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 수난곡 순례'
오, 상하신 그 얼굴이여!
한종호
2023. 7. 28. 08:44
조진호와 함께 하는 바흐의 마태수난곡 순례
BWV 244 Matthäus-Passion / 마태수난곡
No. 33 오, 상하신 그 얼굴이여!
마태수난곡 2부 62~63번 (마태복음 27:2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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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듣기 : https://youtu.be/MFVZzfMm8vc | |||
62(53)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27. Da nahmen die Kriegsknechte des Landpflegers Jesum zu sich in das Richthaus, und sammleten über ihn die ganze Schar; 28. und zogen ihn aus, und legeten ihm einen Purpurmantel an; 29. und flochten eine Dornenkrone, und setzten sie auf sein Haupt, und ein Rohr in seine rechte Hand, und beugeten die Knie vor ihm, und spotteten ihn, und sprachen: |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
대사 | 총독의군병들 | 29. Gegrüßet seist du, Judenkönig! | 29.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
내러티브 | 에반겔리스트 | 30. Und speieten ihn an, und nahmen Rohr, und schlugen damit sein Haupt. |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
63(54) 코멘트 |
코랄 | O Haupt voll Blut und Wunden, Voll Schmerz und voller Hohn! O Haupt zu Spott gebunden Mit einer Dornenkron'! O Haupt, sonst schön gezieret Mit höchster Ehr' und Zier, Jetzt aber hoch schimpfieret: gegrüßet seist du mir! Du edles Angesichte, Vor dem sonst schrickt und scheut Das große Weltgewichte, Wie bist du so bespeit! Wie bist du so erbleichet, Wer hat dein Augenlicht, Dem sonst kein Licht nicht gleichet, So schändlich zugericht' |
오 피투성이 상처 가득한 그 얼굴 온갖 고통과 모멸을 받으시고 조롱으로 엮어진 가시관 쓰신 그 얼굴 아름답게 빛나셨던 그 얼굴 고귀하고 존귀하신 그 얼굴이 갖은 멸시 다 받고 계시네 ‘나의 왕이여 평안하소서!’ 그 고결한 얼굴 앞에 세상 모든 것은 놀라 움츠러들건만 어찌하여 그 얼굴이 침 뱉음의 모욕을 당하셔야 하는가! 어찌하여 그 얼굴이 그토록 창백해지셨는가! 누가 당신의 눈빛을, 세상 그 어떤 빛도 비할 바 없이 아름다웠던 그 눈빛을 이토록 참혹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채찍질 당한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 로마 군인들에게 건네졌습니다. 지난 시간, 예수께서 온몸으로 받아 낸 잔혹한 채찍질을 묵상했던 수난의 이야기는 27장 26절의 마지막 구절로 되돌아가 다시금 연결되고 있습니다.
"이에 바라바는 그들에게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마태복음 27:26
고통스럽고도 오랜 채찍질이 끝났음에도 십자가의 길은 여전히 아득하기만 합니다. 예수께서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그 모든 고통과 치욕을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27장 11절에서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물었을 때 “네 말이 옳도다”라고 대답하신 후 46절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상태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말씀하시기까지 35개의 절이 진행되는 동안 예수의 대사가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 내내 예수는 아무 말씀 없으셨고 이리저리 치이며 모든 조롱과 고난을 다 받아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뿐만 아니라 그의 기나긴 침묵에도 집중해야 합니다. 이 침묵은 그 자체로 예수 수난 이야기를 관통하는 매우 중요한 또 하나의 내러티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고난받는 예수는 그의 침묵이라는 무언의 대사를 통하여 인류구원의 길을 열어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Agnus Dei)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분명 이사야의 예언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7
로마 군병들에게 끌려가신 예수는 도살장에 던져진 한 마리 어린 양이었습니다. 프란시스코 데 주르바란(Francisco de Zurbarán(1598–1664)의 그림이 떠오릅니다. 우연을 가장한 운명처럼, 저는 2016년 11월에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서 그 작은(38cm×62cm) 그림을 만났습니다.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하고 뿔이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양이 네 다리가 묶인 채 모든 것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돌 제단 위에 놓여 있습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서서 이 그림을 바라봤을 때 숨이 확 막혀왔고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것만 같음을 느꼈습니다. 그림의 제목은 ‘Agnus Dei(아누스 데이)/하나님의 어린양’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세상에 오신 어린 양 예수는 그렇게 도살자들에게 건네어졌고 말없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이 그림은 참으로 특별한 그림입니다. 그 이유는 살아있는 동물(動物)을 그린 정물화(靜物畫)이기 때문입니다. 그림 속의 양은 네 발이 묶여 있습니다. 양의 눈을 보십시오. 분명 살아있는 양입니다. 그 어린 양은 저항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은 모습으로 스스로 ‘정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정물화에는 멈춰진 시간의 향기가 떠다닙니다. 하얀 어린 양의 색과 대비되는 온통 새까만 배경은 까마득한 시간 속에 진공상태처럼 놓인 영원한 현재로 우리를 끌어들입니다. 그 영원한 현재 속에서 우리는 어린양의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저 작은 배의 움직임마저 느낄 수 있습니다. 생명! 우리를 살게 하기 위한 생명입니다. 희생 없이는 또 다른 생명이 살아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사랑과 그가 달리신 십자가는 그렇게 우리들의 현재적 사건이 됩니다.
인간의 죄, 그리고 희생양
총독의 군병들은 관정 안에서 온 군대를 불러모아 예수를 모욕하기 시작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군인들은 항상 매우 긴장된 상태에 놓여 있고 포학함에 익숙해져 있기에 잔악한 조롱을 즐겨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그 모습이 남성성의 발로 같아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들을 짓누르고 있는 사실,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과 반대로 자신 또한 누군가에 의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긴장을 해소하기 위함이지요. 그래서 군인들이 등장하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는 약자에게 조롱 어린 집단 린치를 가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합니다. 지휘관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묵인합니다. 오히려 부하들의 악다구니를 은근히 자극하지요. 군대의 존재 목적은 선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이기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또한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께서는 전쟁과 같은 삶의 압박 속에서 사는 인생들의 긴장을 다 받아 주시는 ‘희생양’이 되고 계십니다.
‘희생양’, 그러한 약자들은 생존경쟁이 있는 곳 어디에나 있어왔습니다. 희생양은 조롱의 대상일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생존과 경쟁의 스트레스가 쌓일수록 세상은 억압의 대상으로 삼을 희생양을 원해왔습니다. 희생양은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항상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생양의 법칙’은 늘 제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사회적 격변이 있을 때 누군가 한 사람이나 한 집단을 희생양으로 내세워 그를 향해 집단적 분노를 쏟아 놓게 하는 것은 가장 흔하면서도 늘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약한 집단을 약탈하거나 멸절시키는 것은 강한 집단을 더 강하게 하고 무엇보다 그 집단을 더욱더 결속력 있게 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국민적, 인종적, 민족적, 종교적 말살 행위(genocide)도 끊이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2차 세계대전 때 나치가 유대인들을 학살했던 사건을 ‘홀로코스트’라고 하는데 그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로 ‘번제(燔祭)'를 뜻하는 '홀로카우스토스(ὁλόκαυστος)’입니다. 말 그대로 히틀러와 나치는 독일의 결속을 위해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지요.
희생양이 희생양 같아 보이지 않을수록 희생양의 법칙은 더 효과를 내었습니다. 80년대 우리나라의 몇몇 육군부대에서 운영되었던 삼청교육대는 사회에 존재하는 범죄자와 소위 인간말종들을 모아놓고 교화시킨다는 명목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목적은 따로 있었습니다. 삼청교육대는 조폭보다 더 집단적이고 폭력적인 힘을 의지하여 정권을 장악한 군부 출신의 대통령을 정의 사회의 수호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삼청교육대로 인해 수많은 희생양이 생겨났지만, 사람들은 희생양 같아 보이지 않는 희생양들의 모습에 속아 인권을 볼모로 한 군사정권의 포악한 쇼에 열광했었습니다. 로마 군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희생양이 희생양 같아 보이지 않을수록 그들의 조롱은 더 큰 효과를 내었습니다. 총독의 군병들은 왕 앞에 도열 하듯 예수 앞에 모여 왕을 상징하는 홍포를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왕의 규를 상징하는 갈대를 쥐게 하여 예수를 조롱하고 모욕했습니다.
희생양은 지금도 우리 사회의 곳곳에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힘없고 가난한 이들은 희생양이 되어 이 사회의 근간을 떠받쳐 주고 있습니다. 일상의 자극적인 뉴스들 속에도 늘 희생양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분노를 쏟아 붓거나 누군가를 과도하게 희화해야 임계점에 다다른 집단적 분노와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희생양은 원래 종교적인 개념입니다. 신과 인간을 가로막고 있는 죄라는 존재론적 장벽을 잠시라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죄의 무게에 견줄 희생양이 필요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어린 양이 되신 것은 그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적 콘셉트가 아니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오래전부터 오래도록 인간은 희생양이 필요했고 수많은 생명이 그 자리를 대체했습니다. 희생양은 자신을 누르고 있는 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본능적으로 만들어 낸, 살아남기 위한, 구원을 위한 영혼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예수는 그 모든 인간의 본성과 운명을 위한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오랫동안 인간에게는 다양하고 수많은 희생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죄 없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번으로 영속적인 죄사함의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신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는 또한 세상의 모든 ‘희생양을 위한 희생양’이 되셨습니다.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라 –히브리서 7:27
이렇게, 예수의 십자가 수난 이야기에 조롱과 모욕의 희생양이 되신 장면이 들어가 있는 것은 단순히 십자가의 이야기를 더 비극적으로 그려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적인 죄성을 십자가와 연결하기 위함입니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를 희롱하며 무릎을 꿇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Gegrüßet seist du, Judenkönig!/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29절b)”
“Gegrüßet seist du!(게그뤼쎗 자이스트 두!)”는 ‘나의 인사를 받으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어디서 본 듯한 이 표현을 두고 잠시 고민하다가 순간 전율이 왔습니다. 잠시 후에 만나게 될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대표하는 코랄 ‘O Haupt voll Blut und Wunden/오 거룩하신 주님 그 상하신 머리’에서 제게 큰 고민을 안겼던 바로 그 가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제24대 사법연수원장을 지내셨던 고 박삼봉 판사님은 바흐의 음악에 깊은 조예가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판사님은 조용하면서도 지적이고 부드러운 성품으로 생전에 많은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바흐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특징이지요. 대전고등법원장으로 재직하던 어느 날 박판사님은 제 지인에게 이 코랄에 대한 의견을 말씀하시며 우리 찬송가의 번역이 참으로 아쉽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수난곡 연재 글을 쓰기 전이었지만, 그 말을 전해들은 저는 이 코랄의 가사와 새찬송가 145장 ‘오 거룩하신 주님’의 가사를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번역된 가사는 독일어 가사의 감동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게 큰 고민을 안겼던 부분, 가장 번역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두 번째 연이었습니다.
O Haupt, sonst schön gezieret
Mit höchster Ehr' und Zier,
Jetzt aber hoch schimpfieret:
gegrüßet seist du mir!
앞선 세 행은 그 뜻이 명확했습니다. ‘받으신 고난이 아니었더라면(sonst), 지고한 영광과 존귀로(mit höchster Ehr' und Zier) 아름답게 빛나셨을(schön gezieret) 그 얼굴이(O Haupt) 지금 이렇게(Jetzt aber) 큰 모욕을(hoch schimpfieret) 받고 계신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마지막 행이 문제였습니다. 고난 받으신 예수의 상하신 얼굴을 표현한 다음에 나오는 ‘gegrüßet seist du mir!’를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가장 큰 난제는 ‘seist’라는 동사의 해석이었습니다. 이 동사는 독일어의 ‘be 동사’인 ‘sein’의 접속법 1식의 2인칭 단수형으로 보입니다. 접속법 1식은 까다로운 고급 문법에 속해서 번역이 쉽지 않습니다. ‘gegrüßet’은 ‘인사하다’, ‘du’는 ‘당신’, ‘mir’는 ‘나에게’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구절의 일반적인 번역(오역)은 ‘당신은 나에게 인사합니다(맞이합니다).’입니다. 그런데 문맥상으로 그의 고난받은 얼굴을 표현한 후에 ‘나에게 인사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이 부자연스럽습니다. 정확한 의미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왕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라면, 독일어 고어 표현에서 ‘seien’이라는 동사가 ‘보다’라는 의미의 ‘sehen’과 같이 쓰였기 때문에 ‘seist’를 ‘(너는) 보다’라는 의미의 2인칭 1격 단수로 해석하여 ‘그 상하신 얼굴로 나를 바라보신다’라고 해석하여 지금까지 사용했었습니다.
고귀하고 존귀하신 그 얼굴
아름답게 빛나셨던 그 얼굴이
지금 갖은 멸시 다 받으시며
나를 바라보시네.
그런데 막상 이 번역을 사용하면서도 그 해석이 정확한 것이 아니기에, 마음 한편이 계속 불편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번 글을 쓰면서 전율 가운데 커다란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가사와 거의 같은 문장이 오늘의 성경 본문에 등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동안 이 구절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었을까요? 문제의 코랄 가사 ‘gegrüßet seist du mir!’는 오늘 본문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를 희롱하며 하는 말 “Gegrüßet seist du, Judenkönig!/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29절b)”을 가져온 것이었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조롱하고 모욕하는 의도로 예수께 그런 인사를 했다면, 주님의 고난을 아파하고 그 고난으로 인해 나의 영혼이 구원받았음을 깨달은 코랄의 화자는 이제, 진심 어린 마음으로 예수께 똑 같은 경배의 인사를 제대로 다시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왕이여 평안하소서!’, “나의 왕이여 나의 진정한 경배를 받으소서!”
오, 그 상하신 얼굴이여!
이어서 마태수난곡을 대표하는 코랄 선율이 흘러나옵니다. 찬송가 ‘오 거룩하신 주님’입니다. 이 멜로디는 한스 레오 하슬러(Hans Leo Hassler)에 의해 1600년경 작곡된 세속적 사랑의 노래 ‘Mein G'müt ist mir verwirret/나의 마음이 혼란스럽구나’에서 가져온 것이며 가사의 컨셉은 바흐 이전에 북스데후데(Dieterich Buxtehude)의 1680년 작품인 ‘Membra Jesu Nostri/우리 예수의 지체(BuxWV 75)’이라는 작품에서 먼저 쓰이기도 했습니다. 이 곡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몸을 다리, 무릎, 손, 옆구리, 가슴, 심장, 얼굴 등 7개의 악장으로 표현했습니다.
이후 파울 게르하르트(Paul Gerhardt, 1607~1676)가 1656년, 미텐발데(Mittenwalde) 성 모리츠 교회의 목사로 일하던 마지막 해에 독일어로 번역하고 덧입혀서 바흐와 피칸더에게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흐는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아 마태수난곡에서 예수의 얼굴을 묘사하는 장면에 사용했습니다. 우리 찬송가 145장에는 이 곡의 작곡가 자리에 하슬러의 이름과 더불어 바흐가 편곡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바흐 이름 옆에 있는 1729년(원래는 1727년) 이라는 숫자가 바로 마태수난곡이 작곡된 연도입니다. 비록 바흐가 작곡한 선율은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만, 이 곡이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니 바흐는 제목 옆에 이름을 남길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코랄의 번역된 가사는 독일어 가사의 감동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가사가 감동적이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역설적으로, 독일어 가사는 우리 찬송가 가사와 다르게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받으신 그 얼굴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추가되는 부분이 있다면 “어찌하여 그 얼굴이 침 뱉음의 모욕을 당하셔야 하는가!”라던가 “누가 당신의 아름다웠던 그 눈빛을 이토록 참혹하게 만들었단 말인가!”와 같이 예수의 고난에 대한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반응만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 그림처럼 이 코랄은 단지 우리들을 십자가의 예수에게만 집중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과 해석은 듣는 이들에게 과감히 맡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