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자리> 출간 책 서평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바보처럼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한종호
2023. 7. 17. 10:03
윤 집사님, 이제쯤엔 귀래에도 여름의 기운이 가득하겠네요. 무더운 한낮에는 사방 뻐꾸기 울음 한가하겠고, 밤꽃 향기 진동하는 밤은 서로 부르고 대답하는 소쩍새 울음으로 지나가겠지요. 산벚꽃 피고 진 산도, 막 땅내를 맡은 논의 모도 온통 초록빛이겠다 싶습니다. 마당 한 구석 우물가에 선 앵두나무에선 올망졸망 앵두가 잘 익었을 테고요. 어디를 둘러봐도 초록빛 세상인데 어디에서 붉은빛을 길어 올린 것인지, 자연의 매 순간은 그저 경이롭고 신비로울 따름입니다.
귀래에서 원주로 넘어가는 양안치 고개에도 녹색의 기운은 넘치기 시작했겠지요. 자작나무에서 돋는 연초록 잎새들의 아우성이 얼마나 눈부실까, 손을 흔들듯 윤기로 반짝이던 작은 손길들이 눈에 선합니다.
여전히 바쁘시지요? 연락을 드릴까 하다가 행여 바쁜 일정에 누가 될까 그만둔 적이 두어 번 있었답니다. 그러고 보니 볕이 잘 드는 집사님네 거실에서 음악을 들으며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그리움으로 떠오릅니다.
언제부터 시작이 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동안 ‘원주’하면 많은 사람들은 군인부대를 떠올렸습니다. 늠름한 품으로 자리 잡은 치악산보다도 군사도시를 먼저 떠올리고는 했지요. 그만큼 원주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중심에서 벗어나 구석진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칙칙하고 답답한 도시였던 것 같습니다.
지난해 원주를 잠깐 방문하며 원주가 역동적인 모습으로 달라져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랬습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몰랐던 길들이 사방으로 뚫리고, 곳곳에 들어서고 있는 빌딩과 아파트 숲, 외형적인 변화도 대뜸 눈에 띄었지만 원주의 변화는 그렇게 드러난 겉모습만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낡고 갑갑했던 갑옷을 벗고 가볍고 상쾌한 옷으로 갈아입기라도 하듯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던 군사도시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첨단의료산업도시라는, 이름만 들어도 뭔가 생동감이 넘치는 도시로 탈바꿈되고 있었습니다. 새로 조성된 의료산업단지에는 수많은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입주를 했고, 그들이 만든 첨단의 의료기기는 전 세계로 수출이 되고 있었습니다. 원주가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잠재력과 가능성을 보고 국가에서는 다양한 지원을 하고 있었고, 벌써 꽤 많은 나라에서 견학을 다녀갈 정도였다니 군사도시로 인식되던 원주로서는 실로 놀라운 변화인 셈이지요.
그 변화의 중심에 집사님이 계시다는 이야기를 원주에 사는 이들에게서 들었을 때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물론 집사님은 아니라고, 결코 혼자 한 일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겠지만, 누군가 한 사람이 한 도시의 묵은 이미지를 새롭게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신이 나는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집사님께 들었던, 무기를 개발하는 곳에서 일을 하다가 하나님을 믿는 내가 왜 사람을 죽이는 무기 만드는 일을 해야 하나, 그런 마음이 인생의 길을 의공학 쪽으로 돌리게 된 계기였다는 말을 지금도 소중하게 기억합니다. 아마도 그 때 그 마음의 변화가 오늘날의 결실로 나타난 것이지 싶어 뿌듯한 마음이 더 크답니다.
“모두 갈 수 있을 때 나도 가야지…”
집사님, 혹시 장기려 선생을 기억하시는지요? 연배는 달라도 동시대를 살았고, 집사님도 비슷한 길을 걷고 있어 공적으로든 개인적으로든 어떤 교분이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많은 사람들은 장기려 선생을 이산가족의 아픔을 겪은 분으로, 북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하며 평생 혼자서 살아간 분으로 기억을 합니다. 지금의 시대가 가벼워서 그렇겠지요, 그런 삶이 얼마나 어렵고 드문 일인지를 잘 알기에 선생의 그런 모습이 더욱 애절하고 인상 깊게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남북 간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될 때 선생에게는 북한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하고도 좋은 기회가 주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북한 정부도 환영한 일이어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음에도 끝내 선생은 거절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다 가지 못하는데 내가 어찌 특별대우를 받아 가겠느냐? 모두 갈 수 있을 때 나도 가야지….”
그 일을 주선했고 들뜬 마음으로 소식을 전했던 현봉학 박사는 선생의 그런 모습을 보며 ‘이렇게 훌륭하신 분이 세상에 다시 또 있을까’ 하며 눈시울을 적셨다고 합니다.
제가 최근에 읽은 『장기려 평전』이라는 책에는 그렇게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선생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시대가 가지고 있던 다양한 모습들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어 많은 것들을 새롭게 생각하게 했습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생긴 교단의 분열과, 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지만 뒷수습을 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견해가 달라 결국은 교회가 둘로 갈라진 평양 산정현교회 이야기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의 신앙은 지금도 살아서…”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에 관한 이야기는 순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산정현교회가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위해 교회 뜰에 순교기념관과 동상을 세우려고 했을 때, 절대 안 된다며 반대했던 이가 오정모였습니다.
“교인들이 주일날 예배드리러 교회에 왔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만을 찬양, 경배해야지 주 목사가 그것을 가리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유가족을 위해 땅을 사주겠다고 결의하였을 때에도, 김일성이 주 목사의 숭고한 정신에 감복했다며 금일봉과 적산가옥 문서를 보내왔을 때에도, 평양노회가 그동안 주목사와 가족들에게 잘못했던 것을 사과하며 ‘주기철 목사 순교기념예배’를 드리겠다고 제안하였을 때에도 오정모는 그 모든 것을 다 거절합니다. 주 목사가 포상받기 위해 순교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일제에 의해 목사관에서 강제로 쫓겨나 오 년 동안 열세 번이나 이사를 다니면서도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순교의 삶이란 법궤를 실은 수레를 울며 끌면서도 좌우로 치우침 없이 벧세메스까지 곧장 올라간 뒤, 마침내 제물로 바쳐지는 두 마리 암소와 같은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오정모의 주치의로서 누구보다도 오정모의 삶을 잘 알았던 선생은 ‘그의 신앙은 지금도 살아서 히브리서 11장에 추가될 인물 중 하나로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며 그에 대한 존경심을 아낌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생의 삶을 두고서는 한국의 슈바이처, 바보 의사, 작은 예수, 우리 시대의 성자 등 많은 헌사들이 있고 선생은 그런 말을 듣기에 충분하다 싶은 삶을 살았지만, 저는 그 많은 표현들보다 선생의 묘비에 적혀 있는 짧은 한 마디 말이 오히려 선생의 삶을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보입니다.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
그 말 하나면 충분하다 싶을 만큼, 다른 말을 아끼고 싶을 만큼 선생은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 품에 안기기 두 달 전 아들에게 남긴 유언은 자신의 묘비에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고만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이 정확한 것이라면 ‘주님만을’에서 ‘만’을 빼는 것이 선생의 삶을 더욱 진솔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굳이 무엇을 따로 강조하지 않아도 좋은 분이었으니까요.
북한에서 받은 모범일꾼상(모범일꾼상은 당시 지식인이 받을 수 있었던 최고상이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면서도 그렇게까지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을 선생은 신앙의 승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일성이 자신의 혹을 떼어내는 수술을 할 적임자로 선생을 생각했고, 이인모 노인을 북송할 때 반드시 장기려 선생을 함께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을 보면 선생이 북쪽에서 받았던 신망이 얼마나 두터운 것인지를 느끼게 됩니다)을 비롯하여 막사이사이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서울대가 선정한 제1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등 선생에게 주어진 상은 수없이 많았지만, 오직 하늘에 있는 상만을 위해 자신이 받은 모든 상을 무르고 싶어 했던 것이 선생의 마음이었습니다.
선생이 돌아가시던 해 제자들이 후일 선생의 동상을 만들기 위해 사진을 찍으려고 사진사를 대동하고 찾아오자 “내 동상을 만드는 그 놈은 벼락을 맞아 죽어라!” 벼락같은 소리를 질러 그들을 내쫓았다는 아름답고도 흔쾌한 일화도 있으니, 굳이 선생이 자신의 어떤 삶도 강조하진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된 사람”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긴 선생의 삶은 한평생 이어졌습니다. 전쟁 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시작한 무의촌진료, 버려진 행려병자에게 베푼 사랑,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인 청십자의료보험의 태동, 간질환자들의 친구가 되어준 장미회 활동, 무료병원으로 시작한 복음병원 창설, 평양연합기독병원 원장, 김일성대학 의과대학교수, 부산복음병원 원장, 서울대 부산대 가톨릭 교수 등 분주하고도 막중한 직임을 맡으면서도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선생의 관심은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남편과 헤어져 북한에서 자식을 기르며 고단한 삶을 살아야 했던 선생의 부인 김봉숙은 선생이 남한에서 훌륭한 삶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딸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너희 아버지, 거기서도 여전하시구먼. 두 개 가지면 벌 받는 줄 아시는지 번번이 거지에게 옷 벗어주고 퍼렇게 얼어서 들어오셨어. 내가 부엌에서 굶은 것도 모르시곤 길 가는 거지들을 불러와서 겸상 차려 먹이신 양반이지.”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열망한 사람”
집사님, 선생의 삶속에서 제게 숙제처럼 와 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선생은 평생토록 성서연구를 했고,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하며 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열망했습니다. 일찍부터 김교신, 우치무라 간조, 야나이하라 다다오, 후지이 다케시, 함석헌, 주기철, 오정모, 손양원, 강원용, 채규철 등과의 교분을 통해 열린 마음을 지켜가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선생은 자신의 일기에서 잊지 못할 다섯 사람의 이름을 적은 적이 있는데, 그 첫째 인물이 할머니 이경심이었습니다. 어린 자신을 늘 등에 업고 교회에 다녔고, 아침저녁으로 가정예배를 인도하며 선생을 위해 “이 금강석이 자라나 하나님의 나라와 현실 나라에서 크게 쓰여지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기도하셨던 분, 선생의 믿음의 뿌리는 그렇게 오래전부터 깊게 내린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선생은 제도권 교회와 결별하게 됩니다. 신사참배 문제로 교단이 분열되는 것을 보았고, 복구를 둘러싼 갈등을 경험했으며, 신사참배를 했던 무리들이 교단을 장악하고, 믿을만한 교계 지도자들이 총회장이 되기 위해 금권선거를 자행하는 것을 보았고, 무엇보다도 점점 자본주의화 되어가는 교회의 모습이 선생을 통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중 주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온전히 따르고 있는 ‘종들의 모임’을 알게 되었을 때, 선생은 교회를 떠나 ‘종들의 모임’을 택하게 됩니다. 그 때 선생의 나이 78세, 이제까지 걸어온 길을 보나 주변에 있는 이들의 면면을 보나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선생은 세례까지 다시 받으며 기꺼이 새로운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교회의 개혁이 시급하다고 여겨지는 이 때 새로움이 어디에서 어떻게 시작될 수 있는 것인지, 선생이 보여준 결정은 큰 숙제처럼 다가옵니다.
집사님, 이미 집사님께서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제가 장황하게 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긴 한 사람의 삶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주님의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는지를 장기려 선생을 통해 확인을 하며, 집사님을 통해서도 같은 은총이 나타나기를 비는 마음이 간절하답니다. 우리의 삶이 다만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그것이 가장 복된 삶임을 같이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원주라는 도시가 어디까지 어떻게 변할 수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볕이 좋은 어느 날, 집사님이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들으며 주님을 섬기는 삶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또한 기대합니다. 내내 건강하시고요.
한희철/정릉감리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