을 ‘신’이라 여기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겁니다. 이 뜨거운 사랑 노래가 뜨악하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내가 인생의 가을을 지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골목길을 천천히 걷는 시간이 제게는 참 좋은 시간입니다. 사람들과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반추하기도 하고, 종작없이 떠오르는 생각의 갈피를 잡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김승범

지난 수요일 저녁의 만남은 제게 참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전시중인 <가리봉 오거리> 전을 보고서 눈물이 나더라고 하셨지요? 가리봉동은 눈물겨운 애환의 기표로 다가올 때가 있었습니다. 그 비좁은 벌집에 살면서 실낱같은 희망의 끈을 잡으려 애를 썼던 그 누이들은 지금 다 어디에 있을까요? 때로는 악다구니를 쓰기도 하고, 서러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절망의 심연으로 한없이 빠져들기도 했던 사람들. 그들을 생각하니 지금 우리가 거닐고 있는 이 인공 낙원이 신기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지금의 현실은 그들이 흘린 눈물을 타고 어딘가로 흐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의 어둠과 온몸으로 맞서면서 살아온 이들, 툽상스러운 듯하나 씩씩하기 이를 데 없는 이들과 대면할 때마다 관념을 붙들고 살아온 내 삶이 한없이 초라하게 여겨지곤 합니다. 그 동안 현실 주변을 베돌기만 할 뿐 그 속에 풍덩 몸을 담그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사람들을 대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사뭇 예의를 갖춘 채 지내오기는 했지만 누군가의 고통과 슬픔 속에 오롯이 녹아들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내 속에 운명처럼 각인된 허무의식과도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별 것 아니다’, ‘호들갑 떨 것 없다.’ 난감한 일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자꾸 되뇌던 말입니다. 그런데 참 쓸쓸합니다. 한 번도 내 인생을 살아보지 못한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소설가 송기원의 「다시 월문리에서」가 떠오른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1983년인가 <실천문학>에 실린 그 글을 처음 읽고 가슴이 얼얼해져 먼 산만 바라보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들어간 사이 평생 고생만 하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어머니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그는 오랫동안 가슴앓이를 합니다. 새벽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그는 어머니를 향해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어머니, 이름 없는 산야의 이름 없는 무덤들 사이에서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시들은 잡초들 무성한 무덤 너머로 새벽별이 스러지고 이제 막 동이 트는 능선마다 달려오는 눈부신 새벽의 사람들을 위하여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그토록 긴 밤을 떠돌던 많은 넋들과 함께 아직은 잠들지 마세요.”

 

모두가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의 꿈이 가물가물 흔들리고 있던 그 때, 새벽을 깨우려고 달려 나가다가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내 주위에 많았기에 이 대목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구절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출소한 ‘나’는 뒤늦게 삶의 무게에 짓눌린 어머니가 문고리에 목을 매 자진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충격 속에서 찾아간 집은 퇴락한 채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곳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만납니다.

 

“어머니는 바로 내가 둘러보고 있는 안마당의 망초꽃이며 엉겅퀴, 쑥부쟁이 따위 잡초들의 시든 대궁에서 두 눈을 부릅뜬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마루 위에 나뒹구는 방문의 찢어진 창호지에서, 뒤울안에서, 장독대에서, 무쇠솥이 뒤집혀 있는 부엌에서 마디진 두 손을 갈퀴처럼 휘두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피하듯 서울로 올라가 살던 ‘나’는 몸과 마음이 다 황폐해진 상태로 어머니가 살던 집으로 내려갑니다. 그는 마치 어머니와 맞서 싸우기라도 하듯 잡풀을 뽑고 땅을 고릅니다. 그때 동네 친구인 ‘정’이 등장합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을 때에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인물인데,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읽노라니 그 인물이 제게 확 와닿더군요. 그는 힘들이는 기색도 없이 ‘나’를 도와 풀을 뽑고 땅을 골라줍니다. ‘정’은 ‘나’를 자기 집으로 이끌어 겸상으로 저녁밥을 먹고는 지싯지싯 ‘나’를 따라오더니 아까 참에 불을 때놓은 문간방 문을 열고 들어가 벌렁 자리에 눕습니다. 그 밤 ‘정’은 ‘나’의 곁에서 잠을 청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마음이 스산할 친구를 위한 배려였습니다. 그의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다붓했습니다. 거기에는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다 온 사람에 대한 경계심도 없었고, 세상에서 난파당한 것 같은 표정으로 살아가는 이에 대한 섣부른 판단도 없었습니다. 가슴 아파하는 친구 곁에 그저 묵묵히 머물렀던 뿐입니다. 그는 고향의 느티나무처럼, 눈에 익은 언덕처럼 묵묵히 있어 친구가 시린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런 ‘정’의 존재가 크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온갖 사람들과 섞사귀며 살면서도 여전히 스스럽기만 한 나의 실존의 부박함이 아프게 자각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몸이 아니라 머리로 살아온 삶의 한계가 절실히 느껴지는 나날입니다. 지금 마음이 무너진 사람의 손을 듬쑥 잡지도 못하고, 그의 시린 마음 곁에 눕지도 못합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몸이 따라가 주지를 않습니다. 몸과 마음을 이어주는 회로에 녹이 슨 지 이미 오래입니다. 몸을 자유자재로 부리며 살아가는 이들 앞에서 나의 창백한 사상은 초라해지곤 합니다.

 

젊은 시절, 기존의 모든 것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때 ‘시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김수영의 문장과 만났습니다. 시인은 그 문장 그대로 살았습니다. 그의 오연한 문장이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온몸으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혼의 황혼을 맞은 사람처럼 새로운 삶을 향해 길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저 주어진 길을 성실히 걸을 뿐 새로운 길을 찾아 가시덤불 우거진 숲으로 내닫지 못합니다. 함석헌 선생님을 떠올릴 때마다 괜히 죄인이 되어 몸을 옹송그리게 됩니다. 선생은 생의 말년에 <대선언>이라는 시를 쓰셨습니다. 그 시에 나오는 한 대목을 나는 수첩에 적어 두고 가끔씩 찾아 읽습니다.

 

“어렴풋한 느낌을 서슴지 말고 내 외치자

물 냄새 맡고 달리는 사막의 약대처럼

스며든 빛 잡으려 허우적이는 움 속의 새싹처럼

가쁜 숨으로

떨리는 맘으로.”

 

나이 들어서도 그는 여전히 젊은 혼이었습니다. 갑자기 목이 마르네요. 이런 떨림이 내게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오늘도 푸념이 길어졌습니다. 이렇게라도 반성문을 쓰지 않으면 무작스럽게 쇠락의 방향으로 나를 잡아채는 시간에게 항복할 것 같은 조급한 마음 때문이려니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눈이 침침하군요. 잠시 마당가에 나가 풀들과 눈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이 푸르른 녹음의 계절에 어느 호젓한 산길에서 홀연히 마주칠 수 있다면 참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나 좋은 길벗이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안을 빕니다.

 

김기석/청파교회 목사

 

<세상에 희망이 있느냐고 묻는 이들에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