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는 부산모임에서 후지이 다케시를 가장 많이 소개했다. “나의 존경하는 후지이 다케시 선생”이란 글이 대표적이다. 후지이 의 요한계시록과 누가복음 강해와 단테의 『신곡』, 구약성서의 창세기와 시편, 예수의 부활, 사도 바울의 사랑의 철학 같은 글들도 번역 해 《부산모임》에 실었다. 1970년대 중반에 복음병원 내의 분규로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낼 때는 후지이 다케시가 쓴 “패배의 승리”를 읽고 또 읽었다. 그 글이 후지이 사상의 핵심이고, 살아오면서 자신이 어려운 순간마다 문제 해결을 위해 붙들었던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대다수 제자나 후배 교수들은 패배의 승리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던 듯하다. 1970년대나 지금이나 이 짧은 글은 개신교 신학을 잘 모른다면 이해가 쉽지 않다. 다음은 “패배의 승리” 전문이다.
“오 얼마나 훌륭한 실패의 기록인가. 그대 예레미야의 생애는! 그 대는 불같은 정열을 기울여 계속해서 외친 지 50년이 되었으나 한 사람의 영혼도 회개시키지 못하고 백성들의 마음은 날로 완악해지 기만 했다. 그대의 눈은 눈물의 원천이 되어 밤낮 없이 뜨겁게 사랑 한 그 영광의 조국은 그대의 눈앞에서 태산이 무너지듯이 망하지 않 았던가! 그리고 그대 자신은 진작부터 비웃음을 받고, 저주되고, 온 땅의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친근한 자들이 죽이려고 하고 채찍을 맞고 감옥에 갇히고 구덩이에 던져지고 끝내는 원치 않는 나라에 강제로 끌려가 드디어 그곳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실로 일찍이 그대가 말한 것처럼 ‘끌려가 죽임을 당하는 어린양’이 바로 그대였다. 아, 이것은 완전히 실패의 생애가 아닌가. 이와 비슷한 예는 아무데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나는 이런 기록이 세상에 있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한다. 예레미야의 실패는 진리 또는 진실로 인한 실패였다. 그에게 조금이라도 교활한 면이 있고, 조금이라도 장삿속이 있었던들 그처럼 비참하게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패배는 그의 진실성의 투영(投影)이요 보증이었다. 후자는 충실하고 전자는 철저했다. 양자는 저울의 두 접시처럼 서로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었다. 나는 여기서 알 수 있다. 예레미야의 경우는 패배 자체가 오히려 승리의 소치임을. 예레미야는 세상을 이겼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서 패할 수밖에 없을 만큼 세상에 충실했으므로. 세상과 진실은 서로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세상은 예레미야를 짓밟아 그의 진실성을 증명하여 스스로를 심판한 것이다. 승리는 패배에 있다. 마치 생명이 죽음에 있고, 자유가 복종에 있는 것처럼. 죽음을 혐오하고, 복종을 부끄럽게 여기고 패배를 배척하는 현대인에게 무슨 생명과 무슨 자유가 있겠는가. 모든 사업에 의해 생애를 평가하고, 그대들은 예레미야 앞에서 조금도 얼굴을 붉히지 않는가?”
야나이하라 다다오는, 패하고 이긴다는 공리주의적(功利主義的)인 생각과 이 글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악한 세상에서 진실한 생애는 패배하지 않을 도리가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가치는 오직 진실한 생애뿐이므로 이 세상에서 패배한 자야말로 영원한 승리자’가 된다.