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호의 '너른마당'/설교비평 모음

설교자의 강단은 높아야 한다

한종호 2023. 8. 7. 09:27

설교와 관련한 인연은 깊고 오래되었다. 1992년 두란노서원에서 <그말씀>이라는 설교잡지를 만들 때 창간멤버로 들어간 후 얼마있지 않아 편집장으로 일하면서 근 6년간 설교와 관련해 다양한 기획을 하기도 했다. '이 달의 설교자'라는 꼭지에서 꽤 많은 설교자를 인터뷰하면서 설교자들의 허와 실이 무엇인지 체득하기도 했다. 그 후 <뉴스앤조이>를 창간할 때 처음으로 설교 비평이란 악역(?)을 맡으면서,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을 접할 수 있었다. 전화로 이메일로 대화의 자리에서 설교 비평에 대한 지지를 비롯하여 적대적인 입장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방식의 반응들을 접했다. 글이 나간 후 격려의 글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비난 일색이었다. 당시만 해도 목사의 강단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성역이었다. 지금은 여러분들이 저보다 더 나은 설교 비평 작업을 해오시기에 그때보다 형편이 많이 나아졌고 받아들이는 분들 입장에서도 이런저런 견해를 피력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했다고 생각한다. 아래의 글은 당시 독자들의 반응이다.

 

 저는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자신을 감옥에 가두었던 율법주의자들 또한 결국 하나님을 위한 사람들이라 인정하는 것. 그것이 더 필요한 것은 아닌지 생각됩니다. 저는 000 목사님 설교를 듣고 도전되고 실제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말투가 어떻든 목사님의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열심과 의분을 느낍니다. 순간순간 목사님께서의 실수도 있겠지만 000 목사님께서 그것보다는 좋은 영향력을 더 끼쳤다고 봅니다. 빛이 되고 소망이 있고 비전을 제시하고 말씀 앞에서 열정을 가지고 나가려는 분에게 동역자가 못될지언정 비판적 목소리만 높이는 것은 선하지 못하다고 생각됩니다.”

 

목사님의 수고가 한국교회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목사님의 수고가 사랑의 수고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님께서 언제나 예리한 - 몸과 마음과 혼과 영과 골수를 쪼개는 - 감성을 허락하시고, 어루만지는 부드러움을 겸하여 주시기를 바라면서.”

 

그 후 2002년 <기독교사상> 편집주간으로 10년을 있으면서 놓지 않은 부분이 '설교비평'이었다. 당시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이셨던 정용섭 목사님을 필자로  '설교 비평 멀지만 가야 할 길'이라는 꼭지를 만들어 한국교회 명망있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다루기도 헸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기독교사상> 창간 50주년 기념으로 '한국교회 16인의 설교를 말한다'라는 주제로 심포지움을 열고 특집으로 엮고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옛말에 볕이 밝으면 그림자도 진하다는 경구가 있다. 빛과 그림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말할 때 쓰는 말이다. 빛이 있는 곳에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홀로 존재할 수가 없어 반드시 빛이 있는 곳에 생긴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 또한 존재할 수 없다. 빛에 밝기의 차이가 있듯 그림자에도 진함의 차이가 있다. 어슴푸레한 빛에서부터 눈부신 빛에 이르기까지 빛이 가지고 있는 밝기의 차이야 대번 이해가 되지만, 그림자의 차이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림자면 그림자지 그림자에 진하고 옅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러나 그림자는 빛의 밝기에 따라 달라진다. 희미한 빛 앞에서는 그림자 또한 희미하나, 밝은 빛 앞에서는 그림자도 진해지는 법이다.

 

한국교회의 명망 있는 설교자들의 그림자는 너무 밝은 빛에 가려, 빛인지 그림자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설교가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내세워 설교자 개인의 욕망을 채우며 교권적 군림을 꾀해도, 삶과 시대적 상황으로부터 유리되어 버려도, 메시지가 교묘하게 이데올로기 또는 정치적 이기심을 포장하는 경우에도, 오도된 역사 인식을 주입시켜도 진한 그림자는 그만 빛에 매몰되고 만다. 이것은 세뇌되어가고 일반인들에게는 일종의 블랙 코미디가 될 뿐이다.

 

<속 빈 설교 꽉찬 설교>의 저자 정용섭 목사는 이 부분을 이렇게 지적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치우친 예배와 과대한 피해 의식(레드 컴플렉스)에 근거한 정치 설교가 한국교회 안에서 버젓이 주류로 행세하고 있는 이런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어쩌면 요즘 신세대들이 워낙 코미디를 좋아하니까 이런 방식으로라도 선교의 효율성을 높여보려는, 아주 심오한 뜻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예배와 설교는 그리스도교 영성을 심각하게 훼손한다. 이런 설교에 길들여지면 한국교회 신자들은 탈역사주의, 종교적 열광주의, 개인주의, 소비주의, 종교제국주의, 가부장적 권위주의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비평 통해 설교 업그레이드

 

문학 작품도 바로 읽히고 바로 쓰이기 위한 과정에서 비평 작업이 필수적이고, 영화도 그런 비평의 과정을 통해서 발전해나가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을 좌우하는 작업들에 대한 비평작업은 그 자체로서 이미 그 사회의 정신적 역량을 길러나가는데 막중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에 깊숙이 닿아 변화를 이룩해나가는 설교야말로 가장 우수한 비평 작업이 받쳐주어야 심도 있게 발전할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라고 하겠다. 그러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등식으로 비평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비평하면 이는 마치 신앙을 훼손하는 듯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신앙에 무지를 초래하는 일이자 신학적 세뇌에 우리 자신을 그대로 내어 맡기는 경우가 된다.

 

만일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주인에 대한 종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설파한다면 이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설교는 인간이 자유함을 깨우치고, 주종의 관계가 사라지는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주인과 노예의 질서를 강화하는데 설교가 도구로 쓰인다면 이것은 설교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만일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독재자의 치적을 마치 성서에 등장하는 위대한 지도자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놓고 미화한다면 이것 역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서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하다고 가르치면 이는 설교가 아니라 세뇌이며, 성차별의 설파일 뿐이다.

 

그런데 설교란 성서를 근거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명제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설교의 메시지에 대하여 일반 평신도가 논리적으로, 조직신학적으로, 성서적 근거를 가지고 명확하게 정리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 평신도가 설교를 비평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나 안목을 가지지 못한 채 설교에 노출되면, 그것은 이들 평신도를 설교자의 일방적인 논리에 휘둘리게 만들거나 잘못된 신념을 갖도록 하는 일이 된다. 은혜라는 것은 올바른 메시지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의 결과이다. 잘못된 메시지에조차 무조건 '아멘' 하는 것은 최면이나 오도(誤導)의 결과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실을 어떻게 타개해나가면서 성서적 메시지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인가, 수준이 달라진 평신도를 대하는 설교자의 설교가 질적 발전을 하도록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바로 이것이 설교 비평이 감당해야 하는 영역이다. 설교 비평이 발전하면 할수록 설교자들의 설교 수준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자신의 설교만이 아니라 타자의 설교에서 드러나는 문제나 한계를 민감하게 통찰해나가는 노력이 뒷받침될 때에 비로소 설교는 더 치밀한 내용으로 구성되고, 더 탄탄한 신학적 근거를 가지게 된다.

 

그러한 비평 작업의 축적이 없으면, 미래의 설교자를 교육시킬 방법도 없다. 신학교에서 설교 비평 작업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 설교에 대한 교육적 훈련은 빈약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강단이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설교에 대한 비평적 자기반성의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이를 지속적으로 진행시켜나갈 수 있는 공동의 논의의 현장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김승범

 

미성숙 시 인신공격으로 이어져

 

설교 비평은 자칫 좋은 설교를 난도질하여 본래의 메시지가 주려는 감동은 사라진 채, 해부학적 논리만 지배하여 설교가 다른 장르와는 구별되는 영역을 지닌 것을 간과할 수 있다. 인체에 대한 이해가 해부학적 접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생명력이 전제되지 않은 인체 이해는 다만 해부도에 대한 이해로 그칠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해부학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인체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얻지 못하고 또 병이 들거나 시들어 가는 생명력을 복원하는 의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설교 비평이 수행해야 할 기능 또한 중차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설교 비평은 설교에 대한 해부학적 이해와 접근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써 병에 걸려 있거나 기능이 왜곡된 설교를 파악하고 이를 교정해나가는 힘을 설교자가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작업이다. 따라서 설교 비평의 영역이 건강하게 발전하고, 이를 토대로 능력 있는 설교 비평 작업이 축적되면 이에 도움을 받는 설교자들은 자신의 설교를 놀랍게 발전시켜나갈 수 있는 것이다. 설교 비평 작업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 설교를 발전시킬 수도 있고, 설교 비평에 대한 비평이 이루어지면서도 그렇게 될 수 있다.

 

물론, 논쟁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니다. 논쟁의 훈련이 성숙하지 못한 경우, 설교 비평은 인신공격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논쟁은 감정적 대응으로 치우쳐 본래의 목적을 상실할 수 있다. 따라서 설교 비평에서 우선적으로 전제되는 것은 비평 작업의 논리적 훈련과 그에 필요한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소양과 함께 인격적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적 성숙이 동반되지 않은 비평 작업은  '난도질'이 되고, 결국에는 인신공격의 차원으로 전락하고 만다. 한국 사회에서 논쟁이 논쟁다워지지 못하고 결국에는 인신공격적 감정 대립으로 치닫고 마는 것은 모두 이러한 요인 때문이다.

 

아무튼, 설교 비평이란 설교에 담겨져 있는 오류를 지적하고 그 오류 판단의 근거를 제시하면서, 논점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기르고 이것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독자에게 촉구한다. 따라서 가령 독자의 반응 가운데, 사람마다 다 다른 목회적 영역과 책임 또는 소명이 있는데 그것을 어느 한 특정한 소명이나 관점에 의해서 재단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논리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 영역이나 소명, 또는 그 활동의 내용이 하나님 나라 운동의 원리와 근본에 합치될 경우에 한해서 지지받을 수 있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평신도들이 설교 비평적 안목과 지식, 그리고 반응의 능력을 수준 있게 가지게 되면 설교자들은 설교를 아무렇게나 하지 못할 것이다. 깊은 고뇌와 심사숙고하는 마음과 치열한 노력, 자기 비평적 시각을 통해서 한편의 설교라도 그것이 갖는 힘을 더욱 빛나게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설교 비평의 내용이 언제나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작업이 꾸준하게 이어지게 될 때, 한국교회의 강단은 새로운 차원의 비약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속적으로 진행시켜야 할 작업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공동의 자산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비평으로 좋은 설교 여부 알 수 있어

 

끝으로 설교 비평 작업은 좋은 설교가 어떤 것인지도 솎아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눈이 와야 솔이 푸른 줄 안다는 말이 있다. 소나무 잎이 푸르다는 것을 모두 알지만 대부분은 관심 없이 지낸다. 나무에 특별한 관심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푸른 것이 모두 소나무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거의 모든 나무들이 푸른 잎으로 서 있기에 나무는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지낸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잎사귀가 지기 시작하면 달라지기 시작한다. 나무마다 단풍이 들고 하나 둘 잎사귀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늘 푸른 나무들이 비로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푸를 때 같이 푸르다고 다 같은 것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가 눈이라도 오고 나면 대번 눈에 띄는 것이 늘 푸른 나무이다. 눈이 올 때쯤이면 대부분의 나무에선 잎이 모두 졌을 때, 나무마다 앙상한 가지로 서 있을 때이다. 하얀 눈을 뒤집어쓰고도 여전히 푸른 잎으로 서 있는 나무는 그제야 돋보인다. 네가 늘 푸른 나무였구나, 비로소 알아보게 된다.

 

한국교회 곳곳에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 되게 하는 의연하고 푸른 마음을 가진 설교자들이 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지난 4월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66편의 설교와 12명의 평자들의 글을 담아 출간한 김기석 목사님의  <말씀 등불 밝히고>는 지금까지 꾸준한 반응을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 설교와 관련된 책을 다양하게 구성해 출간할 예정이다. 끝으로 설교자의 품격과 위상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정대위 박사의 글로 마무리하려 한다.

 

설교자의 강단은 높아야 한다

 

강단 위에 올라선 설교자는 고독해야 한다. 그가 서 있는 강단은 회중으로부터 구분된 자리. 그의 목청이 울리는 시간엔 온 세계가 잠잠하다. 그는 고독하다. 그는 무엇에든지간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비스듬히 풍조와 여론에 의지해서 있어서는 안 된다.

어떤 학설이든지 어떤 견해라든지 이미 만들어진 어떤 방침에 떠받들려 강단 위에 서 있는 사람은 참 설교자가 아니다. 전통적인 의식에 몸을 감추고 거추장스러운 치레로 중무장을 하고서라야 비로소 강단에 오르는 목사는 바람직한 설교자가 아니다. 그러한 이는 고독하지 않다. 회중이나 시대가 시키는 말을 하기 위해서 거기 올라선 사람의 강단은 고독한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곳은 참된 설교자가 설 자리는 아니다.

 

불을 내뿜는 호렙 산의 봉우리로 오르는 모세는 고독하였다. 맨발로 오르는 산등성이의 높음, 그 열기와 그 음향, 그리고 그 두려움 속에 들러싸인 사람. 그의 고독 속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났다. 이것이 설교 전야에 목사가 경험하는 고독이다. 이 고독은 정일(靜逸)로 가득 차고 감동(inspiration)으로 풍부해야 한다. 그래야 내일 아침 강단 위에 올라설 설교자의 얼굴이 빛날 것이다. 설교자의 강단은 묏봉오리. 고독한 자의 외침이 거기로부터 울려퍼져야 한다.

 

고독한 설교자의 외침이라야 세상은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목사가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을’ ‘보통소리를 아우성치듯이 외쳐대면 청중은 귀머거리가 된다. 되풀이될 천편일률(千篇一律)의 단조로움은 설교자의 메시지를 죽여 버릴 것이다. 청중은 예측을 불허하는 돌연한 말씀이 두렵게 외쳐지는 것을 설교자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렵고 놀라운 말씀은 고독한 설교자만이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고독한 설교자는 세상과의 많은 계약 관계를 끊은 사람. 그러므로 세상이 그를 얽매지 못한다. 그의 정신적인 고독은 그의 특권이요, 온 세상이 다 옳다고 해도 아니다 하고 외칠 수 있는 것이 고독의 사람인 설교자의 특권이다. 진리는 거수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다수의 의견이나 여론이 진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고독한 묏부리에 올라서면 설교자는 시대의 흐름이 잘못된 방향임을 쉽게 보게 될 것이고, 그런 경우엔 그는 아니다 안 된다라는 외침을 외쳐댈 수밖에 없고, 또한 그 외침의 책임을 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의 특권이다.

 

원래 목사가 될 사람은 성실하고 정직하며 너그럽고 겸손한 인격을 갖추는 것이 바람직한 일. 그 뿐 아니라 그는 고독의 외로움을 참을 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되고, 또한 하나님과의 고독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 이러한 목사인 설교자가 설자리는 으레 높고 고독한 자리이고 그의 외침은 여전히 고독해야 한다. 모든 참된 설교자의 강단이 모두 묏부리처럼 드높기를.

 

정대위, <하늘과 바다 그리고 먼 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